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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ESI Mar 02. 2022

나 혼자 글쓰기 레벨업

글쓰기 공부 일대기

 어렸을 때는 글 쓰는 게 정말 쉬웠다. 세상에 이렇게 쉬운 일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글만 썼다 하면 칭찬을 받았고 학교의 글쓰기 상은 전부 내 것이었다. 나는 내가 세상에서 글을 제일 잘 쓴다고 철석같이 믿으며 자랐다. 지금 작가가 되겠다고 나댈(?) 수 있는 건 이때 생긴 자의식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글쓰기 말고 수학을 잘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살아보니 글 쓰는 게 제일 어렵더라. 이만하면 괜찮겠다고 생각하면 어김없이 더 큰 산이 나타났다. 그렇게 글쓰기의 능선을 오르내리길 수년, 오늘은 나의 글쓰기 레벨업 일대기에 대해 써보려 한다.








 거창한 시작과 달리 청소년기에는 글쓰기와 먼 삶을 살았다. 으레 그렇듯 공부를 하다 보면 다른 것과는 거리를 두기 마련이다. 다시 글을 쓰게 된 건 대학 입시 논술 때문이었다. 나야 어렸을 때부터 글을 잘 썼으니 대학은 무리 없이 들어가겠구나 생각했다. 만화에서 이런 대사가 나오면 사망 플래그가 꽂혔다고 말한다. 예상과 반대로 흘러간다는 뜻이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 논술학원에 간 날을 기억한다. 학원에서 가르치는 글쓰기는 내가 알고 있는 것과 개념부터 달랐다. '주장-근거-반론-재반박-결론'의 5단 구성이었다. 지금이야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그게 이해되지 않았다. "왜 자기가 주장하고 자기가 반론하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안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학에 가야 하니까. 고3에게 '대학'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마법의 단어였다. 그러니 일단 배울 수밖에.


 나는 반에서 가장 논술을 못 쓰는 학생이었다. 매주 성적표가 나왔는데 내 건 찾기 쉬웠다. 맨 밑이었으니까. 꼴찌는 기본이요, 혼자만 평균에서 똑 떨어진 점이었다. 열심히 하면 오를 줄 알았는데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쓰면 최저를 맞춰도 논술 때문에 떨어질 수 있어."


 엄마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나는 글쓰기에 재능이 없나 봐. 나는 글을 못 쓰는 사람이야." 백일장은 전부 내 것이오, 세상에서 내가 제일 글을 잘 쓴다던 고고한 자존심이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대학에 가야 하니까.


 그날부터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내 것은 물론, 모범 답안, 반 친구의 답안까지 전부 읽으며 분석했다. 다른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 친구에게도 배웠다. 더 이상 대학은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반에서 1등 하고 만다' 그게 내 목표였다.


 그래서 1등을 했냐고? 아니, 나는 학원 수업이 끝날 때까지 꼴등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대학은 갔다. -대한민국에서 사교육으로 안 되는 건 없다.- 반에서 논술로 대학 간 사람이 나밖에 없었으니, 나름 괜찮은 성과라고 할 수도 있겠다.








 대학에 입학하니 글 쓸 일이 정말 많았다. 수업마다 리포트 과제가 주어졌다. 나는 자신 있었다. '내가 논술로 대학에 온 사람이라고! 이 정도는 껌이지!' 하지만 학점은 껌이 아니었다. 내가 배운 방식대로 글을 쓰면 이렇게 쓰는 게 아니라는 답이 돌아왔다. 대입 논술이 튜토리얼이었다면, 대학은 야생과도 같았다.


 1학년 1학기 때 '학술적 글쓰기'와 '영어 쓰기'라는 수업을 들었다. 1학년 교양 필수 수업이었으니 초보자 전용 던전쯤 되려나? 하지만 체감 난이도만 따지자면 대학에서 들은 수업 중 가장 힘들었다.


