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간 만나던 약혼자와 헤어지는 것으로 30대 (외국 나이 셈법으로)의 그랜드 오프닝을 연 나는, 그와 헤어지고 난 후 일명 '망나니 세션'에 돌입했다. 오랜 시간 상대에게 맞추느라 나를 잃었기에, 빠른시기에 격하게 나를 되찾고자 망나니처럼 살게 된다는 것이 나름의 변명이었다. 난 내 삶의 그 어느때보다 이시기에 동료들과 클럽과 바를 많이 갔고, 술을 마셨다.
이 시기는 신선했다. 쉼없는 연애를 했던 20대, 나는 순수하고 열정적이었고 헌신적이었고, 내가 만났던 사람들도 그러했다. 그러나 30대의 내가 마주한 환경은 조금 달랐다. 아무도, 그 어떤 미디어도 책도, 30대 여자가 마주하게 될 연애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그려준 적이 없었다. 이게 이렇게 쉽지 않은거라고 아무도 말해준 적이 없다! 이 시기는 가벼운 즐거움과 허무함이 버무려진 기간이었다. 거기에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의 특수성도 한목했다.
이곳에서는 연애가, 아니, 사람들을 가볍게 만나기가 너무 쉬웠다. 이는 2019년 4월에 절정을 달렸다.
2019년 4월 19일.
나는 적당히 예쁘고, 적당히 스스로를 잘 꾸밀줄 알며 (싱가폴 스탠다드가 그러하다. 한국가면 난 짜진다, 진짜.), 적당히 좋은 대화상대고, 대단히도 오픈마인드이며, 다양한 경험을 했고, 돈도 잘벌며, 적당히 괜찮은 워크라이프 밸런스를 가지고 있는, 친구의 말에 의하면 싱가폴에서 상위 5%안에 드는 괜찮은 아내감이다. (사실 상위 1%라고 했는데 이거슨 나의 마지막 양심이다.)
틴더든 클럽이든 친구를 통해서든, 내가 만나는 남자들도 꽤 괜찮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유명한 이커머스의 CMO와 데이트 할수도 있고, 핫한 스타트업의 데이터 애널리스트, 손에 꼽히는 스타트업의 창업가, 뱅커등의 잘나가는 직업은 기본이고, 거기에 얼굴도 괜찮고, 적당한 센스를 갖췄으며, 머리도 비상하며, 심지어 잘 놀줄아는 재밌는 대화상대들이 많다.
이들을 좀 분석해 보면 이렇다.
1. 이기적 성취주의자들이다:
자기가 태어난 나라에서 가족과 친구라는 연고를 등지고 낯선 나라로 가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온 이민자들은 비슷한 성향이 있다. 내가 중요하고, 나의 성취가 중요한 사람들이다. 난 이런 특징을 가진 이들을 '이기적 성취주의자'라고 이름붙였다. 물론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이 자체만으로 나쁜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단 오게 되면, 모국에서보다 훨씬 높은 연봉을 받기 시작하고, 게다가 세금도 덜 낸다. 여기서 어쩔 수 없이, ego가 부풀어진다.
2. 매력적이다:
혈혈단신으로 왔으니 잘 정착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만나고 알아야하니 본국에서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네트워킹 이벤트나, 친구 BBQ 파티라도 가서 사람들을 알고 지내게 된다. 그런데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많다보니 세상이 이렇게 다양하구나라는 것도 배우게 된다. 마치 교환학생 생활을 엄청 많은 돈을 받으며 하느 느낌이랄까? 이런 낯선 이들을 만나서 파티를 하는 것에 익숙해지다보니 성격적으로 사람들은 좀 더 사교적으로 변한다. 그리고 다양성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는 사람들이다보니 자연스럽게 open minded되어간다.
3. 만남과 헤어짐이 쉬운 이 곳에 익숙해진다:
그렇게 가볍고 넓은 만남에 익숙해진다. 또,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다보니 '이 나이쯤이면 이걸 해야한다'라는 전통적인 압박에서도 피한 floating, 둥둥뜬 여행자의 마음으로 지낸다. 그러다가 2 - 3년 후에 본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만남은 쉽고, 헤어짐도 쉽다.
