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웨이브 실버 테크놀로지 케어 센터
written by. HANESI
[고된 삶의 끝에서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공간, 뉴 웨이브 실버 테크놀로지 케어 센터]
뉴 웨이브 실버 테크놀로지 케어 센터는 캐치프레이즈에 걸맞게 누구나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그날은 조금 달랐다. 센터 117호 입주민이 옥상 난간에 올라가 자살하겠다며 난리를 쳤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은 임서경, 1994년 4월 15일 생, 뉴 웨이브 실버 테크놀로지 케어 센터 117호 입주 1년차.
뉴 웨이브 실버 테크놀로지 케어 센터는 발칵 뒤집어졌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성된 이 곳에서 그녀는 왜 죽으려 한단 말인가? 도대체 왜?
“올라오지 마! 올라오면 죽어버릴 거야! 나 지금 칼 들고 있어!”
임서경이 칼을 휘두르며 소리 질렀다. 건물 앞은 센터 입주민들과 직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다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옥상만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뉴 웨이브 실버 테크놀로지 케어 센터장은 초조하게 옥상을 바라보았다. 뉴 웨이브 실버 테크놀로지 케어 센터는 개관 이래 단 한 번의 사고도 일어난 적이 없다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이제 그 기록이 깨지게 되었지만.
'느낌이 쎄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런 대형 사고를 칠 줄이야.'
센터장이 혀를 차는데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302호 입주자 노규원. 입주 4년차로 평소 임서경과 절친한 관계라는 이야길 들은 적 있다. 센터장은 노규원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하지만 불편한 심기를 숨길 수는 없었다.
“임서경씨가 왜 저러는 겁니까? 뭐 아시는 거 있으세요?”
노규원은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 여자는 왜 또 울고 난리람. 센터장은 탐탁지 않은 눈으로 그녈 노려보았다.
그때, 센터 안으로 119 구급차가 들어오더니 구조대원 세 명이 차에서 내렸다. 센터장은 재빠르게 그들에게 달려갔다.
“보여요? 노인네가 난리도 아니라니까. 어떻게 좀 해봐요.”
센터장이 옥상을 가리키며 구조대원들을 다그쳤다.
“일단 대화를 시도해봐야죠. 노인네들 저러는 건 다 원하는 게 있어서 예요. 해달라는 대로 해주면 금방 내려올 겁니다.”
구조대장은 별일 아니라는 듯 호기롭게 말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믿음직스러운지 센터장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임서경은 이들에게 맡기면 되리라. 센터 앞은 구경나온 직원과 입주민으로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었다. 센터장은 조용히 경호원을 불러 귀엣말을 했다. 충직한 경호원은 방송실로 달려갔다. 곧이어 사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 뉴 웨이브 실버 테크놀로지 케어 센터 입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화창한 아침입니다. 지금 센터에 작은 문제가 생겼으나 곧 정리될 예정이니, 입주민 여러분께서는 걱정하지 마시고 방으로 들어가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센터의 품위를 위해 오늘 사건에 대해서는 함구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저희 뉴 웨이브 실버 테크놀로지 케어 센터는 입주민 여러분들의 건강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편안한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입주민들이 하나 둘 씩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센터장은 직원들을 불러 모아 윽박질렀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제대로 관리 안 해?”
“죄송합니다! 평소에 조용해서 문제가 생길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랑 트러블도 없고, 밥도 잘 먹었는 걸요.”
임서경 담당 직원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옆에서 PDA를 검색하던 의료 기록 관리 직원이 말을 덧붙였다.
“임서경 회원카드를 보니 최근 상담 로봇 이용 횟수가 줄어들었어요.”
“상담 로봇 이용이 줄어들었다고? 그러면 로봇을 교체해줬어야지.”
“안 그래도 로봇 외형을 교체하거나 다른 상담 프로그램으로 변경해드린다고 했는데 거절하더라고요. 상담사를 만나고 싶다던데요.”
“상담사? 요즘 상담사가 어디 있어? 로봇이 다 알아서 해주는데. 지금이 2022년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냐? 단단히 노망났군.”
구조대원들이 건물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중 임서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왜 당신들만 나와요? 임서경은?”
구급대원들이 말없이 위를 가리켰다. 임서경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소용 없어요. 대화 자체를 안 하려고 해요.”
“그럼 어떡하란 말이오? 이대로 내버려 두라고?”
“가족 연락처 알아요? 아무래도 가족이 와서 직접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정민균은 PDA로 임서경의 개인정보를 검색했다.
