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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ESI Aug 10. 2022

엄마와 나의 이인삼각

 안녕하세요! 한 주동안 잘 지내셨나요?


 지난주에는 ‘나에겐 마음껏 실패할 권리가 있다’라는 편지 썼습니다. 글의 말미에 ‘나의 실패가 타인의 실패로 전이되지 않길 바랐다’고 썼는데요, 오늘은 이 ‘실패의 전이’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저희 엄마는 참으로 헌신적인 어머니입니다. 당신께서 직접 ‘평생을 자식에게 충성했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시니 말 다했지요. 대부분의 모녀가 그렇듯, 엄마는 나의 가족이자 버팀목이었고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아빠 봉급으론 네 가족이 살기 조금 빠듯했어요. 하지만 엄마는 허리끈을 졸라매고 어떻게든 살아냈습니다. 대신 그렇게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자식들을 물심양면 지원해주었지요. 자식이 하고 싶은 건 최대한 지원해주어야 한다.’가 부모님의 자녀관이셨거든요.


 아아, 저희 부모님의 최선이 얼마나 간곡하고 처절했는지요. 그 시간을 말하려면 사흘 밤낮을 새도 부족할 것입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건 부모님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자식도 최선을 다해야 했지요. 그렇지 않으면 부모님의 노력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저도, 저희 부모님도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요? 분명 온 가족이 노력하고 있는데 집안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나빠졌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고성이 오고 갔습니다. 날 선 말들이 서로의 폐부를 찌르고, 처음의 마음가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죠. 의미 없는 소모전에 지친 나머지 저는 도망치기를 선택했습니다. 학교와 학원을 탈출하려는 저와 어떻게 서든 붙잡아 다시 집어넣으려는 엄마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제발 나를 내버려 둬! 내가 망하든 말든 내버려 두라고! 그냥 날 포기하라고!”


 악을 쓰는 저를 붙잡고 엄마는 말씀하셨어요.


 “어떻게 네가 그래. 어떻게 네가 나한테 그렇게 말해!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나한테 어떤 딸인데!”




 그날의 엄마 눈동자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 깨달았어요. 아, 엄마한테 나는 전부구나. 내가 엄마를 저버리면 엄마한테는 아무것도 없구나. 그래서 저는 저희 엄마를 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엄마는 자주 말씀하셨어요.


 “내가 너한테 투자한 게 얼만데. 이렇게 지원받기 쉽지 않아. 엄마는 많은 거 안 바라. 엄마 아빠가 투자한 만큼만 하면 돼.”


 왜 때문인지 그 말이 참 상처가 되었어요. ‘투자.’ 그 단어를 들을 때면 저는 제가 주식회사가 된 것만 같았죠. 투자금을 받고 실적을 올려서 배당금을 지급해야 하는 주식회사요. 엄마는 투자를 했으니 저는 그에 걸맞은 성과를 달성해야 했습니다. 마음 한 편에는 이게 옳은 것인가라는 의문이 늘 자리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엄마 말씀 중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간혹 그런 상상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만약 내가 실패한다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되는 거지? 지금보다 더 상황이 안 좋아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지금도 나의 성적에 따라 집안 분위기가 좌우되는데, 평생에 한 번뿐이라는 대학 진학에 실패했다간 우리 가족은 영영 불행해질 것이 틀림없었어요. 한 번도 실패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굳이 겪지 않아도 지옥이라는 것은 자명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 절대 실패해서는 안되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부모님이 만족할만한- 대학에 무사 착륙을 하게 되었고, 우리 가족은 전에 없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해를 잊지 못합니다. 다툼과 고성이 없고, 따뜻한 말과 웃음만 가득한 집. ‘이런 게 평화로운 삶이구나.’ 그때 저는 처음으로 집이 편안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요, 나는 너무 행복한데 자꾸 속에서 지난한 상처들이 올라오는 겁니다. 그때마다 엄마는 저를 책망했어요.


