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잡으로 시작했지만..
이란에서 뭔가를 해보자는 결심을 한 후부터 아이템 찾기에 돌입했지요. 역시 새로운 시장이 열릴 때, 가장 만만하게 생각 할 수 있는게 보부상이 아니겠습니까? 물건을 갖다 팔자. 그리고 아무래도 한국인으로서 강점을 가질 수 있는 한국산 물건에 집중했지요. 이란에 갖다 팔 수 있는 한국 물건이 뭐가 있을까?
문득 예전에 오일앤가스쪽 헤드헌팅을 했을 때, 친한 엔지니어분께서 해주셨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중동에서 고객들이 오면, 그렇게 동대문을 가자고해요. 한국산 히잡의 퀄리티가 좋다고 마누라가 한국 출장갈때마다 그렇게 부탁을 한대요. 우리 눈에는 다 같은 검은 천일지 모르나, 그 사람들이 볼때는 재질, 보석이 박혀있는 디자인, 이런게 천차 만별이라고 합디다. 동대문 히잡이 클라이언트 접대 코스의 한부분일 정도에요. 한번 오면 한사람당 20장씩 사가고 그러니까요."
그래서 저랑 같이 이란 사업을 준비하는 친구가 동대문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도매상들을 만나서 샘플을 받기 시작했지요. 확실히 도매상들의 말로도 요새는 좀 잠잠하지만, 한때는 중동에서 온 도매상들로 동대문 히잡가게들이 북새통을 이뤘을 때가 있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중동에서 유독 인기가 있었던 스카프들을 소개해줘서 10장 스카프를 샘플로 준비했습니다.
한편으로 저는, 전남친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나, 이란에 히잡을 팔까해. 좀 알아봐 줄래?"
그리고 전남친에게 이틀만에 연락이 왔습니다.
"앨리스, 히잡은 버려. 아빠가 알아보니까, 이란에 히잡 디스트리뷰션은 딱 두개 집안이 독점하고 있대. 그리고 그 두 집안은 모두 정부관련, 즉 종교 관련된 집안이라서 니가 끼어들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그리고 니가 이란에서 사업을 하고 싶으면, 절대 건드려서는 안될 영역이 종교 관련된 영역, 종교 관련된 사람들이야."
얼마나 편해요?
사람을 통해서 일하면 전화 한통으로 정말 많은 시간을 아낄 수 있죠.
특히 이란은 상류층 사람들끼리 다 연결되어 있어서 사업 관련 정보는 리서치할 것도 없이 물어보면 답이 빠르게 나옵니다. 못해도 두다리만 건너면 원하는건 다 얻을 수 있다고 했거든요. 워낙 정보가 부족해서 인터넷 리서치가 쉽지도 않구요. 돈이 될만한 일을 물어보기도 했지요. 전남친네 아버지가 돈이 될만한 아이템들을 알려주시는데, 제가 하기에는 스케일이 커서 끼어들기 어려운 일들이라 별 도움이 안되요. 호텔을 만든다거나, 옷 브랜드를 만든다거나 이런거라서 제가 할 수 있는게 많이 없거든요. 그 집 며느리라도 된다면 모를까.
그래서 히잡에는 안녕을 고했죠.
그리고 이틀이 흘렀을까요? 아침에 우버를 불러서 출근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날 우버 운전사분이 무슬림 여성이었어요. 종교와 인종이 다양한 싱가폴에서 살면서 히잡을 쓴 여성은 많이 보지만, 실제로 친구가 될 기회가 많지는 않았어요. 그 당시 머릿속에 히잡이 계속 박혀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앨리스: "히잡을 쓰시는 분들은, 머리 염색을 하나요? 미용실에 자주가세요? 헤어스타일에 많이 신경이 쓰이시나요?"
우버 운전사: "저는 머리를 짧게 유지해요. 어차피 가족들만 내가 히잡을 벗은 모습을 보니까, 굳이 헤어 스타일에 많이 투자할 필요는 못느껴요. 대신 탈모나 모이스쳐라이징에 훨씬 관심이 많아요. 친구들 중에서도 머리카락이 빠지는 걸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아하!
머릿속에 빤짝 불이 들어왔습니다.
제가 미용실에서 인턴을 하면서 두피관리사 자격증을 딴적이 있거든요. (그 흔한 운전면허, 마이크로오피스 3종 세트도 없지만 이런 자격증을 가졌습니다..) 탈모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고, 그 중 가장 흔한 이유는 남성호르몬 과다이지만 개중에는 압박형 탈모라고 모자를 항상 쓰거나, 머리를 싸매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탈모가 있습니다. 직접적인 탈모는 아니더라도 하루종일 머리를 히잡으로 싸매 놓으면, 태양으로 받는 비타민D부족 그리고 혈액/공기순환이 잘 안되서 두피가 약해질거에요. 그리고 머리카락도 건조해지구요. 무슬림 여성의 헤어 고민에 특화된 헤어 제품을 팔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인턴했던 미용실의 이사님께 연락을 드려서 살롱전문 헤어제품 회사에서 제품을 소개받고 샘플을 받아 챙겼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도 잘 알려진 탈모제품을 판매하는 회사들 몇군데에 연락을 했지요.
그렇게 아이템을 잡았습니다.
아이템을 잡을 때 저희가 계속 고려했던 점은
1) 이란의 middle class에 붐이 올거다. 어차피 상류층은 경제제재와는 상관없이 소비를 할 수 있었지만, middle class는 제약이 많았을거다. 그리고 제재가 풀리면 middle class의 소득이 늘어날 것이므로 그동한 소비하지 못했던 것들을 소비하려고 할 것이다.
2) 아무래도 우리가 강점을 가지려면 한국과 관련된 것을 하는 것이 좋다. 한국에서 갖다 팔만한걸 생각해보자.
그리고 친구와 계속 이런 고민을 하면서 한 생각이 있어요.
제품이 너~무 많은거에요. 화장품도 옷도 모든게 너무 많아요. 그리고 그걸 더 싸게 만드는 방법도 너무 많아요. 우리는 정말로 '공급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공급 과잉시대에서 물건을 만들어서 살아남으려면 1) 기술력이 엄청 뛰어나서 특허를 가지거나 2) 브랜드가 뛰어나거나 둘중 하나밖에 없더군요. 기술력은 제가 있는 기술도 없거니와 특허를 가지고 있어도 경쟁사들이 어떻게든 우회해서 다른 방법으로 만들 수가 있는 것 같더군요. 결국 중요한 역량은 물건을 만드는 역량이 아닌 물건을 파는 역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건을 팔려면 또 1) 브랜드가 출중하거나 2) 가격이 싸거나 3) 유통이 특별하거나인데, 3)유통에 욕심이 나더라구요. 이란의 유통 채널이 궁금해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커머스가요. 우리가 이 물건들을 이란의 이커머스로 팔 수는 없을까? 현지 이커머스 회사가 있나? 그보다 이란의 실제 사정은 어떨까?
이런게 궁금해져서 일단 이란을 가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냥 갈 수는 없죠. 가서 중요한 파트너가 될 수 있을 사람들을 만나자.
그리고 네트워킹은 제 특기인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