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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gChiC 항식 Dec 22. 2024

Day 1-pt.1

푸르른 5월의 씨애틀, 여행 본격 시작.

 비즈니스 클래스, 누군가에겐 꿈만 같은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란 사람도 어째 저째 살다 보니, 마일리지를 한 점 한 점 차곡차곡 모으다 보니, 어느새 열 번째 비즈니스 탑승에 와있었다(필자도 기억을 더듬어 세다 보니 놀랐지만 단거리 탑승이 생각 외로 많다). 1년 6개월 만에 다시 타보는 이 탑승클래스는 뭐니 뭐니 해도 나에겐 단지 술단지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

 일단, 탑승 직후 웰컴드링크로 제공되고 있었으나 지각 탑승이라는 과오를 저지른 민망함에 내 스스로 거절했던 팔머 브뤼 리저브Palmer Brut Reserve 샴페인 한 잔, 식사로 선택한 양념갈비에 어울릴만한 한산소곡주(아마도 우희열 명인의 것) 한 잔, 뜯다 보니 갈비도 고기인지라 자연스레 지공다스Clos du Bois de Menge Gigondas 레드와인 한 잔, 후식으로 제공된 떡에 곁들일 테일러 타우니 포트Taylor's 20 year Old Tawny Port 한 잔과 과일에 어울릴 트로켄 베렌 아우슬레제 리슬링Nittnaus Trockenbeerenauslese Exquisit 한 잔.

알딸딸한 식사에 든든한 취기까지 곁들였기에 영화를 한 편 보다가 자연스레 잠에 들까 한다. 하지만 한국 시간으로 밤 10시도 되지 않은 때에 잠이 올 리가 만무하다. 결국 선택한 영화 <바튼 아카데미The Holdovers>를 엔딩 크레디트까지 다 보고야 만다.



<바튼 아카데미>는 지난 2월 필자가 이미 영화관에서 재미있게 관람한 영화이다. 혹시 20년 전에 개봉했던 <사이드웨이Sideways>라는 와인과 관련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당시 골든글로브 최우수작품으로 선정된 이 영화는 알렉산더 페인Alexander Payne 감독과 폴 지아마티Paul Giamatti 배우의 훌륭한 케미를 통해 코미디의 유쾌한 재미와 사랑에 대한 씁쓸한 교훈을 전하고 있는데, 이 감독과 배우가 20년 만에 다시 합을 이뤄 <바튼 아카데미>라는 코미디 영화를 만들어냈다. 가족이 아닌 사람들끼리 모여 만들어지는 가족에 대한 정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크리스마스 시즌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요즘처럼 눈 나리고 쌀쌀한 겨울,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에 집에 콕 박혀 OTT 서비스를 이용해 관람하면 몸도 마음도 따뜻해지니 안 보신 분들께는 꼭 한 번 보실 것을 추천드리는 바이다.




 영화관에서 이미 한 번 즐겁게 관람한 영화, 나는 비행기에서 새로운 영화를 보는 것보다는 이미 본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영상과 음향이 열악한 기내에서 새로운 영화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접하기엔 아쉽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경향이다. 여하간 이미 검증된 재미를 다시 곱씹어 즐기며, 폴 지아마티 배우의 훌륭한 연기에 재차 빠져있다 보니 관람을 마친 후 내 마음은 지난 관람 때처럼 포근해졌다. 그제야 조금은 잠을 이룰 수 있었다.


 3시간쯤 잤으려나, 두 번째 식사 준비를 위해 분주해진 승무원들의 움직임에 잠에서 깨어났다. 내가 선택한 두 번째 식사 역시 한식, 쇠고기죽. 오래오래 미국 음식을 접할 것에 대비하는 마음으로 두 번의 기내식을 모두 한식으로 선택했다,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내딛기 전까지 한국인 정신을 완충시켜 두겠다는 마음과 함께. 기대와 달리 죽은 시큼 텁텁한 것이 영 맛이 없었지만, 소금과 후추의 덕을 보면서 나는 어떻게든 코리안 쏘울을 충전하고 있었다(앞으로 아시아나항공에서 쇠고기죽은 선택하지 않기로 해). 최후의 한식을 해치우는 동안, 창밖으로 새하얗게 밝은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한국 시간으로 새벽 3시를 넘긴 시간, 하지만 가까워진 서부 미국의 시간으로 오후 12시를 향해가는 시간. 창문을 열자 눈이 너무 부셔 차마 밖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였다. 밤의 시간을 그다지 누리지 못했는데 순식간에 아침 해가 밝은 느낌이랄까. 갑작스러운 푸른 하늘과 뭉게뭉게 피어난 하이얀 구름, 짙푸른 바다와 밝은 초록빛의 나무로 덮인 섬과 육지, 그것이 바로 2024년 5월 1일의 워싱턴주였다.