 “이미 다 지난 일을 왜 끄집어 내. 언제까지 그 얘길 하려고 그래. 내가 언제까지 너한테 사과를 해야 하니.”


 이제와 말해봤자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감정은 울컥울컥 솟아올랐습니다.




 사건, 감정, 시간, 상처 그 모든 것이 얽히어 하나의 유기체가 되었습니다. 미지의 괴물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모습을 드러냈어요. 그럴 때면 저는 속절없이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울고 나면 조금이나마 해소가 되었거든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괴물은 더 크고 강력하게 진화했습니다. 끝내는 매일을 울어도 사라지지 않았어요.


 ‘어떻게든 이 괴물을 없어야 한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심정으로, 저는 상담센터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엄마와의 이인삼각은 참으로 기묘했습니다. 어떨 때는 너무 따뜻해 평생 벗어나고 싶지 않았고, 어느 순간에는 너무 괴로워 다 포기하고 싶었어요. 나를 상처 주는 사람도,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모두 나의 엄마였기 때문에. 그런 그녀를 사랑하고 상처 주는 사람이 나였기 때문에. 나는 차마 그 끈을 끊어낼 수 없었습니다.




 혼자 달려도 충분히 잘 달릴 수 있는데, 왜 굳이 엄마와 함께 달려야 하는 걸까? 이 기묘한 달리기가 불편하고 이상하다는 걸 느끼면서도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나뿐만이 아니라 내 친구들 모두가 그렇게 달리고 있었으니까요.




 엄마는 왜 나와 함께 이인삼각을 달리려 했을까요? 당신께서는 평생 홀로 달리셨으면서 말이죠. 제가 묻자, 엄마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잘 몰랐어.”


 제가 받은 상처에 비하면 참 터무니없는 대답인데 말이죠, 저는 그 대답이 왜 위로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저는 엄마와 당시 이야기를 합니다. 엄마는 그때마다 말씀하세요.


 “내가 뭐에 쓰였지, 갑자기 왜 그랬나 몰라.”


 맞아요, 어쩌면 우리 모두 무언가에 씐 걸지도 모릅니다. 보장된 삶이라는 허깨비에게 말이죠. 그런 건 없다는 걸 알면서 자식 가는 길엔 자갈 하나 남겨두기 싫었던 엄마의 마음이, 이제는 조금 이해되려 합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어느 즈음에 존재하는 걸까요? 한 때는 엄마가 너무나도 미웠지만, 이제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도 지금도 저는 엄마를 사랑하지만, 이젠 미워한다기 보단 연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엄마도 힘들었겠구나,라고. 여전히 저는 엄마의 마음을 전부 헤아리지 못합니다. 부모가 되면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못 살게 굴기도 하더군요. 저와 엄마의 관계를 '가정불화' 등의 단어로 치부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그냥 최선이었다고 생각해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최선. 노력이 항상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건 아니잖아요. 그저 방향이 잘못된 노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그런 실수,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다들 서투니까.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사랑이라는 이유로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으며, 어디까지 용서해야 할까요? 아직도 저는 그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죽일 듯이 미워한다는 것은 그만큼 깊이 사랑했다는 증거이다.
결국 불안정한 애착에서 벗어나는 일은 나 자신과, 내가 사랑하는 이의 삶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어가는 일이다.
-오카다 다카시, 애착수업, 218쪽.


 오늘은 엄마와 저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사랑의 범위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제겐 너무나도 아픈 시간이었고, 저희 가족이 얽힌 일인 만큼 이 주제를 써야 하나 오랜 시간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글 앞에서 정직하고 싶다는 욕심에 결국 쓰게 되었네요.


  지금 이 순간에도 이걸 업로드하는 게 맞는 건지 많은 생각이 듭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전적인 저의 시선으로 상황에 대해 서술했습니다. 이 글이 전부가 아니라 '이런 일이 있었구나' 정도로만 생각해주셔요.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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