[보호자: 김준영 / 가족 관계: 아들]
정민균은 김준영에게 전화해, 지금 당장 오라고 말했다. 당신 어머니가 대형사고를 쳤다고. 구조대원들은 만일을 대비해 건물 아래에 에어매트를 깔고, 옥상 앞을 지키기로 했다. 정민균은 마음을 졸이며 옥상을 바라보았다. 부디 자신의 센터에서 사고가 일어나질 않길 바라며.
임서경은 옥상 난간에 기대어 섰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곤 센터 건물 4동이 전부였다. 뉴 웨이브 실버 테크놀로지 케어 센터는 세상으로부터 동 떨어진 섬이었다. 죽기 전에는 탈출할 수 없는 섬. 서경 또한 마찬가지리라. 호기롭게 옥상에 올라왔지만 아직도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죽고 싶은 건지 살아서 나가고 싶은 건지.
그녀가 뉴 웨이브 실버 테크놀로지 케어 센터에 입주한 것은 1년 전이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아들 준영이 먼저 제안했다. 혼자 살면 외롭기도 하고 위험하니, 또래 어르신들이 계시는 곳에 들어가 사시는 게 어떻겠냐며. 요양원? 집 없는 노인들이나 가는 데 아닌가? 서경은 자신이 짐짝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혼자 사는 건 무서웠다.
“어머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곳 아니에요. 저희가 설마 어머님을 요양원에 보내겠어요. 실버 케어 센터라고, 노인 분들 생활하시기 편하게 만든 곳이 있대요. 거기서 지내시는 건 어때요?”
며느리가 옆에서 거들자, 마음이 기울었다. 아들과 며느리의 부탁에 못 이겨, 뉴 웨이브 실버 테크놀로지 케어 센터를 방문하게 되었다. 막상 둘러보니 센터는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곳이었다. 건물도 깨끗하고, 직원들도 친절했다. 임서경이 감탄하며 센터를 구경하는데, 센터장이 다가와 말했다.
“저희 뉴 웨이브 실버 테크놀로지 케어 센터는 최첨단 로보틱스 기술을 활용하여 정밀하고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입주민의 건강 상태를 고려한 맞춤 식단과 의료 서비스, 여가를 위한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요.”
정민균의 말처럼 로봇들이 센터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입주민들을 도왔다. 서경은 그 광경이 낯설었지만, 아들은 너무 마음에 든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민균은 로봇이 사람보다 더 정확하고 친절하다며 추켜세웠다.
집에 돌아온 임서경은 오랫동안 고민했다. 요즘은 다들 로봇을 쓴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로봇이 어려웠다. 어떻게 다루는지도 몰랐고 자신이 그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도 부끄러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가 뉴 웨이브 실버 테크놀로지 케어 센터에 적응할 수 있을까? 망설이는 임서경에게 아들이 말했다.
“어머니,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그 센터가 비용이 저렴해요. 로봇을 이용하는 대신, 인건비가 별로 안 들거든. 저희 입장도 이해해주세요. 대신 애들 데리고 자주 찾아 갈게요.”
아들의 이야기를 듣자, 임서경의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아이 둘을 키우는 데 오죽 힘들까. 자식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었다. 그리하여 임서경은 뉴 웨이브 실버 테크놀로지 케어 센터에 입주하게 되었다.
뉴 웨이브 실버 테크놀로지 케어 센터에서는 정해진 유니폼만 입을 수 있었다. 센터 로고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하얀색 상의와 하의였다. 환자복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센터 규칙이라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센터에서의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정기적으로 의료 로봇이 찾아와 건강검진을 하고, 의료 데이터를 바탕으로 맞춤 식단이 제공되었다. 조리 로봇은 임서경에게 과체중과 당뇨를 조심해야 한다며, 채소 위주의 다이어트 식단을 만들어 주었다. 의료 로봇의 말대로 하니 3달 만에 5kg을 감량할 수 있었다. 살이 빠지니 몸도 가뿐해졌다. 다이어트에 성공한 임서경은 기분이 좋아졌다.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몰라. 그녀는 뉴 웨이브 실버 테크놀로지 케어 센터가 마음에 들었다.
