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어보>가 남긴 것들
세상은 넓다.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딛고 있는 땅이나 올려다본 하늘이 넓다는 뜻도 되겠지만, 더 와 닿는 것은 다양한 삶을 만나며 커지는 세상이다. 사람과 삶이 있기에 흑산도에서도 세상은 넓어진다. 제 아무리 대단한 가문도 살아남지 못하는 곳이라는 흑산도에 대한 평가는 정약전과 창대가 넓힌 세상에 의해 재고되어야 한다. 그 가문의 담장은 얼마나 높았는가. 그들에게 흑산도는 무엇이었는가. 애초에 살아남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준익 감독은 이미 <동주>와 <박열> 등에서 역사 속 인물을 재조명하는 방식으로 그 인물 옆에 지워진 이름에 주목했다. <동주>는 "동주와 몽규"가, <박열>은 "박열과 후미코"가 되어야 마땅하다. 한 시대를 통과하는 두 인물의 관계에 주목함으로써 그 안의 사람을 들여다보는 것이 가능했다. <자산어보>도 마찬가지다. 자산어보의 저자인 정약전의 삶은 자산어보에 등장하는 창대라는 인물을 통해 깊어진다. 정약전과 창대 사이에는 일방적인 관계는 없다. 창대의 성리학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더 나은 삶을 위해 필요하다면 서학의 가르침도 마땅히 수용하는 정약전의 태도에 깊이가 생긴다.
흑산도라는 공간 또한 인물들과 함께 생동한다. 죄가 깊을수록 떠나는 길이 더 멀어지는 유배의 공식에 따라 흑산도는 가장 큰 형벌이 되어야 마땅하다. 형벌의 공간에서 정약전은 흑산도의 삶을 만난다. 흑산도는 이준익 감독 특유의 사람 냄새와 유머로 점철된 공간이다. 사극 속에서 아전들은 주로 부패한 정치의 도구로 그려지지만 흑산도의 아전은 반갑게도 이웃이다. 불합리한 체제 속에서도 잃지 않은 인간성은 분명히 아름답다. 방금 잡은 생물 홍어 맛은 한양에서는 결코 맛보지 못할 흑산도만의 맛이다
흑산도에서 더 이상 복잡한 사람 공부가 아닌 명명백백한 생물 공부를 하겠다는 정약전은 결국 생물 안에서도 사람을 배운다. 약이 되는 갑오징어와 파랑새를 품은 성게는 그가 흑산도에서 배운 사람이다. 입신양명의 삶을 통과한 끝에 흑산도에 도착한 그는 이미 어부의 삶과 양반의 삶이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목민심서’가 아닌 ‘자산어보’를 선택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당연한 믿음은 그 믿음이 당연하지 않은 시대 속에서 더 빛난다.
창대는 오히려 정약전을 만나 흑산도를 벗어나고자 한다. 사람 구실 하고 싶어 성리학을 공부한다던 그는 자신이 익히고 배운 것을 통해 백성의 삶을 이롭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육지로 향한다. 정약전이 그런 창대의 선택을 '딴생각'이라며 나무라는 이유는 육지의 현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선택을 막을 수 있을까? 육지의 삶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청년에게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는 이유로 그 길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 결국 창대는 육지로 향한다. 책과 다른 현실을 목격한다. 자신이 가진 뜻과 자신의 사정은 호응하지 않으며, 시대는 거대하다. 많을 길을 돌아 창대는 흑산도로 돌아간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다름이 틀림이 아니었듯이 정약전과 창대의 다름도 틀림이 아니다. 목적지가 같아도 여행은 다를 수 있듯이, 그들은 다른 삶을 살았고 그들이 걸을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선택했을 뿐이다. 창대가 흑산도의 배움을 깨닫고 돌아오는 사이, 정약전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흑산도는 색을 찾는다. 창대는 흑산이 아니라 자산이라고 말한다. 창대는 흑黑과 자玆의 차이를 배웠다. 검은 것과 깊은 것의 차이. 창대가 도착한 그 섬은 오래전 정약전이 도착한 그 섬과 같을까. 그 둘은 마침내 같은 것을 보게 된 것일까.
난 창대가 흑산도로 돌아간 것이 마냥 기쁘지 않다. 보지 않는다고 시대의 어둠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돌아보는 것을 선택한다. 검은 것들 사이에서 깊은 것을 발견하는데에서 희망을 찾는다. 그 희망에는 동의한다. 창대가 깨달은 흑산도의 깊이가 세상의 깊이가 될 수 있다면 분명히 거기에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세상의 수많은 레이어를 볼 수 있다면, 그것들과 함께 살 수 있다면 분명히 나아질 것이다. 깊은 것에 마음을 더하면 사랑이 된다.(慈)
*흑백의 화면 속에서 눈동자는 유독 반짝인다.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보면서 너무 가는 거 아니야 했는데 정약용의 시에 등장하는 실제 사건을 가져왔다고 한다. 현실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