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그 말,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나는 그 말에 귀 기울여 듣는 편이었다. 나보다 오래 산 인생 선배의 말을 들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지만 최근 생각이 바뀌었다. 나 잘되라고 하는 말들을 굳이 귀담아들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정말 나를 아껴주는 사람이 아니라면.
‘너 그렇게 살면 큰일 나.’ ‘사회생활하기 힘들어.’ ‘성질대로 살면 큰일 난다.’ 사람들은 나를 앞에 세워두고 열변을 토했다. 어찌나 흉흉한지 그 얘길 듣고 있으면 나 같은 사람은 사회에 발도 못 디디고 연소(燃燒)할 지경이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장황설의 마무리는 늘 똑같았다.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그러면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나 같은 사람은 사회생활하면 안 돼!'
내가 생각해도 나는 유별났고 사회생활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내 성격을 죽이고, 바꾸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들의 조언을 거름 삼아. 그러자 사회생활,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자책해야만 했다. 하지만 살다 보면 문제는 터지기 마련이고, 그 모든 문제를 전부 내 탓으로 돌리자니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멍청했다. 그들은 왜 내가 사회생활하기 힘들다고 단언했을까? 정말 내가 사회생활을 하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면, 나를 위해 다른 방법을 소개해줘야 했던 게 아닐까? 하지만 '어떻게'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를 ‘잘못된 사람’으로 규정하고 내가 틀렸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만 있을 뿐.
사회생활을 시작해보니 그들이 문제 삼았던 나의 성격이나 대인관계는 하나도 문제 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게 문제였다. 업무능력이나 자질구레한 실수 같은 거. 하지만 그 정도는 다른 사람들도 다 하고 살더라. 문제 될 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일 거라는 그 말도 안 되는 착각 말고는.
사람들은 내가 사회의 불순분자인 것처럼 대했지만, 막상 사회에 들어가 보니 나는 0.001%의 영향력도 없는 소시민이었다. 사회는 생각보다 더 관대했다. 나 같은 사람 하나 정도는 ‘그럴 수 있지’하며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나를 받아들이지 못한 건 무시무시하다던 사회가 아니라 나를 위한다던 그 사람들이었다.
나를 위하는 건, 내가 변하는 게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인간의 공포는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내가 나 자신에게 두려움을 가졌던 것은 나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충분히 들여보고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니 스스로에 대해 충분히 안다면, 대다수의 문제는 맥이 빠지도록 쉽게 해결될 수밖에. 하지만 이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너무 오랜 시간을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 데 허비했다. 차라리 그 시간에 내 마음속의 이야기에 집중했더라면 더 단단하고 유연한 자아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나에게 ‘좋은 말’을 해주었던 그들을 탓하고 싶진 않다.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좀 더 나를 믿지 못한 나를.
이건 정말 좋은 말이다
내게 좋은 말을 해주던 이들 중 힘들 때 내게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그들 중 대다수는 내가 힘든지도 몰랐을 것이다. 내게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들의 관심사는 ‘나라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가진 ‘이름표’였다. 어쩌면 자신의 말을 열심히 들어주는 다루기 편한 사람이었을 지도.
이야기를 끝맺어보려고 한다. 타인의 말보다 내면의 말에 집중하게 된 후, 아주 오랜만에 나를 위해 조언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