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15살 때의 일이다. 중국 베이징으로 3박 4일 해외 문화탐방 프로그램을 갔다. 이틀 째였나 삼일 째였나, 관광기념품을 사러 대형 쇼핑몰에 갔다. 우리나라로 치면 DDP 같은 곳이었는데, 한국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쇼핑 명소라고 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때만 해도 중국은 흥정이 보편적이었다. 그 쇼핑몰이 유명한 이유도 흥정하는 맛이 있어서라고 했다.
관광 가이드가 말했다. “중국에 오셨으니 중국식 쇼핑도 경험해보셔야죠. 물건 흥정할 때 무조건 2/3 이상 깎으셔야 합니다. 거기 사람들 다 남으니까 그렇게 장사하시는 거예요. 절대 속지 마시고 무조건 깎으셔야 합니다. 자, 그럼 자유롭게 쇼핑하시고 정해진 시간까지 버스로 오세요.”
이곳저곳 둘러보는데 어떤 가게에서 대나무로 만든 쥘부채를 발견했다. 다른 부채들은 전부 종이나 비단을 덧대어 중국 전통 그림을 그린 것이었는데 그 부채는 달랐다. 은은한 빛의 대나무 살에 대나무 수묵화가 그려져 있고, 붉은 실이 그 살들을 단단히 묶고 있었다. 깔끔하면서도 전통적인 생김새가 다른 부채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내가 부채를 열심히 바라보는 걸 느꼈는지, 주인아주머니가 다가와 불쑥 계산기를 내밀었다. 네가 생각한 가격을 써보라는 거다. ‘얼마 정도 써야 하지?’ 나는 대답 대신 손으로 아주머니를 가리켰다. 먼저 가격을 말해보라는 뜻이다. 아주머니께서 빠르게 숫자를 쳤다. 한화로 6천 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아주머니가 계산기를 내 손에 쥐어주었다. 이제 내가 금액을 제시할 차례였다. ‘아까 무조건 깎으라고 했지.’ 그런데 얼마를 제시해야 하는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가이드는 2/3 이상 깎으라고, 적어도 반은 깎아야 제 값에 사는 거라고 말했지만 어린 마음에 그게 잘 안 됐다.
일전에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부채를 8천 원 넘는 가격에 파는 걸 봤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그 주인아주머니가 걱정되기도 했다. 흥정할 걸 알고 일부러 높게 부르는 거라지만, 죄다 깎으면 그 사람들은 뭘 먹고 사남? 한 명쯤은 호구처럼 굴어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지금도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는 충분히 싼데. 그래서 나는 주인이 제시한 가격의 2/3, 그러니까 한화 약 4000원쯤 되는 돈을 불렀다.
중국인 아주머니는 너무 좋아하며 내가 제시한 금액을 바로 받아들였다. '이상하다. 원래 흥정하다 다투기도 한다던데? 너무 단번에 받아들이는 거 아니야?' 너무 비싼 금액을 부른 건 아닐까? 갑자기 후회되기 시작했다. '아니야, 이것도 충분히 싼 걸. 이 정도면 괜찮은 걸 거야.' 버스로 돌아가는 길, 부채를 매만졌다. 매끈하고 보드라운 촉감이 이 정도면 잘 산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정해진 시간이 되어 모두 관광버스로 돌아왔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무슨 물건을 샀는지, 얼마에 샀는지를 말했다. 한 남학생은 아이팟을 샀다고 했다. 짝퉁인 걸 알지만 진짜 작동이 되는 건지 궁금해서 사봤다나 뭐라나. 내 차례가 되었다. 내가 그 부채를 4000원에 샀다고 하니, 가이드가 놀라며 왜 그랬냐고 나무랐다. 내가 제시한 가격에서도 반을 더 깎을 수 있었다고. 그는 큰 문제가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아마 어린 학생이 덤터기를 쓴 것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그 말을 들으니 내가 잘못한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중국인 아주머니가 걱정돼서 많이 낸 건데, 내 선의로 인해 내가 멍청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순간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인솔자로 따라오신 교감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물건의 가격은 파는 사람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잘 쓰는지에 달려 있는 거란다. 비싸게 주고 샀어도, 네가 잘 이용해서 더 비싸게 쓰면 되는 거야. 그러니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라.”
가이드는 바로 맞장구를 쳤다.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좋은 경험 하면 된 거죠!" 그는 황급히 주제를 바꿔 다음 관광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부채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래, 보란 듯이 잘 써야지. 그날부터 그 부채를 정말 열심히 들고 다녔다. 여름 내내 쓴 것은 물론, 개학하고 학교에 매일같이 들고 다녔다. 친구들이 너무 예쁘다며 자기도 갖고 싶다고, 한번 써봐도 되냐고 물어봐서 더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두 달을 매일같이 들고 다녔다. 더위가 가시고 찬 바람이 불 무렵, 부채를 연결하는 끈이 똑 끊어졌다. 손때 묻은 부챗살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동안 정말 열심히 썼기 때문에.
교감선생님께선 울먹이는 학생을 달래려고 하신 말씀이었겠지만 그 말은 내 인생의 분수령이 되었다. 지금도 나는 물건을 살 때 스스로 되묻는다.‘이 가격만큼 잘 쓸 자신이 있는가?’ ‘내가 쓰고자 하는 바에 적정한가?’ 가끔 충동구매를 하고 싶거나, 고가의 물건을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될 때 나는 교감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린다. 그러면 답이 나온다. 사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물건의 가격은 누가 정하는 걸까? 과거 물물교환으로부터 시작한 거래는 화폐가 등장함으로써 일정한 가격을 갖게 되었다. 언뜻 보기에 가격은 절대적인 것 같지만 사실 가치교환을 기반으로 한 상대적 비율에 불과하다. 모든 것이 상대적인 세상에서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면 그건 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단 물건뿐만이 아니다. 무언가를 살 때, 팔 때, 결정할 때 생각해보자. 나에게 적합한 가격인가? 나에게 필요한 가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