 '학술적 글쓰기'는 소논문을 쓰고 읽는 법을 배우는 수업이었다. 논문은 논술과는 또 다른 결의 글쓰기였다. 대입 논술이 잘 짜인 구성에 내용을 넣는 것이라면 논문은 탄탄한 논리를 바탕으로 성을 쌓아가는 것과 같았다. 이를 위해서 논리력과 창의력은 필수였다. 생각이라니, 주입식 교육을 12년 동안 받은 사람에겐 너무 가혹한 과제였다.



 다행히 힘들어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교수님도 이러한 사실을 아셨는지 팀을 짜주셨다. 함께 토론하면서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큰 뜻이셨겠지만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부족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더 부족한 법이니까. 갓 성인이 된, 머리에 든 것이라곤 오지선다에 마킹하는 것 밖에 없는 애들이 모였으니 잘 될 리 없었다. 다 같이 머저리라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학점은 상대평가니까.


 수업은 강도 높게 진행되었다. 개요부터 글쓰기까지 교수님께서 피드백을 해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둘도 없는 기회였지만 갓 입학한 신입생이 그런 것을 알리가 있나. 그저 도망치고 싶었다.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앞으로도 생각할 것 같지 않는- '사랑의 공유는 성립될 수 있는가'에 대해 쓰는 것은 정말 끔찍했다. 주제라도 재밌었으면 어떻게든 참아봤을 텐데.





 '영어 쓰기'는 더 지독했다. 한글로도 못쓰는데 영어로 써야 하다니. 오피스 타임마다 원어민 교수님을 못살게 굴었다. 교수님께서는 세심하게 설명해주셨지만 하나도 못 알아 들었다. 한국말도 못 알아듣는데 영어를 알아들을 리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장화 신은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지으면 교수님이 고쳐주셨는데, 그런 식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피드백을 받았다. 나중에 보니 내가 쓴 건 하나도 없더라고.


 졸업할 때쯤 돼서야 그 수업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깨달았다. 4년 동안 질리도록 논문을 읽고 리포트를 쓰고 나서야 교수님 말씀이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 어려운 수업을 새내기한테 듣게 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 수업은 1학년이 아니라 4학년 필수과목이었어야 했다.








 세 번째 레벨업은 대학교 3~4학년 때였다. 국문과 전공 수업을 들었는데 정말 신세계였다. 헬 국문이라더니, A4용지 10장짜리 소논문이 과제였다. 10장을 어떻게 써?! 국문과 학생들은 과제가 하나라서 다행이라고 말하더라. 제대로 기죽었다. 내가 들은 수업은 조별과제였는데, 10장짜리 소논문을 쓰고 발표를 하고 질의응답을 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다들 어찌나 매서운지, 눈물이 찔끔 나올 뻔했다.



 국문과의 글쓰기는 가히 보스급 던전이라 능력자들에게 버스를 타야만 했다. 타 전공 출신 쪼렙은 칼 한 번 휘두를 수 없었다. 내가 파일을 보내면 전부 피칠갑이 되어 돌아왔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쳐야 하지? 내 딴에 열심히 고쳐서 다시 보내면, 글쓰기 만렙 전사들은 한숨을 쉬며 자기가 다시 써버렸다. 내가 쓴 글이 똥이라면 그가 쓴 글은 작품이었다. '이 사람과 내가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라고?' 교수와 학생도 아니고 같은 학생끼리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단 말인가? 도핑한 선수와 경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차마 글에는 손도 못 대고 허드렛일만 열심히 도왔다.


 1년 뒤 다른 국문과 수업을 들었다. 그래도 경험이 있다고 1인분은 했다. 그 마저도 딜러가 아니라 탱커였지만. 때리지 못하면 맞기라도 잘하는 수밖에. 이땐 머리를 써서 내 전공과 관련 있는 주제를 하자고 팀원들을 꼬드겼다. 글은 조금만 쓰고, 관련 레퍼런스를 최대한 많이 준비해 양으로 승부를 봤다. 덕분에 교수님께 자료조사를 잘했다는 칭찬을 들었다. 당연하죠, 제 전공인걸요.