센터 2동은 여가를 위한 편의시설이 있는 건물이었다. 1층에는 담소를 나눌 수 있는 라운지가 있는데, 그곳에서 여러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2층에는 입주민들을 위한 재활 치료 공간이 있었으며, 3층에서는 취미 클래스를 진행했다. 뒷뜰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가볍게 산책하기 좋았다. 이곳에 오기 전, 임서경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시간만 죽일까 걱정했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뉴 웨이브 실버 테크놀로지 케어 센터에는 다양한 시설들이 있었고, 그녀는 얼마든지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임서경이 입주한 날, 2동 라운지에서 신규 입주자를 위한 파티가 열렸다. 임서경은 그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사귈 수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니 너무 즐거웠다. 일흔, 모든 것이 익숙하고 단조로운 나이. 나이가 들어 새로운 환경에 다시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이 무서웠지만, 생각과는 달리 새롭고 재밌었다.
비슷한 나이 대의 사람들을 만나니 대화도 잘 통했다. 그중 임서경과 가장 친한 사람은 노규원이었다. 임서경보다 다섯 살 많은 그녀는 입주한 지 3년 된, 센터의 왕언니였다. 허리와 다리가 불편한 규원은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 그녀는 하루 종일 2동 라운지에 앉아, 입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센터 내에서 노규원이 모르는 소식은 없었다.
“언니는 왜 항상 여기에만 있어? 다른 데도 다니지.” 임서경이 물었다.
“여기 다닐 데가 어디있어.”
“재활 치료도 받고, 이것저것 배우면 좋잖아.”
노규원이 임서경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가 여기 온지 얼마나 됐지?”
“세 달 쯤 됐나? 왜?”
“너 그동안 다른 데 가본 적 없지? 이번 기회에 다른 데도 가보는 거 어때?”
그간 바빠 서경은 다른 시설을 이용할 기회가 없었다. 아들 내외가 자주 찾아오는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였다. 김준영은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꼬박꼬박 면회를 왔다. 그들은 그녀의 큰 기쁨이자 자랑이었다. 서경은 세상에 이런 효자가 없다며, 자기 아들을 칭찬하기 바빴다. 하지만 노규원은 그런 그녀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곤 했다. 임서경은 노규원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 나를 질투하는 거야.’
그럴 때마다 임서경은 보란 듯이 아들 자랑을 했다.
하지만 임서경의 즐거움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들에게서 일이 바빠 한 동안 못 갈 것 같다는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매주 그들이 오는 날만 기다렸는데. 서경은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어머니, 이번 기회에 여기저기 다녀보시는 건 어때요? 거기 무슨 수업도 한다던데, 그런 거 배워보세요.” 며느리가 말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마침 노규원이 말한 것도 생각나, 임서경은 취미 클래스를 듣기로 결심했다.
다음 날 임서경은 2동 3층에 있는 취미 교실에 갔다. 복도 양 옆으로 방들이 줄지어 있었다. 각 방에는 명패가 달려 있었다. 꽃꽂이, 서예, 그림, 뜨개질, …. 마음이 설레었다. 임서경은 손재주가 좋아 젊었을 때부터 이것저것 만들곤 했다. 남편과 아들의 목도리도 그녀가 직접 떠주었다. 목도리를 매고 좋아하던 아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손주들에게 목도리를 떠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아들도 그녀처럼 옛날을 추억할지 모른다.
임서경은 뜨개질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지만 교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옆에 있는 꽃꽂이 교실을 들어갔지만, 사람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서예 교실에 들어가니, 그제야 사람이 보였다. 노인 두 명이 서예를 쓰고 있고, 한 남자가 그들 옆에 서서 가르치고 있었다. 남자는 임서경을 보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뜨개질하려고 왔는데 사람이 없네요.”
“뜨개질 수업은 월요일, 수요일에 해요. 공지 못 받으셨어요?”
공지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그녀가 당황하자 남자가 물었다.
“혹시 수강신청은 하셨어요? 수강신청을 해야 수업을 들으실 수 있으세요.”
“그건 어떻게 하는 거에요?”
“센터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하시면 돼요. 그런데 이번 분기 신청은 끝나서 다음 분기에 하셔야 해요.”
임서경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교실을 나왔다. 직원을 찾아가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러자 직원이 센터 홈페이지 공지사항에 있는데 몰랐냐고 되물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설명해주지 않았는데. 임서경은 방으로 돌아가 서랍에서 입주민용 PDA를 꺼냈다. 입주할 때 받았지만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몰라 서랍에 처박아 두었다. PDA를 켜 이것저것 눌러보았다. 알 수 없는 창들이 뜨기 시작했다. 돋보기안경을 썼는데도 글씨가 너무 작아 보이지 않았다. 떠듬떠듬 읽었지만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았다. 임서경은 PDA를 끄고 다시 서랍에 넣었다.
