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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e in wonderland Sep 02. 2019

Play와 Stop 사이, Pause  

퇴사의 이유

  저는 지금 포르투갈의 작은 도시 포르투의 아름다운 한 카페에 앉아있어요. 어떻게 글을 시작하면 좋을까 눈을 감고 십분정도 명상을 하고 난 후죠. 기억과 감정이 사그라들기전에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이 시점들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7월 말, 3년 3개월을 근무했던 제 꿈의 회사였던 마케팅 사관학교 P&G에서 마지막 날을 보내고 저는 여행을 시작했어요. 아니다. 여행이라기보다는 음, 계획하지 않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홍콩과 한국, 모로코를 거쳐 지금은 포르투에 있지만, 그 다음으로 어디로 갈지 아직 모르거든요. 어떤 장소가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거기에서 오래 머물것이고, 싫다면 일찍 떠나는 것. 그렇게 지내고 있어요.


7월 말, 회사를 그만둘무렵, 제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사업도, next rocket에 early employee로 올라 타는 것도, 열정을 찾는것도, 세계여행도, 부자남편과 결혼해서 가정주부가 되는 것도 (제가 이거 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거든요) 아니었어요.


사실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그저 할일이 정해지지 않은 나날들을 살아보고 싶었어요. 이 계획과 넥스트 스텝으로 가득했던 삶에서 한번이라도 미래의 불확실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현재의 순간들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그런 나날들을 살고싶다. 이걸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존나 일하기 싫다. 그러니까 안하겠다.'로 할 수도 있겠네요. 시팔, 이렇게 편하게 말하면 될걸. 그래요. 저는 일을 안하고 그냥 꼴리는대로 한번 살아보고 싶었어요. 왜 지금하고 있는 것을 멈추기 위해 꼭 다음에 해야할 게 있어야하죠?


와, 진짜 이거를 인정하고 그리고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정말 너무 오래 걸리고 힘들었어요. 내가 원하는 건 그냥 일을 안하는 것이라는 걸 인정하고 그렇게 행동으로 옮기기에 제가 있는 환경은 나름 쉽지 않은 환경이었어요.


1. 저는 외국인 노동자잖아요. 회사를 그만두면 바로 working visa가 상실되요. 내가 일을 하지 않으면 지난 8년간 나의 터전으로 살아온 이 나라에 있을 자격이 상실되는거에요. 물론 여행자 비자로 3개월은 있을 수 있을거고, 다른 직업을 구할수도 있을거에요. 그렇지만 일단은 제가 일을 한다는 것은 이 나라에 있을 수 있는 자격조건이었어요. 조국에서 일했다면, 일을 그만둔다고해서 바로 쫓겨나지는 않겠죠. 이것때문에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일은 단순한 노동 이상의 의미를 가져요. 이 곳은 내가 태어나서 자란 나라보다 더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곳이고, 많은 친구들이 여기있죠. 그리고 그런 저의 행복한 일상을 보장해주는건 비자니까요.


2. 제가 다니는 회사와 저의 주변은 소위 말하는 high flyer 혹은 high performer들로 가득차 있어요. 일단 회사만 봐도, 여기에 있는 동료들은 다들 각자 자기 나라에서 top of the top 대학을 졸업하고 거기에 열심히 일하는 자세까지 갖춘사람들이었죠. 심지어 그 중 몇명은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이라 싱가폴 정부에서 장학금을 주고 데려와서 싱가포르 대학에서 공부를 시킨 각국의 인재들이었어요. 똑똑하고 열심히 일하는, 쉬지않고 달리는 동료들은 현 회사의 대우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장기 근속한 사람들이 많았고, 행여 다른 회사로 간다고 대부분 더 좋은 대우를 받고, 승진하면서 가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 밖에 페이스북만 켜도, 어쩜 그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로 가득한지. 다들 새로운 마케팅 트랜드에 대해서 공유하고, 자기 사업에 대해서 얘기하고 그런 사람들의 포스트가 피드를 채우죠.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제가 아주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주변의 그럴진데, 거기서 내 삶에  'pause'를 누르기 정말 어려웠어요.


