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간 침묵 명상을 하면서 하루에 일어나는 일과 배움이 너무 많기 때문에 원래는 하루 당 하나의 글을 쓰려고 했었어요. 그러나 쓰는 저조차도 호흡이 너무 느려짐을 발견했고, 이렇게 일주일에 하나씩 쓰다가는 이번 년도 말이 되도 다 못끝낼것 같아서 이번편을 써머리로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3일째, 4일째도 여전히 저는 이 명상을 왜 하고 있는지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었어요.
3일의 메인은 코를 중심으로 코 주변에 있는 인중이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알아채는 거였어요. 잘 집중하면 들숨은 좀 차갑고, 날숨은 좀 따뜻하니 그런 온도차이를 인지하고, 왜 괜히 아무것도 없는데 집중하면 간지러운 그런느낌 있잖아요? 그런 간지러움도 알아채고, 근데 그걸 알아채기만 하지 그걸로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관찰만 하래요. 왜냐면 그런 감각들은 자연스레 일어났다가 우리가 관심을 주지 않으면 자연스레 사라지니까. 그냥 그 감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만 관찰하래요.
3일째의 제 개인적 하이라이트는 아빠와 크레파스였어요. 진짜 어디서 생각난지 모르는 그 노래가 계속 머릿속에 울려퍼지며 전 하루종일 다정하신 아버지가 사온 크레파스로 미친듯이 뛰어노는 아기코끼리와 나뭇잎을 타고 노는 장난감 병정들 멜로디에 시달렸어요. 그러다가 너무 몸이 찌뿌둥해서 런지와 스쿼트를 하다가 경고도 먹었죠. 요가 포함 그 어떤 운동도 금지거든요. 정말 아무것도 못하게 하더군요. 그래서 매 쉬는시간에 전 거의 죽어있었어요. 저는 항상 바쁘게 이것저것 하면서 시간을 채우는데 익숙해 있는 사람이라 갑자기 아무것도 못하게 하니 너무 기운이 없는거에요.
'지금 내가 여기서 아무것도 안하고 시간을 죽이는 이 순간에도 바깥 세상에서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까, 내 친구들은 얼마나 새로운 걸 배우고 창조하고 있을까, 하다못해 그러면 옆사람이랑 말은 안할테니 기록은 하게 해주지. 그러면 이 순간에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이 모든 생각들을 캡쳐라도 할텐데. 나에게서 대화를 뺏어가고, 글쓰기도 뺏어가면 내게 남는게 뭐야...what am I?'
이 사진은 10일간의 여정이 끝나고 핸드폰을 돌려받았을 때 제 3 - 4일째 상황을 재현하여 찍은거에요. 설정샷. 그런데 실제로 거의 이렇게 죽어있었어요.
4일째부터가 드디어 본격적인 비파사나 명상의 시작이었어요. 본격 시작이라 함은, 이제부터는 인중이라는 작은 영역에 집중했서 알아처렸던 센세이션을 (감각 - 가렵거나, 온도차이가 나거나, 얼얼하거나, 마비된것 같다거나 하는 모든 감각이요) 몸 전체를 스캐닝해서 살펴보면서 느끼는 거에요.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부분부분을 잘게 나누어 훑어 내려가면서, 일어나는 센세이션을 느끼고 관찰하고 넘어가는거에요. 예를 들면 머리 꼭대기를 느끼기 위해 거기에 집중을 하고 있으면, 살짝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면 조금 더 내려가서 이마로, 이마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느껴보고, 얼얼하면 다음 감각, 왼쪽볼, 오른쪽볼, 그리고 턱, 그리고 뒤통수, 목, 어깨 이런식으로 내려가는데 아주아주 지루하고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에요. 그리고 밖에서는 정적이어 보이지만 안으로는 많은 집중력을 요하는 적극적인 활동이에요. '머리를 비워' 이런식이 아니에요. 적극적으로 몸에 일어나는 모든 감각들을 캐치하고 거기에 예민해지는 과정인거에요.
그리고 이날부터 저는 비파사나 명상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비파사나는 많고 많은 명상 테크닉중의 하나일 뿐이에요. 어떤 테크닉은 만트라라고 하는 단어들 - 옴(Om)이라든가, 신의 이름이라든가를 계속 읊조리면서 무아의 경지로 가는 것도 있고, 어떤 테크닉은 비주얼을 이용해서 어떤 형태를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들도 있죠. 그런 테크닉은 고타마 붓다 이전에도 있었고, 그 이후에도 계속 있어왔어요. 그런데 고타마 붓다는 비파사나를 택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명상을 전수했어요. (부처는 깨달은 모든 이들을 일컫는 말이고, 우리가 아는 '그 (the)' 부처는 고타마 싯타르타라고 해요.) 싯타르타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었어요.
