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패할 수 없는 가장 완벽한 계획을 가지고 퇴사를 했어. 바로 계획을 안하는거야. 그 흔한 '퇴사 후 세계 여행'도 계획 안했어. 그러니까 앞으로 일어날 모든 행운과 일들은 Upside야. 난 그냥 삶이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나를 데려갈거라고 믿어 (Let the life takes me wherever I need to be)."
아무 계획도 없는데 자꾸 퇴사 후 계획을 묻는 사람들에게 저는 저렇게 대답했어요. 진짜 맹세코 저는 저 말을 영화 기생충이 나오기 전에 했거든요. 어차피 일하고 싶은 열정은 바닥이었고, 가고 싶은 회사도, 하고 싶은 일도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못찾겠고, 자꾸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만 드니까 이럴 때 일수록 어딘가로 냅다 뛰기보다는 그냥 가만히 있자고 생각을 한거에요. 삶이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는데, 나를 어딘가 또 필요한 곳에 데려다 놓지 않을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링크드인을 뻔질나게 들락날락하면서,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들이나 재밌어보이는 일들에 지원도 하고, 주변에 곧 퇴사한다는 사실도 알려서 지인들이 추천해주는 포지션은 어떤 일도 거절하지 않고 인터뷰를 봤어요. 오는 기회를 제가 애써 걸러내지도 않았고, 동시에 무언가를 꼭 하고 싶어서 안달내지도 않았구요.
그러던 중 한국의 한 HR 채용 플랫폼 스타트업 회사에서 싱가폴 지사장을 뽑는 공고가 났는데, 제 지인이 내부추천을 통해 저를 추천해줬어요.
"앨리스, 너 잘할 것 같은데 생각 있으면 내가 너 레퍼를 할까?"
저는 삶에 결정을 맡기기로 했으니, 모든 기회에 yes라고 했고, 이또한 당연히 yes였어요. 그리고 인터뷰를 보기전 이 플랫폼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아이디도 만들고 기존의 채용공고도 한번 살펴보게 되었어요. 아무래도 스타트업이라 그런지, 싱가폴의 스타트업들의 채용공고들이 주로 많이 올라와 있더라구요. 그 과정에서 모르는 스타트업들도 알게되고 한번 쭉 살펴볼 기회가 있었어요.
그리고 얼마 후, 이 채용 플랫폼에서 이메일 광고가 왔는데 아시아에서 제일 큰 스타트업 컨퍼런스인 RISE가 홍콩에서 열리는데 티켓을 디스카운트를 해준다는거에요! 제가 원래 이메일 광고 진짜 하나도 안읽는데, 이건 눈에 들어오더라구요. 평소 내가 이 회사를 그만둔다면 다른 동종 업계가 아닌 창업을 하거나 적어도 다른 스타트업에 조인을 하기 때문일거라고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요새 어떤 스타트업들이 유망한지, 가보는게 좋겠다 싶어서 링크를 타고 갔는데, 20% 할인을 해도 제일 싼 티켓이 100만원이 넘는거죠. 이런 망할. 어떻게 더 싸게 살 방법이 없을까 고민을 하는데 홈페이지에서 'Volunteer'라는 항목이 눈에 들어왔어요. 즉, 3일간의 컨퍼런스에 행사 진행 자원봉사를 17시간인가하면 나머지 시간은 공짜로 행사를 참석할 수 있는거에요. 이제 계획도 없이 퇴사를 하려고 하는 사람이 돈을 아껴야죠. 밑져야 본전으로 저는 자원봉사자에 지원을 했습니다. 바로 다음날 자원봉사자 합격 이메일을 받고 홍콩행 비행기 표를 예약!
그렇게 저는 RISE에 참석을 했어요. 대부분의 컨퍼런스가 그렇지만 특히나 이런류의 컨퍼런스의 핵심은 세션이 아니에요. 바로 네트워킹이에요. 정보는 이미 인터넷에 가득하니까요. 많은 사람들은 이곳에 잠재적 고객을 찾고, 잠재적 투자자를 찾고, 잠재적 채용후보를 찾기 위해 옵니다. 그래서 낮에 세션이 있고, 저녁에는 Night Summit이라는 네트워킹 세션이 있는데, 나이트 클럽을 빌려서 술마시고 열심히 놀면서 사람들과 커넥션을 맺는거에요. 저는 그냥 나이트 클럽이 좋아서 갔습니다. 홍콩의 밤 좋잖아요?