3. 그 와중에 회사는 '객관적으로' 너무 좋은 회사였죠. 많은 CEO를 배출해 낸 인재 사관학교로 이름있는 회사이고, 동료들은 모두 보고 배울 점이 많은 훌륭한 친구들에, 스마트한 리더들이 많았어요. 매주 주말 같이 클럽을 갈만큼 정말 친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회사에 대해 '이 회사는 프로세스가 없다'라고 불만을 하는데, 피앤지는 프로세스 끝판왕이었죠. 100년이 넘게 한 자리의 왕좌로서 다듬어 온 프로세스가 있었기에 그 프로세스를 완벽에 가깝게 만족시키기 위해 일이 겁나게 많았을 지 언정, 우왕좌왕할 일은 거의 없었어요. 게다가 오죽하면 제가 친구에게 "월급 또 올랐어. 시발"이라고 말했을정도로 돈도 잘 줬어요. 다른 회사들 몇번 인터뷰를 봤고 합격을 했지만, 현재 받고 있는 것을 맞춰주는 회사도 없었죠. 저는 최고의 직원은 아니지만, 특정 부분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인다고 나름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어요. 여러가지 이유로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지만 뿌듯하고 재밌을 때도 있었구요.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미쳐서 '내 사업을 하겠다! 난 세상을 바꾸기 위한 열정으로 가득차서 이거 아니면 안된다' 아니면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좋은 오퍼를 받았다. 이 로켓에 난 올라타야한다'가 아니면 퇴사를 하는 것은 바보짓이었어요. 그리고 이런 대안적 옵션을 선택하려고 사업도 준비해보고, 로켓들을 알아보기도 했죠.


오랫동안 많은 감정과 생각들이 섞여있었어요. 그리고 객관적으로 불만할게 없는 상황과 제가 느끼는 어쩔수 없는 불행함 속에서 많은 고민을 했어요. 객관적인 상황을 떠나 가장 크게 느꼈던 두가지 감정은 feeling torn & lost였어요.


Feeling torn: 마음이 한 갈래로 합쳐지지 않은 느낌 아세요? 내가 하는 일에 온전히 마음을 담아 할때 느끼는 희열이 있어요.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하는 일이 일치할 때. 마치 나아가야할 방향이 명확한 직선도로에서 엑셀을 밟고 쭈욱 가는 느낌을 전 알아요. 그런데 이 feeling torn한건,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은 왼쪽인 것 같은데, 오른쪽으로 무거운걸 지고 열심히 가야하는 것 같은거에요. 불편하고 혼란스럽고 무엇보다, 마음을 온전히 담지 못하는 것은 정말 지치고 그 과정에서 나를 잃는 느낌이 계속 들어요.


Feeling lost: 저는 제가 많은 걸 이뤘다고 생각했고,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뭘 해야할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몹쓸 불행의 한복판에 서서 삶에서 갈 길을 잃은 느낌을 계속 느끼죠.


무언가를 탓하고 싶은데 아무리 봐도 탓할건 약혼자와 회사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저는 4년을 만났던 약혼자와 헤어졌고, 그로부터 10개월 후 퇴사까지 하게 된거에요. 한국 나이로는 32, 한국 밖의 나이셈법으로는 30세의 그랜드 오프닝을 그렇게 열었죠.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해?'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물었던 질문 중 하나에요. 늘 그렇듯, 마음을 따라 가는 것은 너무나 힘든 길이에요. 제 마음은 10년에 한번 주기로 이렇게 따라가기 힘든 것을 원해서 저를 시련에 빠뜨려야 속이 시원할까요.


보수적인 사람들은 말해요.

"다들 그렇게 사는거야. 그게 사는거야. 100% 너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고, 100% 너 마음에 드는 직업도 없어. 그냥 다들 그렇게 타협하고 사는거야. 다 너 마음에 들게 살 수 없어."


다행인건, 제 주변에 저에게 저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아주아주 소수였어요. 제가 고민했던 지난 몇년간 친구들도, 동료들도, 회사의 보스들도, 모두 각기 다른 언어로 지금 니가 원하는 것을 하고, 그것이 'take some time off'라면, 충분히 시간을 가지라구요.  


Pause를 한다는게 도대체 인생에 어떤 도움이되고,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겠지만, 제 마음은 그걸 원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제 마음은 제 머리보다 더 현명해요. 아직 머리로 완전히 정리가 안되었지만, 마음이 부르고 있었고, 지금 이것이 아니라는 걸 '불행'이란 형태로 사인을 주고 있었어요. 뭔지 모르지만 따라가야 했어요. 이게 좋지 않은 결정이어도, 멍청한 실수라도, 그것조차 제 삶인거죠.




