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연
베란다 바닥에 고인 빗물이 미세하게 일렁이고, 방 안에서는 제습기가 낮게 윙윙거린다. 눅눅한 공기가 천천히 번졌다. 우리는 저녁을 마치고 설거지를 나눴다. 그녀는 그릇을 씻으면서도 같은 접시를 두 번, 세 번 더 문질렀다. 거품은 이미 사라졌는데도 손놀림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 충분해.”
내가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들어 잠깐 멈칫하더니, 얇은 미소를 지어 올렸다.
“깨끗하면 좋잖아.”
그녀는 곧바로 행주를 집어 들었다. 식탁 표면을 닦고 또 닦았다. 물기는 이미 사라졌는데도, 손목은 같은 궤적을 반복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예민한 거겠지. 비가 오래 오니까 신경이 곤두선 거겠지.
그날 밤 그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 내일 카페 가자.
– 비 와도 괜찮아. 창가 자리 좋잖아.
다음 날, 우리는 창가에 앉았다. 유리창 너머로 빗방울이 일정한 리듬으로 흘렀다. 그녀는 메뉴판을 덮으며 말했다.
“라테 두 잔, 밤식빵 하나 포장해 가자.”
나는 고개를 들었다.
“포장을?”
“응. 아빠 드리게.”
그녀는 태연하게 대답하고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자리는 지켜. 비우면 누가 앉을지 모르잖아.”
계산대로 향한 그녀는 갑자기 휴대를 꺼내 들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흐른 뒤,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빠? 나야. 지금 집에 가는 길이야.”
잠깐의 정적.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작은 웃음을 지었다.
“응, 오늘은 내가 갈게.”
나는 유리 너머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스피커에서는 라디오 진행자의 나른한 목소리가 흘렀다. 아빠에게 전화? 불현듯 포차에서의 대화가 떠올랐다.
멀리 있다던 아빠. 올지도 모른다던 아빠.
그녀가 트레이를 들고 돌아와 잔을 내 앞에 놓았다.
“따뜻한 게 좋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잔을 두 손으로 감싸며 웃었다.
“오늘은 마음이 좀 편하네. 빗소리가 좋아서 그런가 봐.”
우리는 한동안 창밖만 바라봤다.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물은 미세한 실선처럼 내려앉았다. 그녀가 불쑥 입을 열었다.
“어제 밤식빵 얘기했잖아. 진짜 결혼식 날에 돌릴까?”
“하객이 많으면 어렵지 않을까.”
“많지 않을 거야.”
짧은 대답이 툭 떨어졌다. 나는 그 뒤를 이어가지 못했다.
잠시 후, 그녀가 포장 봉지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거 아빠 드릴 거야. 집에 잠깐 들렀다 가자.”
“지금?”
“응. 금방이면 돼.”
가는 길 내내 빗줄기는 굵어졌다. 골목길로 접어드는 순간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휴대를 꺼내 통화 목록을 내게 내밀었다. 최근 통화 기록 첫 줄에 낯선 번호가 찍혀 있었다. 이름은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봐, 아빠.”
“이게… 아빠 번호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번호가 자주 바뀌어. 그래서 저장 안 해.”
나는 화면을 오래 바라봤다. 통화 시간은 꽤 길게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일까.
우리는 낡은 빌라 앞에서 멈췄다. 계단 아래로 빗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녀는 봉지를 가슴에 꼭 끌어안은 채 한참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낮게 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그만하자.”
“들어가지 않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빠가 피곤하시대.”
“방금… 또 통화했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살짝 흔들렸지만, 이내 계단 쪽으로 돌아갔다.
“다음에 오자.”
집으로 돌아오자 그녀는 봉지를 싱크대 위에 올려두고, 아무 말 없이 손을 씻었다. 수도꼭지에서 흘러내린 물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수건으로 손을 닦은 그녀가 내 쪽을 향해 미소 지었다.
“내일 드리면 돼.”
“내일?”
“응. 그땐 덜 피곤하시겠지.”
그녀는 거실로 가더니 다시 행주를 집어 들었다. 이미 닦인 테이블을 또 닦았다. 손목은 같은 각도를 반복했다.
“이제 그만해. 충분히 깨끗해.”
그녀가 멈추더니 낮게 말했다.
“깨끗해야 해.”
“왜?”
“그래야 냄새가 안 나.”
“무슨 냄새?”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짧은 순간, 미소가 빠졌다가 다시 올라왔다.
“아무것도 아니야.”
밤이 깊어졌다. 제습기 소리와 함께 욕실 환풍기가 간헐적으로 켜졌다 꺼졌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휴대를 들여다보다가 화면을 껐다 켰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입술을 가까이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아빠, 오늘은 못 가.”
나는 몸을 굳혔다.
“지금 누구랑…”
그녀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습관처럼 말이 나온 거야.”
새벽, 빗소리에 눈을 떴다. 부엌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조심스레 거실로 나갔다. 그녀가 봉지를 열어 밤식빵을 접시에 옮기고 있었다. 작은 조각들을 가지런히 놓으며 속삭였다.
“아빠, 따뜻할 때 드셔야지.”
나는 한 발짝 다가가려다 멈췄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환하게 웃었다.
“자기도 먹을래? 방금 데웠어.”
접시 위에는 밤 알갱이가 박힌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녀의 손끝에는 부스러기가 붙어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억지로 빵을 집어 들었다.
“아까는 내일 드린다며.”
“응. 그래서 이렇게 놔두려는 거야.”
“무슨 소리야?”
“아빠가 오시면 드시라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제습기 바람이 바닥을 스쳤다. 믿어야 해. 믿지 않으면, 우리가 무너진다. 내 안에서 목소리가 속삭였다. 나는 조용히 빵을 삼켰다.
그녀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잠시 나를 똑바로 바라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이상하지? 비 오는 날에 빵 얘기만 하네.”
“조금.”
“괜찮아. 곧 맑아질 거야.”
그녀는 접시를 내 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빠가 그러셨어.”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맑았다. 너무 맑아서, 그 안이 비어 있는지 가득 차 있는지 분간되지 않았다. 창밖에서는 장마가 여전히 유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빵을 삼켰다. 목 안에 밤 하나가 오래 남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