왕자의 삶을 살면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져도, 왜 모든 사람들에게 삶은 고통인가 (아무리 부자라도, 제 아무리 왕일지라도 생노병사를 거치면서 삶에서 고통과 두려움은 피할 수 없으니까요)에 대한 답을 찾기위해 출가를 한 싯타르타는 깨달음을 얻기전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요. 그리고 그는 거기서 깨달음을 얻습니다.
거스를 수 없는 우주의 원리, 모든 것은 변합니다.
내가 한번 몸을 담궜던 이 강은, 10초 후에는 다른 강물이죠.
눈 앞에 계속 같은 빛을 보내고 있는 것 같은 이 촛불을 자세히 보면 끊임없이 연기가 증발하고 있구요.
일정한 빛을 계속 보내고 있는 것 같은 이 전구도 매 순간이 다른 빛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매달 전기세를 내겠어요?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 분자, 원자 레벨로 오면 모든 것이 계속해서 변하고 있어요. 우리 몸도 그러하구요. 매순간 우리는 새로운 '나'인거에요.
그렇지만 인간은 시각같은 감각의 동물이라,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우리 안의 모든 것이 매순간 변해가고 있는 것을 숫자나 프로그래밍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같은 존재라고 인식하죠.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니요... 오, 세상에 안변하는 것은 없어요. 내가 변하고, 너도 변하는데, 어떻게 사랑이 그자리에 머물 수 있나요? 일단 모든 것은 매 순간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합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동적으로 변하고 있는데, 우리는 어리석게도 모든것이 연속선 상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리석게도 정적인 집착을 형성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우리에게 긍정적인 감각을 주는 것(A라고 부를게요) 에 대한 열망과 원함 (craving)을 만들어 거기에 집착하거나, 우리가 싫어하는, 부정적인 감각을 주는 것(B라고 부를게요) 에 대한 배척 (aversion)을 하게 되요. 물론 싯다르타 전에도 이런 집착이 불행을 낳는다는 컨셉은 널리 알려져 있었대요. 그런데 고타마 싯다르타가 가져온 한단계 더 깊은 인사이트는 우리가 중독되는 것은 A와 B가 아니고, 그 열망과 원함이 있을때 우리 몸에 일어나는 감각, 배척을 할때 우리몸에 일어나는 감각이란 거였어요. 예컨데, 돈을 원하고 돈이 채워지면, 우리는 명예든 자식이든, 관계든 다른 것을 통해 또 원함을 만들어 내는거에요. 왜냐면 우리가 중독된건 돈 그 자체가 아니고 뭔가를 추구하는 그 감각이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끊임없이 무언가를 추구하고 배척하면서 불행해지는 이 병신같은 사이클을 깨기 위해 필요한건, 머리로 계속 '집착하면 불행해져'라고 마인드 컨트롤의 레벨에서 본인에게 타이르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이 감각의 생성과 소멸을 살펴보며 이게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신체 감각의 레벨에서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잘생긴 남자를 보면 좋은것은 머리에서 '아 저놈 잘생겼네'해서 좋아지는게 아니잖아요. 심장도 좀 빠르게 뛰고, 허파도 좀 간질간질하고, 숨도 좀 가빠지고 이런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의 레벨에서 욕망과 분노, 이런 어리석은 우리의 마음의 평화를 뒤흔드는 것들을 캐치해 내야하는거에요.
마음의 마스터가 되기 위해 몸의 감각의 레벨에서 그것을 지켜보며, 매 순간 일어나는 상황에 거의 반사적으로 반응을 하는 마음의 습관을 없애는 적극적인 훈련이 명상이었어요. 그리고 이 기분 좋은 감각도, 기분 나쁜 감각도 일시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니 거기에 집착하고 그걸 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것.
'This shall pass (이또한 지나가리라)'
이것이 제가 얻은 비파사나의 핵심 메시지에요. 불안과 기대, 소망으로 김칫국을 사발로 드링킹하는 제 마음에 기쁜일은 온전히 기쁨으로 즐기되 그것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집착으로 불행을 자초하지 않고, 슬프고 힘든일은 인지하고 견디되 이또한 지나가리라는 것을 아는 것, 그걸 통해서 마음의 equanimity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매일 훈련하는 것이 명상을 하는 이유였어요.