입주 8개월, 임서경은 센터 생활에 시큰둥해졌다. 센터에는 그녀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아무리 로봇이 상용화되었다지만, 임서경은 평생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하루아침에 로봇을 이용하려 하니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고 싶었지만, 기계를 다루는 것이 버거워 번번이 실패했다. 방법을 배워보려 했지만, 로봇은 그녀의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했다. 기계를 다루지 못하니 그녀가 센터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임서경이 하는 일이라곤 먹고 자고 시간을 때우는 것뿐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뉴 웨이브 실버 테크니컬 케어 센터. 너무 완벽하게 조성된 나머지 센터는 임서경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임서경은 허무했다. 암울한 생각들이 그녀를 잠식해갔다. 참다못해 아들과 며느리에게 하소연했지만, 그들은 서경의 힘듦을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그 동안 어머니께서 너무 고생하셔서 그래요. 말년에 편하게 살면 좋지.”
“맞아요, 어머니. 계시다보면 적응되실 거예요. 주변 얘기 들어보니까, 다들 그런 때가 있대요. 지나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 말을 듣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아들과 연락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센터 직원이 상담을 권했다.
“아드님께 연락이 왔어요. 어머님께서 많이 힘들어 하시는 것 같다고. 그래서 말인데 상담을 받아보시는 건 어떠세요? 간혹 센터에 있는 걸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상담을 받으면 한결 낫다고 하시거든요.”
“상담은 무슨…. 괜찮아요.”
“아드님께서 아주 신신당부 하셨어요. 어머님 잘 챙겨드리라고. 아드님이 어머님 생각을 많이 하시나 봐요.”
직원이 너스레를 떨자 임서경의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아들이 저를 생각해 센터에 연락까지 했다고 하니 마음이 약해졌다. 노규원만 해도 여기서 3년을 살았는데, 1년도 안 돼서 힘들어 하는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임서경은 오랜 고민 끝에 상담을 받기로 결심했다. 의료 로봇이 방으로 와, 심리 검사를 시행했다. 얼마 뒤, PDA로 검사 결과가 왔다. 경미한 우울 증세가 있으니 상담을 받으라는 소견이었다. 아들과 직원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임서경은 바로 상담을 받겠다고 말했다. 며칠 뒤, 그녀는 건강센터에 있는 상담실로 갔다.
상담실에 들어가자, 커다란 곰인형이 놓여 있었다. 상담사는 보이지 않았다. 임서경이 방 안을 둘러 보는데, 인형에게서 소리가 았다.
[임서경님- 안녕하십니까- 본인 확인 하겠습니다-]
“아니, 이게 뭐람!” 임서경은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음성 분석- 임서경 본인 확인- 상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임서경은 상담실을 박차고 나와, 담당 직원에게 항의를 했다.
“어떻게 인형이 상담을 해요!”
“인형이 아니라 로봇이랍니다. 내담자와의 친밀도를 위해 외관을 인형으로 꾸몄지요. 요즘 상담 로봇이 얼마나 훌륭한지 아세요? 다들 처음에는 불편해 하시지만, 나중에는 이것만한 게 없다며 칭찬하세요. 일단 써보시면, 곧 마음에 드실 거예요.”
직원이 그렇게 말하자, 임서경은 할 말이 없어졌다. 어떻게 로봇과 상담을 할 수 있다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정말 로봇과 상담을 한단 말인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직원은 로봇이 진료도 보는데 상담을 못할 이유가 있냐며, 서경의 당뇨가 나아진 것처럼 우울증도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직원이 그렇게 말하자 임서경도 할 말이 없었다. 분명 그녀는 로봇 덕분에 건강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것과 상담은 다르지 않나? 무어라 콕 집어 말할 순 없었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무엇이 맞는 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녀만 이곳, 뉴 웨이브 실버 테크놀로지 센터에 어울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임서경은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저녁 6시가 되자, 어김없이 도우미 로봇이 저녁을 가지고 들어왔다.
“식사하고 싶지 않아.” 임서경이 말했다.
[식사를 거르면- 혈당 수치가 나빠질 수 있습니다- 식사하셔야 합니다-]
도우미 로봇이 말했다. 임서경은 마지못해 식판을 들었다. 식판 위에는 작은 약봉지가 있었다.
“이게 뭐야?”