놀다가, 해당 채용 플랫폼에서 본적있는 싱가폴의 스타트업 파운더 Alvin을 만나게 되었어요. 얘가 딱 보니, 돈없는 스타트업애라 라이즈에서 잘해보겠다고 혼자와서 잘못노는거 같애서 데리고 다니면서 같이 놀았어요. 전 혼자서도 잘놀고 둘이서도 셋이서도 잘노니까요. 그러다가 홍콩온지 4일째인데 딤섬한번 못먹어본게 억울해서 새벽 3시에 같이 놀던 사람들에게 딤섬먹으러 가자고 했는데, 아무도 안간대고 Alvin 혼자 같이 가겠다고 해서 둘이 택시타고 딤섬가게를 찾아 들어갔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인터뷰였던 것 같아요. 전 지금까지 해왔던 일, 제가 좋아하는 일, 강점과 약점 이런 얘기들을 많이 했어요. 곧 퇴사 예정이란 것도요. 그러니까 Alvin이 자기가 3분피치 토너먼트 Finalist top 3 안에 들었는데, 만약 자기네가 1등을 하면 자기네 회사도 고려해 달래요. 저는 이런류의 스타트업 컨퍼런스는 처음이라 몰랐는데, 마지막 날 하이라이트 이벤트가 스타트업 피치(Pitch) 왕중왕전인거죠. 이 컨퍼런스에서 가장 큰 스테이지에서 엄청나게 많은 VC들과 관객들을 대상으로 자기 사업에 대한 비전과 가치를 3분안에 피치할 기회가 주어져요. 이 컨퍼런스에 참석한 관객들은 약 20,000명이에요. 모든 관객들이 그 피치를 보러오진 않겠지만,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주 촉박한 시간에 발표를 하는거에요. 전 이날은 별 생각없이 'Sure'라고 대답을 했어요.
그리고 다음날, 어제 딤섬먹고 친해진 친구에게 연락을 해서 다시보니, 얘가 목에 걸고있는 뺏지가 VIP 인거에요! 이 VIP 뺏지가 뭐냐면, 이런 컨퍼런스에서는 스피커나 아주 VIP 고객들을 위한 VIP라운지가 따로 마련되어 있어요. 중요한 투자결정들이 오가는 곳이죠. 이걸 제가 어떻게 아냐면, 제 자원봉사 업무가 VIP 라운지 게이트 바운서였거든요. "Good morning Sir~ How are you today?"하면서 들어가는 사람들 뺏지 확인하고 코드 스캔하는게 제 업무였어요. 그런데 Alvin이가 메인 무대에서 이날 pitch를 해야하니 주최측에서 VIP로 업그레이드를 시켜준거죠. 그리고 이날은 하필이면 제가 꼭 만나고 싶었던 Tinder의 CEO의 스피치가 있는 날이었거든요. 당시에 제가 넥스트 커리어로 고려를 하고 있었던 스타트업중 하나가 데이팅앱을 만드는 회사였거든요. 그래서 Alvin에게 부탁을 했어요.
"Alvin, 나 좀 VIP 라운지로 데려가줘."
"허? 안될거 같은데..."
"해보지 않으면 모르지. 최악의 경우 못들어간다고 거절당하기 밖에 더하겠니?"
그리고 저는 뻔뻔하게도 저 포함 제 친구까지 같이 들어가게 해달라고 했죠.
결과는?
'참가자' 뺏지를 달고 당당하게 (혹은 당당한 척을 하며) VIP라운지에 입성했습니다 후후후. 비록 틴더 CEO는 만나지 못했고, 거기서 나가면 또 못들어오게 할까봐 화장실도 참아가는 슬픔은 있었지만, 그곳에서 많은 좋은 사람들과 얘기를 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런데 한번 들어와 봤으니까, 다음엔 더 당당하게 이런게 가능한걸 알고 이용을 잘 해먹겠죠. 후후후.
촌티날까봐 사진을 하나밖에 못찍었던 VIP 라운지
그리고 이날의 하이라이트, Alvin의 피치시간이 다가왔어요. 많은 참가자들이 이번 해의 winner를 보기위해 메인 스테이지로 모여들었고, 큰 공간이 앉을 자리 없이 꽉 찼을 때, 유명 VC (Venture Capital)들로 이루어진 판정단이 스테이지로 나왔고, 첫번째 팀부터 피치를 시작했어요. 친구가 (비록 이제 막 친구가 된거지만) 이 큰 무대에서 자기가 지난 2년 반동안 모든 것을 부어서 한 사업이 얼마나 훌륭한지 고작 3분안에 전달해야한다고 감정이입해서 상상하니, 진짜 배가 싸늘해질정도로 긴장이 되더라구요.