이런 엄청난 깨달음을 머리로 알고 난 후에도 제 고통은 계속 됩니다. 5일부터는 대단한 형벌(?)이 추가되는데, 하루에 스페셜 타임 한시간씩 세시간 동안은 단 한치의 움직임도 허용되지 않는 훈련이 추가 됩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가려우면 긁을 수 있었고, 다리가 너무 저리면 엉덩이를 들썩이며 자세를 바꿀 수도 있었는데, 앞으로 적어도 하루 세시간은 손가락 하나 꿈쩍 할 수 없는 상태로 있어야 하는거에요.
그리고 여기에 운명은 저에게 또 대단한 시련하나를 줬는데, 제 뒤에 앉아있는 여자가 진짜 세상 당당한 트름을 하기 시작한거에요. 트름은 생리현상이라 이해할 수 있는데, 모두가 이렇게 감각 하나라도 더 캐치하려고 집중을 하고 있는 조용한 방에서 속트름으로 숨기려는 노력은 전혀 보이지 않은채, 세상 당당하게 일말의 고려도 없이 내질르는 트름을 빈번하게 하기 시작한거죠.
이날 저는 살면서 제가 이렇게 화가 날 수 있다는 것을 오랜만에 알게 되었어요. 내가 지금 열반행 급행열차를 타야하는데 하루에 10번씩 트름을 질러대는 너땜에 아무것도 안느껴져서 못타면 어쩔거야? 트름 좀 크게 했다고 머리채 붙잡고 싶어지는 잔인한 저를 발견한거죠.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7일째, 저는 드디어 어딘가에 도달합니다.
몸의 부분부분에 집중하던 것을 이제는 flow로, 하나의 흐름으로 느껴보기 시작한 후였어요. 제감각은 손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났는데, 양 손을 둘러싸고 마치 자기장이 여러겹으로 생겨서 에너지로 된 장갑을 끼고 있는 느낌이 드는데, 거기에 집중하면 그걸 손에서 팔로, 팔에서 어깨로 그리고 점차 몸 전체를 감싸게 확장시킬 수가 있었어요. 그렇게 몸의 감각이 에너지의 두꺼운 장으로 감싸지고 나니까, 몸에 붙어있던 정신이 퓽 - 몸으로부터 분리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물론 누가 살짝이라도 건들이면 금방 깨져버릴 상태였겠지만, 두시간 가까이, 쉬는 시간을 건너뛰고 움직이지 않아도 될만큼 몸은 에너지 자기장 안에서 안정된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몸의 감각에서 분리된 정신은 그 나름의 클리어한 상태에 빠져들었어요. 마음안의 소음, 잡음 그리고 몸은 잠을 재우고, 마치 정신만 따로 아주 또렷한 상태에서 깨어난 것과 같은 상태가 지속된거에요. 이 상태만 지속된다면 얼마든지라도 계속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을 것 같았죠. 그건 제가 경험해본 그 어떤 감각과도 다른 독특한 상태였어요. 일반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감각이 절대 아니었죠. 아주 독한 감기약을 먹으면 몸이 붕 뜨는 것처럼 명상은 실제로 물리적인 차원에서 몸에 특별한 감각을 주는 적극적인 행위였던거에요.
매번 궁극의 평화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에 한 두번은 갈 수 있게 되자 저는 8일째 궁금한게 생겼어요. 마음의 평정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매우 좋다는 건 알겠어요. 세상에는 좋은 일도 많지만, 그만큼 나쁘고 힘들고 고통을 줄 일도 많으니 그 모든 고통을 줄 매사를 컨트롤 할 수 없으니, 내 마음을 잘 컨트롤했을 때 (나의) 세상이 바뀐다는 것도요. 그렇지만, 이 평화를 유지하는 이 마음이 당장 제 앞에 놓인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가'에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거죠?
그래서 하루에 10분 선생님께 1:1로 질문할 수 있는 시간에 명상 선생님에게 질문을 했어요.
"선생님, 저는 다니던 회사에서 행복하지 않아서 다음 회사를 정하지 않은 채 회사를 그만뒀어요. 고맙게도 여러 회사들에서 좋은 기회들을 주어서 그 중에서 혹은 그 밖에서라도 결정을 해야해요. 명상을 통해서 저는 계속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 훈련만 하는데, 이게 제가 더 나은 선택을 하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죠? 혹시 삶에서 중요한 선택을 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원칙 (guiding principle)이라도 있나요?"