[항우울제입니다- 식후 30분 내에 섭취해야 합니다-]
저녁 메뉴는 채소 비빔밥이었다. 이름은 비빔밥이었지만 희멀건해 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입맛이 싹 사라졌다. 본래 그녀는 국수를 좋아했다. 하지만 센터에 온 뒤로는 밀가루는 구경도 할 수 없었다. 입 안이 썼다.
‘국수라면 좀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뤄지지 않을 상상을 하며, 비빔밥을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음식이 얹히는 것 같아 반도 먹지 못했다. 약봉지를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 약을 먹으면 나아질 거야. 검사에서 우울증이라고 했으니까.’
임서경은 약을 꿀꺽 삼켰다. 도우미 로봇은 그녀가 식사 후 약을 먹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방을 나섰다.
임서경은 일주일에 한 번씩 상담을 받았다. 상담은 간단했다. 상담 로봇은 그녀에게 질문을 했고 임서경은 답했다. ‘식사는 제 때 하시나요?’ ‘잠을 잘 주무시나요?’ 질문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것들이라,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제 때 먹고 자지 않으면 로봇이 24시간 잔소리하는 곳인데,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건지. 임서경은 이 상황이 어이없었다. 한편, 치료가 효과가 있었는지 서경의 상태는 착실히 좋아졌다. 그녀는 예전처럼 라운지에 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TV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의료 로봇은 우울 수치가 좋아졌다며 그녀를 칭찬했다. 겉보기에 서경의 삶은 나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속은 점점 더 썩어 문드러졌다. 약으로도 암울한 생각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서경은 밤마다 생각에 짓눌려 잠들지 못했다.
아들 내외가 오지 않은 지 6개월이 넘어갔다. 간간이 화상통화를 하긴 했으나 일이 바쁜 탓인지 센터에 방문하진 않았다. 임서경은 손주들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아이들을 본 게 언젠지 가물가물했다. 계산해보니 그녀가 입주한 지 10개월이 다 되었다.
‘밖에 나가고 싶다.’ 서경은 놀랐다. 생각해보니 1년 가까이 센터에만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한 번 자각하자, 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하루가 다르게 커졌다. 바깥바람을 쐬면 그녀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무거운 생각들도 날아갈 것 같았다.
임서경은 도우미 로봇에게 외출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도우미 로봇은 상담 로봇을 소개시켜주었다.
‘외출 한 번 하는데, 상담할 일인가?’
임서경은 의아했지만, 일단 상담을 했다. 상담 로봇은 어느 때와 똑같이 ‘식사는 제 때 하시나요?’, ‘잠을 잘 주무시나요?’ 등의 질문을 했다. 임서경이 나가고 싶다고 반복해 말하면, 상담 로봇도 똑같은 질문만 반복해 물어보았다. 대화가 이어지질 않았다. 임서경은 담당 직원을 찾아가, 외출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말을 돌리는 건 담당 직원도 매한가지였다.
“나가고 싶어요.” 임서경이 말했다.
“어디 불편한 곳이 있으세요?”
“불편한 건 없어요. 잠깐 바람 쐬고 오려고요.”
똑같은 대화가 반복되었다. 임서경이 재차 직원을 재촉하자, 직원이 센터장과 면담해보라고 말했다. 센터장과 면담을 하려면 며칠은 기다려야 하는데 그래도 할 거냐고 물으며. 임서경은 기다리겠다고 답했다. 며칠의 지지부진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센터장과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센터장이 물었다. “어디 불편한 곳이 있으신가요?”
또, 또, 또, 그 질문! 여기 사람들은 다 같은 말 밖에 할 줄 모르나? 임서경은 꾹 참으며 입을 열었다.
“불편한 거 없고, 밥 잘 먹고, 잠 잘 자요. 사람들하고 잘 지내고 있고, 여기 생활도 즐거워요. 그냥 잠깐 나갔다 오고 싶은 것뿐이에요.”
센터장은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임서경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침묵이 수 십 시간 같았다. 마침내 센터장이 입을 뗐다.
“안됩니다. 보호자의 동의 없이는 외출할 수 없습니다.”
“보호자라뇨? 누가 제 보호자인데요?”
“음…. 임서경님의 보호자는 김준영님으로 지정되어 있네요. 김준영님께서는 임서경님 외출 허가를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바빠서 모시기 힘들다는 군요.”
“준영이가 바빠서 나를 안 찾아오니까, 내가 잠깐 나갔다 온다는 거 아니에요.”
“보호자 동의 없이는 외출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아들이 왜 내 보호자예요! 내가 걔 보호자면 모를까!”
