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파더>가 남긴 것들
플로리앙 젤러 감독
<더 파더>는 알츠하이머 환자 앤서니의 머릿속을 그려낸 영화다. 그의 머릿속을 시각화해놓은 듯한 집 안에서 관객들은 자주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집은 계속해서 미묘하게 변화하고, 기억과 환상을 넘나들며 진실은 계속해서 얼굴을 바꾼다. 하지만 영화는 혼란 속에서 진실을 찾는 것에 주안점을 두지 않는다. 앤서니의 기억과 환상, 현실이 혼재된 이 공간은 밝혀낼 진실이 아니라 고스란히 버텨내야 할 시간에 가깝다. 어지럼증을 유발하는 플롯은 앤서니의 시간을 관객이 체험하도록 한다. 이 체험은 철저하게 내부의 시선에서 그의 삶을 바라봄으로써 그가 겪을 혼란과 그가 견뎌야 하는 세상을 이해하게 한다.
알츠하이머 환자가 상실하는 것은 기억이나 인지능력만이 아니다. 기억하고 지켜냄으로써 유지되는 그의 역할 또한 잃게 된다. 폴과 남자가 그에게 딸의 인생을 망치지 말라는 폭언을 쏟아내는 것은 그의 기억의 조각일 수도 있지만 그 폭언의 주체의 얼굴이 변화한다는 점에서, 환상의 형태를 한 앤서니의 심정처럼 다가온다. 이 지점에서 나의 아버지가 자주 하는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자신이 나이가 들어감이 느껴질 때마다 "사냥꾼이 사냥을 못하면 아웃돼야지."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 마초적인 발언을 들을 때마다 나는 무슨 그런 소릴 하냐며 타박하지만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아버지의 역할, 집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의 표현일 것이다. 앤서니가 '내 집'이라는 집에 대한 소유권을 재차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도 나의 '파더'와 비슷한 책임감이나 역할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알츠하이머란 병은 그 집도, 아버지란 역할도 빼앗아 간다. 앤서니는 그의 집에 살지 않고, 딸은 파리로 떠난다. 부양자가 아닌 피부양자가 된 그는 아들로 되돌아간다.
나는 앤서니 홉킨스를 보면 예나 지금이나 <양들의 침묵>의 하얀 옷의 우아한 살인자였던 그를 떠올린다. <양들의 침묵>은 <굿 윌 헌팅>의 삐뚤어진 버전이었다. 한니발은 철창에 갇힌 와중에서도 클라리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교훈들을 쏟아낸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한니발과 그로부터 무언가를 배워가는 클라리스. 감히 아버지와 딸처럼 보였던 그 관계 안에서 앤서니 홉킨스가 품고 있는 한니발이라는 에너지는 영원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영원이라는 말을 영원 밖에 없다. <더 파더>에서 앤서니 홉킨스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환자로 등장한다. 집의 주인이자 딸의 아버지의 위치에서 낙오된 그가 결국에는 아들로 회귀하는 장면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앤서니가 연기한 <더 파더> 속 아버지가 실제 그와 같은 날에 태어난, 동명의 인물이라는 것은 재밌는 장치 그 이상이다. 한니발의 에너지를 앤서니의 에너지로 세공할 수 있는 능력과 시간이 있는 배우가 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이 분명하다. 영화 속 앤서니가 길을 잃어가는 과정은 배우 앤서니에게는 오히려 새로운 길처럼 보인다. 1960년대부터 202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 배우가 한 삶을 바쳐 이뤄낸 성취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클로즈업된 화면 안에 앤서니 홉킨스의 얼굴이 유난히 깊게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나만의 착각은 아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