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이 작아진 걸 느낀다. 그 이유가 내 상황이 변변치 못해서라는 게…. 나를 더 작아지게 만든다. -22. 3. 22. 일기
영화 ‘김씨표류기’에는 두 명의 김씨가 나온다. 한강에서 투신(投身)하다 무인도에 떠내려간 ‘남자 김씨(정재영)’과 자신으로 방에 갇힌 ‘여자 김씨(정려원)’. 남자 김씨는 눈앞의 서울을 등지고 무인도에서 생활하기를 선택한다. 그는 강물에 떠내려오는 쓰레기를 주워 자신만의 안식처를 만든다.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있지만 남자 김씨의 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목숨을 끊기로 마음먹었지만 화장실은 가고 싶고, 맛있는 걸 먹고 싶다. 이왕이면 그럴듯한 보금자리가 있었으면 좋겠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갖고 싶은 걸 가져야 한다.
한편, 도시 안의 섬에 고립된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여자 김씨. 은둔형 외톨이인 그녀는 3년째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문 밖의 사회 대신 그럴듯하게 꾸민 미니홈피를 택했다. 일종의 사이버 안식처인 셈이다. 이런 그녀에게도 취미가 있는데, 바깥세상을 구경하는 것이다.
‘김씨표류기’는 스스로 섬이 되길 자처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두 사람의 보금자리는 보기엔 허술해 보여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이 존재한다. 나름 괜찮은 섬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를 발견하고 대화하기를 바란다. 끊임없이 다가가려 노력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우리에게 한 가지 메시지를 던진다. 사람은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1만 시간 동안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연락이 끊겼으니 다들 꽤나 답답했을 거다. 어쩌면 내 욕을 했을지도. 하지만 나는 오해를 푸는 대신 욕먹으며 잠수 타기를 택했다. 굳이.
사람을 만났을 때 제일 처음 하는 말이 있다.
“너 요즘 뭐해?”
지극히 당연한 질문이다. 뭘 하고 사는지 알아야 얘길 나눌 것 아닌가. 그런데 그 질문이 내겐 당연하지 않았다. 나는 그 당연한 질문을 답하지 못해 얼버무려야 했다.
“그냥…. 취업 준비하고 있어.”
어떻게 첫 번째 질문을 넘겼다. 숨 고를 틈도 없이 두 번째 질문이 날아온다.
“앞으로 뭐하고 싶은데?”
“글쎄, 뭐라도 하고 있지 않을까?”
어색하게 웃으면 상대는 금세 다른 얘길 꺼냈다. 대화는 다른 주제를 향해 달려가지만 나는 오래도록 그 순간에 머물러 있었다. 평범한 질문, 평범하지 않은 답변.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내가 끔찍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걸 반복해야 해? 그럴 바엔 아무도 만나지 않겠어. 그날 나는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피해망상이라고? 맞다. 상대에겐 아무 잘못이 없었다. 다만 내가 너무 예민해서 그것 하나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을 뿐이다. 내가 문제라는 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힘든 걸지도. 나의 부족함을 이유로 타인에게 가시를 세우는 내가 싫었다.
방에 숨어 끊임없이 되뇌었다. “잠깐, 아주 잠깐 숨는 것뿐이야. 나는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어. 내가 좀 더 괜찮아지면, 근사해지면, 남들 앞에 서기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면. 그때 다시 나갈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잠깐 숨어 있는 것뿐이야. 나는 다시 돌아갈 거야.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가진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알량한 자존심이라도 지켜야 했다. 그래서 최악의 선택을 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땐 그것마저 없으면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그렇게 수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건 내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늪이야.’ 다시 돌아가고 싶어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내가 세상을 등지고 있는 동안 너무 많은 것이 바뀌어 버렸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제야 염치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 좀 도와줘. 나 좀 살려줘.”
사람이 고팠던 나는 끝없이 내 이야길 털어놓았다. 끝없는 고독, 절망, 자괴감, 재기불능. 그러자 상대방도 털어놓기 시작했다. 외롭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나는 깜짝 놀랐다. 누가 봐도 멋있는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었으니까. 그이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얘길 하는 건 네가 처음이야."
그때 알았다. 우린 모두 하나의 섬이란 걸. 겉보기엔 다들 괜찮아 보이지만, 그 안에는 혼자 감내해야만 했던 시간이 분명 있다고. 나는 내가 세상에 하나뿐인 섬인 줄 알았지만, 사실 이 세상은 온통 섬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아직도 평범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여전히 그 질문이 어렵고 힘들다. 그러나 더 이상 피하고 싶지 않다. 내가 평범하지 않은 답을 해도 받아줄 사람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을 내놓으려 한다.
모든 사람이 내 대답을 좋아하진 않겠지. 그렇다고 따뜻한 사람까지 외면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다. 적어도 섬으로 살아본 적 있는 사람은 알 거다. 그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