“처음 입주하실 때부터 보호자로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안전상의 이유로 보호자의 동의 없이는 외출이 불가합니다. 센터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저희가 책임질 수 없어요.”
센터장이 계약서를 보여주었다. 계약서에는 보호자의 동의 없이 입주자의 외출이 불가능하다는 조항이 있었다. 계약서 말미에는 임서경과 김준영의 서명이 있었다. 입주 당시, 김준영은 의례적으로 쓰는 계약서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임서경은 아들의 말만 믿고 사인했다. 그게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임서경은 헛웃음이 나왔다. 센터장은 김준영의 동의 없이는 외출할 수 없다며 단호하게 말했다. 임서경은 터덜터덜 방으로 돌아왔다.
얼마 뒤 아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센터장이 연락한 것인지, 임서경이 외출하고 싶다고 말한 것을 알고 있었다. 아들과 며느리는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일이 바빠 그런 것이니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애써 돌려 말했지만 결국 외출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임서경은 반복되는 말에 지쳐 알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언제쯤 여길 나갈 수 있는 거니?’
머릿속을 가득 메운 질문을 애써 삼킨 채.
임서경은 더 이상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사람도 만나지 않고 상담도 받지 않았다. 두문불출하는 그녀가 걱정된 노규원이 찾아왔다. 임서경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몸뚱아리가 침대에 눌러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팔다리는 힘없이 널브러져 있고 탁한 눈동자는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거운 죽음의 그림자가 그녀 위에 내려 앉아 있었다. 임서경이 고개를 돌려 노규원을 바라보았다. 못 본 사이 얼굴이 야위고 주름은 더 깊어졌다. 노규원이 임서경의 손을 잡으며 울먹였다.
“서경아, 왜 그래. 이게 무슨 일이야.”
임서경은 노규원의 손을 바라보았다. 규원의 주름진 손은 따뜻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사람의 온기던가. 임서경은 손을 꼭 쥔 채, 눈물을 흘렸다.
“언니, 나 더 이상 못 있겠어. 나 나가고 싶어. 나 좀 내보내 줘.”
노규원은 아무 말 없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하지만 붙잡은 손에는 억센 힘이 느껴졌다. 임서경은 고개를 들어 노규원과 눈을 맞추었다. 노규원의 눈에는 연민과 동질감, 쓸쓸함, 그리고 빛바랜 희망이 있었다. 그제야 임서경은 노규원의 행동이 이해되었다. 왜 그녀가 2동 라운지에만 있었던 것인지, 임서경을 보고 불편한 기색을 보였던 것인지.
그날, 임서경은 잠에 들지 못했다. 과연 이곳을 나갈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센터장도, 아들도, 그녀를 내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여기 있는 것인가. 죽기 위해? 임서경의 눈이 번뜩였다. 이곳의 입주자들은 모두 육신이 죽을 날을 기다리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녀의 남은 시간도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그리하여 임서경은 칼을 들고 옥상으로 향했다.
임서경이 옥상 난간에 오른 지 3시간이 지났다. 보통 고집이 아닌지 도통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센터장은 초조한 마음으로 정문을 바라보았다. 검은 색 승용차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운전석에서 양복을 입은 남자가 내렸다.
“임서경씨 아들 맞으시죠?”
센터장이 성급하게 물었다. 양복 입은 남자, 김준영은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건물 옥상 위에 낯익은 인영이 보였다. 어머니였다. 김준영은 센터장을 노려보며 소리 질렀다.
“도대체 센터에서 관리를 어떻게 하는 겁니까? 돈을 그렇게 받아먹고 사람 하나 제대로 관리 못해요? 이게 지금 무슨 일입니까!”
“그건 김준영씨 어머니께 직접 물어보시죠. 저희 센터 개관 이래로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우리 센터 평판이 떨어지면 김준영씨가 책임지실 겁니까?”
센터장과 김준영이 목소리를 높이며 싸웠다. 구조대원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 싸우세요. 임서경씨 아드님 맞으시죠? 저희와 함께 올라갑시다. 어머님을 저렇게 둘 순 없잖아요.”
“하, 그래서 제가 뭘 하면 됩니까.”
“그냥 올라가서 몇 마디 하세요. 왜 노인 분들 좋아하는 말 있잖아요. 사랑한다, 보고싶다, 그런 거. 마음 약해지시면 알아서 내려오실 겁니다.”
