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서연은 늘 피곤했다. 아침에 눈을 떠도 머리가 맑지 않았고, 밤마다 잠은 얕고 자주 끊겼다. 겨우 든 잠에도 악몽과 가위에 시달렸다. 결국 내과를 찾았다.
“간수치, 혈액, 폐, 갑상선 모두 정상이네요.”
의사는 검사지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몸은 멀쩡합니다. 그런데 잠을 못 주무신다고요?”
“네. 컨디션이 너무 떨어져서… 아무것도 집중이 안 돼요.”
잠시 망설이던 의사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을 받아보시는 게 어떨까요? 요즘은 흔한 일이니까요.”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과… 결국 여기까지 와버렸구나.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은 가벼워졌다. 드디어 누군가 내 상태를 설명해줄지도 몰라.
며칠 뒤, 병원 건물 앞.
“1, 2, 3… 8층.”
엘리베이터 버튼 하나를 누르는 동작조차 무겁게 느껴졌다. 다행히 누군가 이미 불을 켜둔 덕에 가볍게 지나쳤다. 접수대에서 이름을 적으며 낯선 명단을 훑었다.
65년생 김미옥, 87년생 이시훈, 02년생 유정수… 58년생 양순자.
각각 어떤 사연으로 여기에 왔을까.
“정서연 님, 들어오세요.”
노크 후, 진료실 문을 열었다.
“어떤 게 불편해서 오셨어요?”
“잠을 잘 못 자고, 늘 피곤해요. 내과에서 이 병원을 추천해주셨어요.”
“못 주무신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일 년 정도요.”
“일 년이요? 일 년 내내?” 의사가 놀란 듯 되물었다.
“잠들기도 어렵고, 겨우 들어도 금방 깨요. 어떤 날은 이틀을 꼬박 새우기도 해요.”
“수면 장애가 맞네요. 신경안정제를 처방해드리겠습니다. 2주 뒤에 다시 오시고, 나가시기 전에 우울증 검사 꼭 하세요.”
작은 약 봉투를 쥔 순간, 서연은 피식 웃었다. 이렇게 간단한 거였어? 이제 잘 수 있는 걸까?
작은 알약은 잠을 데려오지 않았다.
하루 이틀은 곧잘 잠들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곧 다시 악몽처럼 뒤척임이 찾아왔다. 알람보다 먼저 눈이 떠지고, 회사에서는 눈꺼풀이 무거운데 머리는 흐릿했다.
2주 뒤, 서연은 다시 8층으로 올라섰다. 이번엔 대기 명단에 이름을 적는 손이 전보다 느렸다. 다른 사람들의 이름도 계속 이어졌다. 나만 못난 게 아니겠지.
“정서연 님, 들어오세요.”
의사가 차트를 확인하며 물었다.
“약은 어떠셨어요?”
“처음엔 괜찮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다시 원래대로예요. 오히려 더 피곤해요.”
의사는 펜을 들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혹시 우울감이나 불안 증상은 어떠세요?”
서연은 잠시 망설였다. 목구멍이 막히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난번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우울증이 맞아요. 불안 수치도 높고요. 신경안정제만 드셔서 낮에 더 무기력하셨을 거예요. 약을 몇 가지 더 추가해드릴게요.”
“…아, 네.”
“혹시 자살 시도나 기도를 하신 적이 있나요?”
“네. 근데…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요?”
의사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진 않아요. 누구나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은 할 수 있지만, 환자분처럼 실제로 시도하거나 매일 그 생각에 사로잡히진 않거든요.”
말문이 막혔다.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사는 건가… 다른 사람들은 어떤 행복을 붙들고 사는 걸까.
의사가 눈을 마주했다.
“혹시 어떤 일이 환자분을 힘들게 하나요? 그래야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입술은 굳게 닫혔지만, 눈물이 먼저 터져 나왔다. 엄마와의 의리를 지키려는 마지막 방어막이 무너졌다. 의사는 펜을 내려놓고 휴지 한 통을 건넸다.
“괜찮습니다. 편하게 말씀해보세요.”
서연은 눈물과 콧물을 닦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어릴 적 부모님은 이혼하셨고, 저랑 동생은 엄마와 셋이 살았어요. 그런데 친아빠가 엄마를 연대보증인으로 세워서 1억 3천의 빚을 떠안게 됐죠. 그래서 경제적으로도 힘든데… 제일 힘든 건 엄마예요.”
“엄마요?”
“네. 엄마가 알코올 중독자세요. 진단받은 건 아니지만 확실해요. 술만 마시면 다른 사람처럼 변해서 폭언을 퍼붓고, 다음 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굴어요. 그래서 일찍 독립했는데… 독립을 해도 엄마와 얽히지 않을 수가 없더라고요.”
의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독립하신 건 잘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환자분이 너무 아파요. 본인이 살고 싶으시다면… 엄마와 인연을 끊으셔야 합니다. 전화, 문자 모두 차단하세요.”
“…그게 될까요?”
“나으시려면, 반드시 하셔야 합니다.”
2주 전보다 훨씬 두툼해진 약봉투가 손에 쥐어졌다.
엄마랑 인연을 끊으라니… 늘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왜 지금 이 말 앞에서는 더 무거워질까.
서연의 눈가가 촉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