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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ESI Sep 15. 2022

죽지 마, 백수라서 부조금 낼 돈 없어.

나에게 위로를 알려준 사람, H

 오카다 다케시는 안전기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안전기지란 자신을 모두 털어놓을 수 있는 심리적 지지자를 의미한다. 감사하게도 나는 그런 사람을 이미 만났다. 나의 친구, H이다.





 H는 나의 학창시절 친구로, 그녀와 나는 아주 오랜시간 알아왔다. 가끔 우리는 우리가 친해지게 된 계기에 대해 회상하곤 하는데, 정확히 기억해내진 못한다. 어느 순간 그녀와 나는 매우 친해져있었고, 예상치 못하게 오랫동안 연락하며 지내게 되었다.


 그녀와 나를 함께 아는 친구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너희 둘이 그렇게 오랫동안 친하게 지낼 줄은 몰랐어."


 그럴 때면 나와 H는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자연스럽게 H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야기들. 그런 것들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H는 그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들어주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선이 존재했고, 그 선 중 하나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무조건 들어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한 번도 나를 탓하지 않았다. 비난하지도, 추궁하지도 않았다.


 "그랬구나."

 그게 그녀의 대답이었다.


 나는 그 한 마디가 좋았다. 그 말이 듣고 싶어서, 부러 이야기를 꺼낼 만큼.








 상담을 다니고 나서도, 아무에게도 내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참을 수 없을 만큼 힘들었던 날. 나는 갑자기 그녀를 불러내어 모든 걸 쏟아냈다. 서너시간을 운 것 같다. 그날의 H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마 그녀도 놀랐을 것이다. 그 긴 시간동안 알아오면서,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녀는 몇 시간동안 나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었다. 내가 말을 끝마치고 가쁜 숨을 몰아쉴 때, 그녀는 나를 안아주며 말했다.


 "말해줘서 고마워."


 그 말이 내게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 나는 그 날, 처음으로 타인이 주는 위로가 달콤하고 따뜻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조금씩이나마 나의 힘든 점들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H 덕분이다. H는 나에게 위로받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녀와의 긍정적 경험에 힘입어, 나는 조금씩 사람들을 만나 말하기 시작했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날수록 나는 더 많이 위로받았고, 더 많이 나아졌다. 사람은 사람으로 치유받는 거구나. 그제야 나는 위로가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었다.








 취업을 목전에 둔 H는 매우 바빴고, 그녀와 나 사이의 연락은 뜸해졌다. 그러던 중 나는 다시 조금씩 고립되어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백수였고, 사람을 만날 기회조차 없었으며, 평상시에 자주 연락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아니, 충분히 만날 수 있었는데 내가 그러지 못한 것일까?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내가 극도의 우울감으로 정상적인 판단을 하는 게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그 즈음에는 호흡곤란, 식욕감퇴 등 공황장애 증상도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나는 급하게 그녀에게 카톡을 남겼다.


 [잘 지내?]




 보내면서도 내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가뜩이나 바쁘고 힘든 애한테 연락을 하다니. 그것도 내가 힘들어서 못 참겠다는 이유로. 왜 이렇게 된 걸까. 왜 내겐 말할 친구가 H밖에 없었을까. 정말 이게 최선이었을까.


 하지만 견딜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으면 숨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정말이지 한계의 한계에 다다랐다. 사람이 고팠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고, 말하고 싶었고, 정서적으로 교감하고 싶었다. 대신 그 사람은 내 이야기를 온전히 들어주어야만 했다. 만약 그가 나를 저버린다면, 나는 세상을 저버릴 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한계였다. 그 상황에서 생각나는 사람은 H뿐이었다.




 한참 뒤,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고, 나는 어느 때처럼 툴툴거렸다. 사는 게 힘들어, 쉽지 않아, 도망치고 싶어 등등. H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사는 게 쉽지 않지, 우리 나이가 원래 그렇대. 그녀는 내가 안고 있는 커다란 문제를 아무렇지 않게 만드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일상적인 대화는 나를 우울의 수렁에서 꺼내어 현실감각을 일깨워주었다. 몇 번의 카톡으로 나는 빠르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평범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그래도 우리 열심히 해보자라는 형식적인 말로 대화를 끝맺었다. 늘 그랬듯이 H와의 대화는 나에게 산뜻함을 가져다 주었다. 한층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앉아 있는데, 한참 뒤 H에게서 카톡이 왔다.


 [아직 죽지마. 나 백수라서 부조금낼 돈 없어. 그러니까 죽지마.]


 너무나도 H다운 말이라서, 한참을 울고 웃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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