김준영은 구조대원을 따라 건물로 들어갔다. 김준영은 굳은 얼굴로 계단을 올랐다. 그런 김준영이 신경 쓰였는지 구조대원이 괘념치 말라며 말을 건넸다.
“다들 몰라서 그렇지, 이런 일이 자주 있어요. 노인네들 요양원에 있기 싫다고, 어찌나 난리를 부리는지.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하다니까요.”
그 말을 들은 김준영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김준영이 옥상 문을 열었다. 구조 대원 3명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고 임서경은 칼을 휘두르며 그들을 경계했다. 김준영이 분노에 가득 차 외쳤다.
“어머니!”
임서경은 김준영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아니, 네가 여길 왜 왔어!”
임서경이 놀라 소리 지르자, 김준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구조대원이 김준영의 팔을 슬쩍 잡으며 속삭였다. 침착하게, 차분하게 말하세요. 김준영은 몸 안에 있는 모든 인내심을 끌어 모아 말했다.
“어머니, 내려오세요.”
“나는 안 간다.” 임서경이 단호하게 말했다.
“뭐가 마음에 안 드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려가서 얘기해요. 여긴 위험하잖아요.”
김준영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임서경은 고개를 돌렸다.
“안 간다니까.”
진전 없는 말다툼이 계속되었다. 김준영은 제발 내려가자며 애원했다. 하지만 임서경은 칼을 내려놓지 않았다. 계속되는 실랑이에 지친 구조대원들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김준영이 애걸복걸하는 동안 그의 전화는 쉬지 않고 울렸다.
[준영씨 어디야? 부장님이 찾으셔]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해 잠시 나온 건데, 예상과 달리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김준영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버럭 화냈다.
“어머니, 정말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저 바쁜 거 모르세요? 지금도 일하다 왔어요. 회사에서 당장 오라고 난리도 아니에요. 밑에 사람들도 많은데 부끄러워 죽겠어요! 남부끄럽지 않게 살라고 하신 건 어머니시잖아요. 그런데 정말 왜 이러세요!”
“이 놈이…. 어미가 칼 들고 죽겠다고 설쳐대니까, 이제야 겨우 얼굴 들이밀었으면서…. 뭐? 부끄러워? 이 어미가 부끄러워?”
임서경이 소리를 지르자 김준영은 질색하며 고개를 돌렸다. 서경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제 배 아파 낳은, 목숨보다 소중한 아들이었다. 이 세상 누구보다 잘 안다 자부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눈 앞에 있는 사람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 사람은 그녀의 아들이 아니다.
임서경의 세상이 무너졌다. 무너진 세상 속에서 임서경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네가 이 어미의 맘을 알아? 이곳에 갇혀 지내는 내 맘을 아냐고! 여긴 감옥이야! 죽어서만 나갈 수 있는 감옥! 이곳에 날 가두고 죽게 만들려는 네 속셈을 모를 것 같아!” 임서경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죽게 만들다뇨. 너무 말씀이 지나치시잖아요.”
“지나친 건 너겠지!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잖아!”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야윈 손목이 파르르 떨렸다.
“그 칼로 저 찌르시게요?”
김준영이 빈정거리며 말하자 임서경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손의 떨림도 더 심해졌다.
“네, 차라리 저를 찌르세요. 그러면 회사에 할 말은 생기겠네요.”
김준영이 팔을 벌리며 임서경에게 다가갔다. 임서경은 덜덜 떨며 뒷걸음질 쳤다. 구조대원들이 김준영을 붙잡고 말렸다.
“이러시면 안됩니다. 자극하시면 안된다니까요.” 구조대원이 작게 속삭였다.
“내버려둬요! 우리 어머니께서 기어코 자식을 죽이시겠다는데, 제가 뭘 어떡합니까. 우리 가족 일이니까 당신들은 신경 꺼요!”
김준영은 구조대원들을 뿌리치며 임서경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임서경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야윈 몸이 힘없이 흔들리고, 주름진 눈가에 뿌연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김준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갔다. 그의 얼굴에서 단호함이 느껴졌다.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을 종결시키고 말겠다는.
“그만! 그만 하세요!”
등 뒤에서 쉰 목소리가 날카롭게 날아왔다. 김준영과 구조대원들이 고개를 돌려 옥상 문을 바라보았다. 휠체어를 탄 노인, 노규원이었다. 그 옆에는 센터장이 서있었다. 구조대장은 센터장에게 눈짓으로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센터장은 안심하라는 듯 손을 들어보였다. 노규원은 휠체어를 타고 느릿느릿 옥상으로 들어왔다.