퇴사한지 한달이 된 지금, 아니 퇴사하고 하루하루를 저는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요. 갈래 갈래 나뉘어져 있던 마음은 다시 하나가 되었어요. 남자친구가 없었던 시간을 손에 꼽고, 혼자 여행을 가서도 꼭 친구들을 만들어서 같이 다녀야만 마음이 편할만큼 혼자에 익숙하지 않던 제가 온전히 혼자인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퇴사 마지막날까지도 저는 불안했어요. 이렇게 계획없이 그만둬도 될까. 내가 회사를 안가서 취준생때처럼 초조해지면 어떡하지?


초조는 개뿔. 저는 존나게 행복해요.


제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들은 마일스톤이 늘 있어왔어요. 학생 때 크게 입학과 졸업이 정해지면 그 사이를 자잘한 시험들이 채우죠. 그러면 시험기간 한달 전부터 준비를 시작하고, 일주일간 시험을 빡쎄게 보고, 시험이 끝나고 3일은 맘껏 놀며 만화책을 봐요. 그 후 일상적인 공부를 하고 다음 시험기간을 준비해요. 수능과 졸업을 기다리면서, 그걸 6년을 했죠.


졸업을 하고 났더니 취업이라는 관문이 있었고, 저는 이때 제 마음을 따른 첫번째 모험을 강행했죠. 그 모험은 성공을 했고 많은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어요. 그리고 제가 지금까지 했던 일 중 가장 재밌고 많이 배웠던 회사에 조인을 했죠. 그런데 이 회사에서는 회사의 계획이 제 시간을 지배했어요. 회사는 투자자들에게 전체적인 목표를 약속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타겟이 지역별로, 제품별로 나눠서 내려오죠. 그러면 그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작은 계획들을 짜요. 그 과정에서 세 제품을 런칭하는게 필요하면 새 제품 런칭까지 타임라인을 짜게 되는데 제조업이란 모든 변수에 비용이 들어가기때문에 완벽한 플랜을 짜야해요. 컨셉은 언제까지 lock할건지, 패키지 디자인은 제품의 어떤 특장점을 어떻게 커뮤니케이션 할건지, 제품 생산은 언제 시작되고 언제 리테일러의 창고에 배송될건지를 1년 사이클로 세우고나면, 제 캘린더는 그 1년의 마일스톤을 무리없이 달성하기 위한 계획들로 채워지죠. 일주일에 한시간은 호주팀과 한시간은 필리핀팀과, 나머지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하나로 묶어서 팀 회의를 하고, 보스와 1:1 매주 한시간을 하는데, 보스의 소중한 한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위해 매 1:1 아젠다도 고민해서 들고가야하죠, 그리고 언제부터 언제는 내가 반드시 자리에 안장서 몰입해서 일을 할건지 채워놓고 나면 업무 캘린더가 완성되요. 심지어 휴가조차도 1년 플랜안에 껴 있어요. 국경일을 끼고, 친구 누구가 어느나라에서 결혼을 하면 거기 가야하고, 너무 자주 휴가가면 눈치보이니까 이때쯤에는 가지말고, 이때는 장기휴가를 가고, 그리고 소중한 휴가니 계획을 잘 세워서 최대한 많이 보고 와야지. 그래서 계획을 더 잘 세울수록 삶을 잘 관리하면서 최대의 효용을 누리며 산다고 생각하게 되요.


전 그 모든 계획을 멈췄어요. 여행을 떠난 것은, 일상에서 떠나기 위함이에요. 모두가 달리고 있는 그 트랙을 떠나야 온전히 쉴 수 있잖아요. 오래된 유럽의 건물과 성당을 보러온게 아니에요. 미술관의 아름다운 작품도 좋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온전하게 현재에 내가 존재함을 느끼는 거에요.  


산다는 것은 어딘가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에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도달해야할 곳은 죽음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모든 것은 변하죠. 완벽한 직업도, 완벽한 파트너도 그 순간의 진실인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는 현재 이 순간만을 살고 있다는 거에요. 과거는 지났고, 미래는 영원히 오지 않으니까요. 감각에 집중해서 현재 이 순간에 더 온전히 머무르는 것. 그렇게 저는 지금 살고 있어요. 마음은 다시 하나가 되어 평안하고, 온전한 행복과 감사의 마음을 자주 느끼고 있어요.


우주의 먼지같은 존재지만 '나'의 인생이기 때문에 별거 아닌 퇴사따위 가지고 말이 많았네요 :)

이제 마음이 온전해서 글을 쓸수 있게 되었어요. 글은 마치 제 마음의 거울같아서 지난 몇년 글쓰기가 힘들었거든요. 자주 소식을 전할게요! 모두가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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