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으로 만난 부자는 A 원장이었다. A원장은 소문난 알부자였다. 거리 하나가 전부 그의 건물이라는 둥, 강남에서 벌만큼 벌어서 편하게 살려고 외곽으로 나왔다는 둥 별의별 소문이 파다했다.
확실한 건 그는 부자였다. 그의 차가 고급 세단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삶이 부자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원장임에도 불구하고 학원에 자주 오지 않았다. 학원은 직원들에게 맡긴 채,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어울리기를 즐겼다. 발이 넓은 그는 아는 것도 듣는 것도 많았다.
일하지 않는 사장이 싫을 법도 하건만, 직원들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A 원장을 온전히 믿고 따랐다. 직원들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원장님께서 생각한 게 있으시겠지.”
그를 보고 있으면,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었다.
A 학원은 나의 첫 직장이자 가장 힘든 학원이었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학원답게 지켜야 할 것들이 넘쳐났다. 가위질하는 법, 풀칠하는 법 하나까지 전부 규칙이 정해져 있었고,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종이였는데, 절대 단면을 쓰면 안 됐다. 어떻게 해서든 양면 인쇄를 해야 했고, 쓰고 난 이면지는 풀 받침대나 작은 메모지로 사용해야 했다. 자잘한 소도구조차 마찬가지였다. 조금 남긴 채로 버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이지 지독한 곳이었다.
내가 A 원장을 존경하게 된 것은 몇 년 후 B 학원에서 일하게 되면서부터였다.
B 원장은 아주 프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최대한 나를 배려해주겠다며, 굳이 일찍 올 필요도 없고 완벽하게 일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힘든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다. 다 맞춰줄 수 있다고.
이상한 일이지, 분명 좋은 말인데 느낌이 쎄했다. 그리고 그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프리한 마인드를 가진 그는 학원도 프리하게 운영했다. 그에 맞춰 나 또한 프리하게 일해주길 바랐다. 오늘 근무 시간이 어떻게 되는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그날 출근해야만 알 수 있었다.
프리한 건 업무도 마찬가지였다. 말할 때마다 업무 내용이 바뀌어서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시 말해, B 학원에는 체계가 없었다. 그는 매사 주먹구구식으로 헤쳐나갔다. 몸을 갈아 넣는, 그러나 효율은 낮은 운영 방식이었다.
나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이 학원, 이윤이 남긴 하는 건가?'
B 학원에서 일하면서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중 가장 마음에 안 들었던 건 B 원장이 종이를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황당한가? 하지만 내겐 꽤나 큰 이유였다. 그는 반도 안 쓴 A4용지를 휙휙 버렸고, 한 두 줄 낙서만 적혀 있어도 가차 없이 버렸다. 그러면 나는 그가 버린 이면지를 다시 주웠다. 깨끗한 부분을 잘라내고, 통에 가지런히 담아두었다.
B 원장은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선생님,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그런 걸로 쩨쩨하게 구는 사람 아니에요.”
내가 B 학원에 면접을 보러 갔을 때, 그는 내게 말했다. 이전 학원을 크게 키웠는데 어느 순간 망하더라고. 한번 실패해봤기 때문에 이젠 그 방법을 안다며, 이번에는 성공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남다른 셀링포인트를 가지고 있었고, 괜찮은 수업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그의 학원은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별로 쓰지도 못하고 버려지는 A4용지들을 보며 생각했다.
'아, 이 사람 또 실패하겠구나.'
그때 알았다. 성공과 실패는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그건 A4용지 한 장의 차이였다.
피터 린치는 저서 <월가의 영웅>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어떤 사람을 볼 때 ‘어떻게 저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면, 그 사람이 거짓말을 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그 문장을 읽자마자 A 원장과 B 원장이 생각났다.
한 사람은 5년, 10년 후를 내다보고 일했지만 다른 사람은 당장 다음 달을 걱정하며 전전긍긍했다. 두 사람은 분명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다만 종이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을 뿐이다.
두 사람이 생각날 때면 나는 늘 내 삶을 다시 돌아본다. 나는 지금 종이를 어떻게 쓰고 있나. 남들은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