저는 그 질문을 하기 전까지, 나름대로 선택을 할때는 항상 다른 사람의 평화를 염두에 둔 선한 선택을 해야하지 않나, 세상을 이롭게 해야하는 선택을 해야하지 않나 하는 다양한 선택 기준들을 생각해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의 답은 뜻밖이지만 현답이었어요.
"좋은 질문이에요. 우리는 삶에서 많은 선택을 해야하죠. 그리고 그 선택들에 대한 가장 올바른 답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고, 그 결정은 자기 자신만이 내릴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가라앉히는 명상이 중요한거에요. 우리가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혼탁하기 때문이에요. 이게 날 기분좋게 해주기 때문에 이걸 하고싶어하고, 저건 날 기분 나쁘게 하기 때문에 저걸 배척하고, 마음과 기분에 휘둘리는 상태는 좋은 결정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죠. 결정을 내리기전에 잠깐이라도 명상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감각에 휘둘리지 않은 채로 평정심을 유지한 후에 그 문제를 다시 바라봐요. 내 마음이 평정심을 찾은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어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침묵 명상에 숨겨진 의도 중 큰 부분이 다른 사람과 비교를 통해 오는 불행을 금지하기 위해서라는 의도도 있단 걸 알게 되었어요.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문제는 다 다르기 때문에 그들이 명상을 통해 진척되는 속도도, 느끼게 되는 감각도 다른데 서로 자기의 감각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헐. 쟨 저런 대단한걸 경험한단말야? 그럼 나는?'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란 거에요. 어떤 감각을 느끼는지는 전혀 중요한게 아닌데 말이죠.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떤 감각이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그 비지속성과 의미없음을 깨닫는게 비파사나 명상의 핵심이니까요. 모든 문제는 개인의 문제고, 거기에 올바른 답은 없어요. 다만 좋은 상태에서 내린 답과 좋지 않은 상태에서 내린 나의 답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오래 앉아 있는 것이 익숙해질 무렵, 드디어 마지막 날 11일이 다가왔어요. 이 날이 왔다는게 아직 믿기지 않았죠. 이 평정심을 어떻게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지 기대가 되었어요. 고작 10일 갇혀있었다고 대단히 출소자가 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첫번째 테스트 기회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핸드폰을 받았을 때 왔어요. 제일 먼저 체크한 건 홍콩에서 태풍속에 집으로 간 우리 가족들이 무사히 한국에 도착했는지였어요. 다행히 가족들은 무사했고, 그 다음으로 체크한 건 최후통첩지랄 ('너 이거 안해주면 우리 끝이야')을 하고 어설프게 화해할까 말까하며 온 썸남으로부터의 연락이었죠. 저는 아주 대단히 실망했어요. 왜냐? 가장 기대하던 썸남에게 연락이 안왔기때문!!! 어쩜 너는 그럴 수 있지? 그때 명상 레슨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어요. 제 감각들을 캄 더 퍽 다운 시키고, 차분히 상황을 바라본거죠. 일단 저는 지난 10일간 걔가 한번은 연락할거라고 기대를 했기 때문에, 그 기대와 원함 때문에 지금 고통을 받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단계를 하나 더 나아가면, 그는 제 기준에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리석게 저는 원함과 밀어냄을 반복했어요. 좋으면 좋은거고 싫으면 싫은거지 그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널뛰기 과정에서 저는 너무 좋다고 난리를 치다가, 우리 이제 그만하자고 지랄을 했다가 왔다갔다 하다가 회사 때려치고 나라를 떠나 여기 와놓고 걔가 인생을 되돌아 본 후 나를 그리워하며 메시지를 보내놨으리라고 기대했다니 이건 그냥 madness죠. 이 상황을 차분히 바라보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게 되니, 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었고 전 자연스럽게 실망이라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센터를 떠나기 전에, 저는 잊지않고 트름우먼을 진정으로 용서하고 허그를 해주었습니다. 마음속으로나마 당신을 너무 미워해서 미안했다.
결국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것일지어니, 내 마음이 평화로울 때, 우리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고 그게 퍼져나간다면 우리 모두가 평화로운 곳에서 살게 되겠죠. 모든 것은 바로 이순간, 내 마음에서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