 학점은 좋지 못했지만 국문과 전공 수업을 들은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단 2개의 수업으로 내 글쓰기 실력이 급속도로 향상되었으니까. 고작 A4용지 1장을 채우는데 일주일이 꼬박 걸렸다. 전공생들의 유려한 문체를 따라 해 보겠다고 얼마나 끙끙거렸는지 모른다. 그러고도 좋은 소리는 못 들었지만. 좋은 글을 읽고 쓰는 것만으로도 많이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뒤로 다시 '나는 글 잘 써' 병에 걸렸다. 학술적 글쓰기도 마스터하고, 영어로 글도 쓰고, 국문과 던전도 깼으니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나도 어디서 꿀리진 않아! 글쓰기계의 지드래곤이었다. 내 상상 속에서는. 한 동안은 그 기분에 취해 살았다. 역시 나는 글쓰기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어. 암, 그렇고 말고.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 생각은 또 산산조각이 났다. 소설이 어려워봤자 얼마나 어렵겠나, 논문 쓰는 것보단 쉽겠지 했는데 또 사망 플래그가 꽂혔다. 소설은 내가 그동안 써온 글과는 결이 달랐다. 대사부터 지문, 묘사까지 아예 다른 차원의 글이었다. 같은 언어로 이렇게 다른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꼭 외계어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최근 공모전을 하는데 성적이 좋지 않아 지인들에게 감평을 부탁했다. 피드백을 받고 내 글을 다시 읽어보니 이건 소설이 아니라 논문이었다. 어디 레퍼런스에 발표할 것도 아니고, 이게 뭐람. 덕분에 자존감이 다시 바닥을 쳤다. 기본적인 문법도 모르면서 무슨 생각으로 소설을 쓴다고 덤볐는지 모르겠다. 이건 버스 태워 줄 사람도 없는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나는 또 글쓰기를 공부하고 있다. 똑같은 문장을 세 번이나 반복하는 것 같지만 조금 다르다. 이번에는 소설 쓰기를 배우고 있으니까. 독자의 입장에서 당연했던 것들이 내가 직접 쓰려고 하니 한 문장도 당연하지 않았다. 글자 하나하나를 피 토하는 심정으로 억지로 꺼내고 있다. 그래도 마음에 들진 않는다. 모니터와 씨름하다 혼자 중얼거린다. "역시 글쓰기는 어려워."








 글 쓰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일도 없는 것 같다. 다른 일들은 경험이 차곡차곡 쌓이는데, 이건 도저히 쌓일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다른 장르의 글을 쓰면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뇌를 갈아 끼우는 것 같다. 나는 가뜩이나 배우는 것도 느린데. 너무 억울하다.


 나같이 투덜거리는 사람이 많았나 보다. 미국의 시나리오 작가 윌리엄 골드먼은 이렇게 말했다.

 매번 처음 글을 써보는 사람처럼 쓸 것. 어떻게 쓰는지 이제 감 잡았다고 느끼는 순간, 작가로서는 마지막이니까. (매러디스 매런, <잘 쓰려고 하지 마라> 84쪽.)

 으윽, 명치 아파. 하지만 할 말이 없다. 유명한 작가도 이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글쓰기에는 끝이 없나 보다. 지금 고생하면 언젠간 편하게 글 쓰는 날이 올 줄 알았건만, 달콤한 꿈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이쯤 되니 평생 글쓰기를 배워야 한다는 게 실감 난다. 업데이트하면 만렙 기준이 올라가는 RPG 게임처럼 글쓰기 만렙도 계속 갱신되겠지. 나는 만렙에 다다르기 위해 계속 공부할 것이다. 끝없이 레벨 업하는 게임 캐릭터처럼. 지금도, 앞으로도, 나는 글쓰기 레벨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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