첫번째 팀은 너무 훌륭했어요. 일단 발표자가 진짜 스무스했습니다. 저는 이런 3분 피치를 본게 이때가 처음이었는데요, 저도 발표를 좋아하는데도 불구 평생 저건 하고 싶지 않았어요. 잘하면 회사를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지만, 못하면 방어막도 없이 이런 망신을 당해야하는, 그것도 자기가 엄청 혼신을 다해 믿고 있는걸로 판정을 당해야하는! 전 그런거에 약해요. 언젠가 RISE에 다시 참석한다면, 성공사례 공유하는 느긋한 패널 스피커가 되고 싶어요 저는.
두번째가 Alvin이었어요. 문제는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쉬웠던 소비자 서비스 및 제품을 다뤘던 첫번째와 세번째 참가자와는 달리 Alvin네 회사는 너무 낯설었어요. 한번도 생각지도 못했던 영역이었죠. 당연하지만 얘가 떨고 있는 것도 목소리에 뭍어 났어요.
세번째 피치까지 끝나고 관객들은 앱으로 투표를 했고, 관객들의 투표를 반영한 VC 판정단의 최종 결과가 나왔습니다. 관객들의 투표 1위는 세번째 피치를 했던 회사였어요. 가장 이해하기 쉬운 컨셉의 소비자 하드웨어 제품이었죠. 그렇지만 최종 위너는 VC의 평가가 들어간 팀이었습니다.
그렇게 1등 트로피는 Alvin의 손에 쥐어졌어요.
1등 발표가 나고 메인 스테이지에서 나가는데 마침 승리의 인터뷰를 하러가는 Alvin과 마주쳤고, 제가 정말 축하한다고 말하니까 얘가 아직 긴장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그렇지만 씨익 웃으면서 한마디 하더라구요.
"너 회사 마지막 날이 언제랬지?"
그게 2019년 4월의 일이었어요. 그 이후로도 지인들의 다양한 추천으로 훌륭한 분들과 인터뷰도 많이 봤고, 정말 좋아보이는 기회들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일단 쉬기로 했기 때문에 모든 면접 후 팔로우업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어요. 친한 사람들에게 이런 기회들 중에 뭐가 나와 가장 잘 맞아보이냐고 물어보긴 했지만, 굳이 지금 선택할 이유는 없더라구요. 인연도 Right timing, Right place, Right person이라는데, 회사도 그렇겠죠. 애초에 삶이 내가 있어야 할 곳에 데려다 줄거라고 믿고 맡겼던 것처럼, 삶이 알아서 선택해주기를 기다렸어요. 그리고 퇴사 후 4개월 동안 홍콩에서 10일간 침묵 명상을 하고, 모로코의 사하라 사막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보며 잠이들고, 포르투갈, 이탈리아, 독일을 발이 닿는대로, 떠나고 싶은 날 떠나고, 바로 전날 다음 장소 비행기표나 기차표를 예약하며 하루 종일 카페에서 혼자 앉아서 글도 쓰고, 책도 읽고, 그렇게 지냈습니다.
사실 저는 Eat, Pray, Love 마냥, 이 여행의 끝에 Love가 있지 않을까 했거든요. 친구들에게 농담처럼 말했지만, 친구들은 저라면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유럽에서 사랑을 만나서 돌아오지 않는 것' 같은 거였어요. 내심 저도 그걸 기대해서 포르투갈에서 이탈리아로, 이탈리아에서 독일로 가는 일정들을 미리 예약하지 않았던 건데... 만약 내가 포트투갈에서 사랑을 만나면 떠나지 않을거니까. 난 그냥 유럽의 시골의 아낙으로 사랑을 먹고 살아도 좋으니까.
그런데 사랑으로 먹고 살 수 있지만, 동남아 8년 매계절 여름에 익숙한 제 살에 유럽 가을 추위는 갈수록 견디기 힘들어졌고, 청소도 안하고 비워둔채 꼬박꼬박 월세를 내고 있는 싱가폴의 집도 정리를 해야했기에, 일단 싱가폴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호스텔에서 자는것도 할만큼 했겠다, 덕분에 베드버그도 또 물려봤겠다, 이제 집에 좀 가고 싶더라구요.
적당히 돌아가고 싶은 때가 되어서 돌아와 보니 저에게 러브콜을 주었던 많은 회사들 중 제가 실제로 사인을 할 계약서를 보내준 건 Alvin네 회사 하나. 결국 제가 선택할 필요 없이, 삶이 선택을 해준거에요. 내것이라면 나에게 올것이고, 내것이 아니라면 나에게 오지 않을 것인데, 무엇을 고민하는가 중생이여.
