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그림자가 또렷해질수록, 마음속 어둑한 부분도 더 선명해졌다.
긴 장마가 끝난 듯, 창밖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햇살은 바닥에 길게 드리워졌고, 열린 창으로 들어온 바람이 커튼을 가볍게 흔들었다.
공기는 상쾌했지만, 집 안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작은 수첩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검은 볼펜이 종이를 긋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했다.
“뭐 적는 거야?” 내가 물었다.
그녀는 흠칫 놀라더니 수첩을 덮었다.
“그냥 메모.”
“무슨 메모?”
“해야 할 일들. 잊으면 안 되거든.”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더 묻지 않고 창문을 닫았다. 햇살은 뜨거웠지만, 묘하게 서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부엌으로 가보니 그녀가 컵에 차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컵을 세 번 돌린 뒤 물을 부었다가 다시 따라내고, 또 채우고. 같은 동작이 반복됐다.
“왜 그렇게 해?”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이렇게 해야 마음이 편해.”
잔을 내 앞에 건네주었지만,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차를 입에 대지도 못한 채 내려놓았다.
오후, 우리는 동네 골목을 걸었다. 맑은 하늘 아래 사람들이 웃으며 오가고,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풍경은 평화로웠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말했다.
“우리 오늘 아구찜 먹을까? 갑자기 그게 당기네.”
나는 피식 웃었다.
“아구찜? 뜬금없네.”
그녀는 내 눈을 반짝이며 바라봤다.
“아구찜에 소주 한잔 하면 진짜 맛있겠다, 그치?”
“그럼 아주 맵게 해달라 해서 먹자!”
“좋지! 매운 거 먹고 땀 빼면 기분 확 풀리잖아.”
우리는 별것 아닌 메뉴 얘기로 한동안 웃었다. 그 순간만큼은 햇살처럼 가볍고, 아무 의심도 들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피아노 앞에 앉았다. 손가락으로 몇 개 건반을 눌러 소리를 확인하더니, 곧 낮은 목소리로 흥얼거렸다. 처음 듣는 곡이었다. 자장가 같았다.
“그거 뭐야?” 내가 물었다.
그녀는 허공을 바라본 채 대답했다.
“엄마가 부르던 거야. 아마도.”
그녀의 시선은 건반 위에도, 나에게도 닿지 않았다. 나는 입술이 말라 붙은 듯 말문이 막혔다.
잠시 후 그녀는 건반 덮개를 닫고, 내 쪽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저녁은 뭐 먹을까?”
나는 대답 대신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여전히 눈부시게 맑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내가 사랑한 여자의 세계는, 내가 아는 현실과는 다른 곳에 놓여 있다는 걸 처음으로 확실히 느꼈다.
병원에 그녀를 두고 돌아온 날들, 시간은 잔인할 만큼 빠르게 흘러갔다. 장마 뒤의 무더위는 잠시 세상을 지배했지만, 내가 느끼기엔 여름은 유난히 짧았다. 햇빛은 여전히 따가운데도, 바람 끝은 이미 계절을 바꾸고 있었다.
매미 소리가 잦아들자, 대신 귀뚜라미 소리가 밤을 채웠다. 뜨겁게 달궈지던 벽돌길은 바람에 서서히 식어갔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 바람을 초가을이라 불렀다. 계절이 바뀌어서라기보다, 내 마음이 그렇게 느낀 것이다.
나는 병원 복도를 몇 번이고 오갔지만, 결국 더는 그녀 곁에 머물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웃을 때조차, 그 웃음은 내가 사랑한 사람이 아니었다.
마지막 날, 나는 병실 앞에서 잠시 서 있었다. 그녀는 창밖을 향해 앉아 있었다. 고개를 기울이고 무언가를 흥얼거렸지만, 그 소리는 내게 닿지 않았다.
언젠가 그녀가 물었던 물음이 떠올린다.
‘우리는 무슨 이유로 헤어지게 될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른 이별이라고 더 슬픈 것도, 늦은 이별이라 해서 덜 슬픈 것도 아니다.
이별은 이별 그 자체가 되는 대상이 중요한 것이다.
“맞아. 이별의 시기는 중요하지 않아. 이별의 대상이 중요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