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투게더>가 남긴 것
왕가위 감독
가장 가까운 사람은 그 가까운 거리만큼 뒤돌아서는 순간 가장 먼 사람이 되어버린다. 지구는 둥글고 눈은 앞만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어떤 사랑은 진한 기척을 남긴다. 최대한으로 돌아서도 내 주위 모든 것은 그 사람만을 비추는 거울이다. 어딜 봐도 그 사람이 떠오른다. 눈 둘 곳 없는 이별은 지나간 사랑보다는 사랑의 잔여에 가깝다. <해피투게더> 안에는 끝내지는 못하고 계속해서 다시 시작하기만 하는 사랑과 사람이 있다.
왕가위 감독의 작품 중에 가장 좋아하는 영화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는 가본 적 없는 낯선 곳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지구 반대편의 낯선 공간, 흐르는 음악, 아휘와 보영이 먹는 음식, 입는 옷. 카메라가 비추는 모든 장면은 마치 <해피투게더>를 위해 만들어진 시공처럼 진득하다. 그래서인지 아르헨티나가 왕가위의 홍콩과 닮아 보인다. 처음 아휘와 보영이 다시 시작하기 위해 아르헨티나로 왔다는 내레이션이 나올 때, 왜 그 시작이 아르헨티나여야 했는지 궁금했다. 그 의문은 스크린 속 아르헨티나를 보고 씻겨 내려갔다. 영화 속 아르헨티나의 풍경을 보면 '이곳이라면 새로 시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높은 건물이 틈 없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홍콩과 달리 휑한 아르헨티나의 풍광은 그게 무엇이라도 새로 지을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 와서도 아휘와 보영은 계속 길을 잃는다. 지도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떠나기도 전에 길을 잃는다. 함께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조차 제대로 가닿지 못한다. 먹이고 입히고 재워도 내 사람이 되지 않는다. 다 큰 아이는 언젠가는 품을 떠나기 마련이다. 눈에 뻔히 보이는 어긋난 사랑의 길을 걷는 두 사람에게 지도는 아무런 힘이 없는 것 같다. 길을 잃었을때 만나는 풍경처럼 두 사람은 위태롭고 심란하다. 그 심란함이 영화의 곳곳에 배에 있다. 그중에 아휘가 보영이 없는 방에 힘없이 앉아 있다가, 담배를 사러 나갔다 왔다는 보영의 말에 다음 날 담배를 한 보따리 사 오는 장면을 가장 좋아한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을, 최선을 다해 미루고 싶은 마음을 담뱃갑에 담아 쌓아 올리지만 그 마음은 너무 쉽게 흩어진다. 후에 역시 홀로 남은 보영이 그 흩어진 마음을 다시 쌓아보지만 텅 빈 방은 채워질 기미가 없다.
제대로 된 마침표를 찍고 싶었는데, 마침표를 찍다 보니 말 줄임표가 되어버린 사랑이 있다. "스텝이 엉키면 그게 바로 탱고."라던 <여인의 향기>의 명대사처럼 아휘와 보영의 만남과 헤어짐도 모두 탱고다. 뒤엉켜버렸지만 여전히 사랑이다. <해피투게더>를 보고 나면 왠지 토막 난 장면과 짧은 단어들만 떠오른다. 아휘의 방에 홀로 남은 보영과 대만을 거쳐 다시 홍콩으로 돌아갈 아휘. 아휘의 소리 없는 울음을 지구 끝에 남기고 온 장까지. 그 누구도 함께이지 못한 채로 끝나기 때문인 걸까? 'together' 앞에 붙은 'happy'와 'happy' 뒤에 붙은 'together'가 이다지도 아플 수 있는 거다.
4K임에도 여전히 흐릿한 것만 같은 장면이 가득하다. 이번에는 눈물 대신 이구아수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을 머금은 아휘가 머리에 콕 박혔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상영관의 그 누구도 안 움직이고 크레딧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처음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남아있는 영화들이 있다는 점이 반갑고, 그 영화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 기념 포스터를 열심히 줄 서서 받아왔는데 내 방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곳에 붙였다. 한동안 자주 쳐다보게 될 것 같다.
다시 보면서 확신한 건데, 보영은 장국영이 아닌 다른 사람이 했다면 정말 미워했을 것 같다. 장국영이 아닌 보영은 상상이 안된다. 아휘가 양조위가 아니었다면 덜 사랑했을 것 같고. 좋아하는 영화를 큰 화면에서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영화 삽입곡은 뭐. 말할 것도 없다. 유튜브에는 <해피투게더>의 사운드 트랙을 모은 플레이 리스트도 많다. 그중에 내가 자주 듣는 플레이 리스트를 공유한다. 함께인 채로 행복하지 못했던 두 사람의 사랑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면 한 번쯤 들러 주시길.
*20200204/ 올 초 왕가위 감독 특별전에서 관람 후 작성한 글입니다. 약간의 수정을 거쳐 업로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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