제 전 회사 연봉을 아는 Alvin은 도저히 그건 맞춰줄 수 없고, 자기가 줄 수 있는 최선이라고 해서 계약서를 줬어요. 예전보다 꽤 적었지만, 제가 뭐 월급깎고 조인하는게 한두번인가요? 지금까지 조인한 모든 회사들을 전 월급을 깎고 조인했지만, 결국 열심히 하고, 가치있는 일을 하면, 그 전에 받던 회사보다 더 많이 받게 될테니까 크게 신경쓰지 않고 협상도 안하고 바로 사인했어요. 제가 이 회사에 어떤 가치를 가져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오히려 욕심부려서 저에게 큰 기대를 갖게 하는것도 부담스럽구요.
직무는 뭐냐면 - '니가 하고싶은 것을 찾아서 하라'에요. 애초에 이 직무의 사람을 뽑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정에도 없었지만, 제가 지금 시점에서 회사에 도움이 될 것 같았대요.
예컨데, 나이트 클럽에서 드센 사람들 사이에서 돈 안내고 공짜로 술을 잘 얻어먹고 다니는 철면피적인 면모, 자기 co-founder와 다수의 직원들도 컨퍼런스에 와 있었는데, 그 누구도 VIP 라운지에 데려가 달라고 하지 않았는데, 바로 어제 만난 사람을 leverage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요령과 배짱, 그리고 그 밖에 제가 도와줬던 일들이 좀 있었는데, 그런 것들을 보면서 '앨리스는 어느날 태국에 던져놔도 뭔가 해오겠구나' 싶었고, 그런 특성들이 이 산업에서 이 회사가 풀고자 하는 문제들을 푸는데에 필요한 역량이라고 판단했다는 거에요. 전 제 강점을 좋게 평가해주는 것이 기뻤어요. 제 강점은 바로 전 회사에서는 크게 발휘될 기회가 많이 없었으니까.
반면 제 입장에서 이 회사는 나를 어떻게 쓰려는 건지 다소 걱정이 되긴해요. 저는 오일 & 가스에도 있었고, 소셜 미디어/SaaS에도 있었고, FMCG도 있었지만, 이 산업은 처음이거든요. 어디냐면, 좀 의외인데, 로지스틱이에요.
제가 조인하는 회사인 Haulio는 화물 컨테이너를 사랑하는 Geek들이 만든 회사에요. 물류 운송에는 여러 단계의 체인이 있는데, 가업으로 물류사업을 해왔고, 혼자서 컨테이너 트럭 한대에서 시작해 6년간 15대까지 키워본 경험이 있는 Alvin이 21세기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낙후된 환경의 산업에 울분을 갖고 만든 회사죠. 규모가 꽤 큰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화이트보드에 자석으로 운전자의 경로를 플래닝하고, 모든 경로를 갈때마다 종이에 사인을 받아와야하고, 전화와 때로는 팩스로 주문을 받는 그런 산업을 디지털 플랫폼으로 데려와 참여자들 모두를 Next Level로 데려가는게 우리의 미션이에요.
이게 바로 운전면허도 없는 제가 물류산업, 그 중에서도 컨테이너 트럭이라는 산업이 갖고 있는 문제를 Tech로 푸는 로지테크 회사에, 뭐할지는 입사 후 알아서 역할을 찾는 이런 애매한 포지션으로 들어가게 된 구구절절한 사연이었습니다.
출근 아닌 출근을 한지 이제 일주일 좀 넘었는데, 얘네가 풀려는 문제에 대해서 더 알게 될수록, 이 회사가 가진 전략적 강점을 알게 될수록, 무엇보다 이 회사의 사람들에 대해서 알게 될수록 저는 이 기회에 감사해요. 아직까지는 제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에 대한 명확한 Job Description은 보이지 않지만, 이 훌륭한 회사에 조인하게 되어서 영광이라고 생각하며, Alvin이 잉여 인력을 비싸게 뽑았다고 후회하며 절 짜르기 전까지 이 흥미로운 문제를 잘 풀어보려고 합니다. 우리 회사, Haulio가 얼마나 멋진 회사인지는 다음에 쓸게요!
이상으로 교훈없고 팁도 없는 저의 스타트업 취업기였습니다.
전 Back To Singapore 했으니, 앨리스의 싱가폴 모험은 계속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