“저 할머니는 또 뭐야?” 한 구조대원이 툴툴거렸다.
노규원은 김준영에게 다가가 그를 저지했다. 김준영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노인에게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센터장을 보고 참았다. 노규원은 김준영을 지나쳐 임서경의 앞으로 다가갔다.
“서경아 그만 하자. 이만하면 됐다.”
임서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노규원이 한 발자국 다가가 임서경과 눈을 맞추었다.
“이러지 말고 내려가서 얘기하자. 여기서 이런다고 저 인간들이 네 속을 알기나 하겠니. 나는 안다. 다 알아. 그러니 일단 내려가자. 그리고 나한테 다 얘기해. 내가 다 들어줄게.”
임서경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칼을 내팽겨치고 가슴을 때리며 울었다. 쿵 쿵 쿵. 임서경의 입에서 들끓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통곡이었다. 노규원은 임서경을 부여잡고 함께 울었다. 옥상에는 노규원과 임서경의 울음소리만 남았다.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임서경의 칼은 구조대원이 주웠고 임서경은 노규원과 얼싸 안고 울었다. 센터장은 저런 노인들을 자주 보았다. 죽네 사네 난리를 쳐도 결국 제 풀에 지쳐 그만 뒀다. 임서경도 감정을 추스르면 알아서 내려올 것이다. 센터장은 구조대원에게 뒤를 맡기고 건물 아래로 내려갔다.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몰려와,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다.
“대충 정리됐어. 얼른 여기 정리하고 들어가자. 웬 노친네 때문에 하루 종일 고생이네.”
곧이어 김준영이 내려왔다. 센터장이 다가가 말했다.
“앞으로 어떡하실 겁니까?”
“어떡하긴요. 계속 여기 계셔야지. 어디 모실 데도 없어요.”
김준영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주머니를 더듬으며 담배를 찾으려 했지만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김준영이 머리를 긁으며 멋쩍게 말했다.
“아까 화내서 죄송합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실례했습니다.”
김준영은 센터장을 가볍게 안으며 그의 주머니에 무언가를 찔러 넣었다.
“제가 회사 일이 바빠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빳빳한 종이의 촉감이 느껴졌다. 센터장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신경 쓰실 일 없도록 잘 하겠습니다.”
김준영은 차를 타고 센터 밖으로 나갔다. 센터장은 주머니에 든 것을 만지작거렸다. 도톰한 두께감이 마음에 들었다. 센터장은 직원들에게 얼른 정리하라며 윽박질렀다. 그의 진두지휘 아래, 센터는 빠르게 정리되었다.
센터가 조용해진 뒤, 임서경은 노규원을 따라 옥상에서 내려왔다. 양 볼이 푹 꺼져 늘어졌으며, 눈가가 벌겋게 짓물렀다. 텅 빈 눈동자가 그녀 안의 무언가가 꺼졌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의료 로봇은 그녀의 건강 상태가 좋지 못하다며, 건강센터에 입원할 것을 권했다. 일주일동안 건강센터에 머물며 진정제를 맞았다.
임서경은 두려웠다. 소란을 피웠으니, 이제 이곳에서 편하게 지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은 빗나갔다. 정민균은 그전보다 더 친절하게, 미리 신경 쓰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를 위해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이제 임서경의 방에는 24시간 도우미 로봇이 상주하게 되었다. 도우미 로봇은 그녀가 가는 곳마다 따라 다니며 그녀를 챙겼다. 또한 센터 내에서 서경의 평판이 나빠질 것을 고려해, 그녀의 방에 출입하는 인원을 엄격히 제한했다.
임서경의 삶은 더 단순해졌다. 그녀는 방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었다. 굳이 방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 임서경이 하는 일이라곤 창밖을 구경하는 것뿐이었다. 두꺼운 쇠창살 사이로 노을이 내려앉았다. 방바닥에 주홍빛 줄무늬가 그려졌다. 임서경은 멍하니 창밖을 내다봤다. 봉고차 한 대가 센터 안으로 들어왔다.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와 젊은 부부가 차에서 내렸다. 남자는 큰 캐리어를 끌고, 여자는 노인을 부축하며 센터로 들어갔다. 그들 뒤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하늘이 점차 어두워졌다. 그 순간, 저물어가는 태양이 마지막 빛을 내며 세상을 붉게 물들였다.
*'월간 HANESI'는 매월 15일 연재됩니다.
*본 매거진에 업로드되는 모든 작품은 HANESI에게 저작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