30대 초반이면, 인생의 황금기를 살고 있는 셈이다. 물론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겠지만, 이런 특성을 지닌 사람들이 30대의 싱글이면 섣불리 한 사람에게 정착하지 않는다. 기회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난 처음으로 '커밋먼트 이슈'라는 단어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걸 비난 할 수 있을까? 나만 보기에 자신은 옵션이 너무 많다고 하는 사람을? 날 좋아하지만 나에게 충분히 반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을? 나도 그렇게 대하는 사람들이 몇 있지 않은가? 그들을 못된놈들로 몰기에는 그들을 이해 못하는게 아니었다.
아마 어떤 시점에 우리는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상대와 결혼할지 모른다. 결국 모두 외로우니까. 그런데 그 시점은 아직은 미래이다. 만남과 헤어짐은 우리에게 대단한 타격을 입히지 못한다. 너와 만나면 즐겁지만 너와 만나지 않아도 난 행복해. 난 이게 성숙한 마음이라 생각했다. 스승이 말하길, 나는 혼자서도 행복해야하니까. 그리고 좋는 관계란 두 행복한 사람이 서로를 필요로해서 만나는게 아니라 같이 있으면 좀 더 행복하기때문에 서로를 원해서 만나는 거니까.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적당히만 관여한다. 너에게 올인하지는 않는다. 삶에는 충분한 distraction이 있다.
"I am losing you and you are losing me. But we know we will be fine."
데이트를 하던 남자애와 이런 말을 주고받은적이 있다. 나도 그를 정말 좋아했었고, 그도 나를 꽤 좋아했었다. 그렇지만 서로를 향한 약속을 하기는 어려웠다. 어떨때는 내가 약속을 하기 어려웠고, 어떤때는 상대방이 그러했다.
정말 좋아하지만, 이어지지 않는다해도 우린 정말 괜찮다. 왜냐면 그만한 얼굴과 몸매, 적당한 성격과 능력을 갖춘 사람은 금방 sourcing할 수 있으니까. 매력적인 사람들, 조건 차는 사람들은 많다. 너와 있어도 즐겁지만, 다른 사람과 있어도 또 다르게 즐겁거든. 마치 세일즈 파이프라인을 채우는 것처럼. 새로운 리드가 들어오고, 더 많은 커밋먼트를 요구하는 사람을 더이상 만나지 않고 싶으면 파이프라인에서 내보낸다. 그러다가 잘지내는지 한번씩 연락이 오겠지.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한끼에 몇십만원하는 데이트를 즐기고, 비싼 술을 마시며, 기억나지도 않을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인생 대화를 한다. 나와 만나고 싶으면 며칠전에 예약을 해줘. 내 일주일은 금방 차니까.
좋은 조건을 갖출수록,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이 원해질수록,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사람도 관계도 너무 쉽게 갖을 수 있어서, '꼭 너여야만해'와 같은 무거운 마음은 비논리적인것이 되어갔다. 그리고 무겁고 진중한 사람들이 가벼운 사람들에게 휘둘리는 것을 보면서, 가볍지 않으면 '손해'처럼 보여졌다.
어떻게 결혼을 하는거야? 어떻게 한사람만 계속 사랑해? 물론 많은 사람들이 '언젠가는' 한사람에게 정착하고 안정적인 가정을 만드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늘 괜찮은 사람이 있을 것만 같고, 한사람에게 집중하기에는 호기심이 너무 많다. 그리고 항상 더 괜찮은 사람이 있을것만같다.
그렇게 우리는 가볍고 행복하면서도, 공허하다. 그렇지만 괜찮아. 금요일은 매주 오니까. 우리는 이 도시의 버블속에 산다.
약 1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나는 술취한 것과 같은 즐거움으로 살고 있었을 때였다. 가까운 친구들의 눈에 나는 말은 즐겁다고 하는데 자세히 들어보면 난 그닥 즐거워하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사랑해서 아무리 마음이 아프고, 아무리 사랑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될 일들을 겪어도, heart-broken해서 절친에게 가는 비행기를 타고 갔을 때 내가 빈 소원은 이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