 맑고 푸른 하늘 아래 씨애틀 타코마 국제공항. 미국의 여러 공항이 열악하다는 수많은 평을 잊게 할 정도로, 이 공항은 깨끗하고 쾌적하며 모던한 환경을 보였다. 짐을 찾으러 가는 길 상단에 너무나 평범하면서도 성의 없어 보이는 환영의 문구 한 구절,

"Welcome to the United States"

하지만 이 문구는 적어도 나를 격하게 환영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 정도로 나는 감상에 젖어있었다.


‘내가 미대륙을 누비러 날아오다니…’

본격적으로 앞으로의 100여 일이 기대가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별 것 아닌 순간들에 쉽게 당황하기도 했다. 짐을 찾아 입국심사대를 향해 당당히 걸어갔지만, 심사대를 5m 정도 앞두고 여권을 찾지 못하는 내가 있었다. 크로스백 안에 넣어뒀던 것 같은데 없다, 면세품 쇼핑백에 들어있나 뒤져보았지만 역시나 없다, 방금 위탁수하물로 찾아온 배낭이나 캐리어 가방에 있을 리는 없다. 바지와 카디건의 주머니를 뒤져보아도 없다, 설마 비행기 선반에 두고 내린 걸까? 점점 머릿속은 복잡해지고 당황한 마음은 좀처럼 안정을 찾을 수가 없다. 그렇게 심사대를 바로 눈앞에 둔 상태로, 점차 입국심사관들이 나를 노려보는 것처럼 느껴지고,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이지 못한 채 1분을 넘게 식은땀만 흘리고 있는다.

다시 심호흡을 고르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내 제아무리 파이널 콜을 듣고 정신없이 비행기를 탔다지만, 무의식 중의 내가 그렇게 아무 데나 여권을 던져놓았을 리 없다. 어딘가 내 주변에 있을 것이다. 다시 잘 찾아보자. 탐색의 처음으로 돌아가 크로스백을 뒤져보는데, 잡동사니라든가 곧바로 버릴 쓰레기를 보관하는 크로스백 뒷주머니에 기내에서 챙긴 네댓 장의 냅킨 틈 사이로 파묻혀 있던 군청색 가죽 커버가 보인다.


‘어휴, 또 십 년 감수했다.’


비행기 탑승 때부터 파이널콜로 놀라더니, 이번엔 입국수속을 코앞에 두고 여권을 잃어버린 줄 알고 또 한껏 놀랐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그 수많은 속담들이 괜히 우리네 곁에 구전되며 머무는 것은 아님을 체감하는 순간이다.


 여권과 ESTA(Electronic System for Travel Authorization, 미국의 전자여행허가)가 있으니 이제 더는 두려울 것이 없다,며 당당히 찾아간 입국심사대. 한 남성 심사관에게 여유로운 ‘Hi, how are you?’를 던진 뒤 그의 응대를 기다린다.


“미국엔 뭐 하러 왔어?”

“여행! 나는 미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여행할 거야. 워싱턴주와 포틀랜드, 캘리포니아의 브루어리와 와이너리, 펍들을 구경할 예정이야. 페스티벌 몇 개랑 야구 관람도 하려고 해.”


“얼마나 있다가 돌아갈 거야?”

“대충 한 100일 정도? 그보다 며칠 더 있을 것 같아.”


“하지만 너에게 인가된 여행비자는 90일뿐인데 어떡하려 그래?”

“그래서 여행 중간에 캐나다를 다녀올 예정이야.”


“씨애틀에 숙소는 정해뒀어?”

“응, 오늘부터 3박 할 호텔을 이미 예약해 놨어.”


“한국에서는 무슨 일을 해?”

“나는 반도체 엔지니어야. 너도 잘 아는 S전자에서 근무했지.”


“돈은 얼마나 갖고 왔어?”

“지금 현찰은 $400 정도? 그리고 신용카드가 있어.”

“좋아.”


심사관과 나눈 대화는 이 정도였다. 당시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대화를 이어갔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면 한 마디만 대답을 잘못했어도 위험인물로 분류될 수 있는 외줄 타기 인터뷰가 아니었을까. 여행비자로 주어진 90일을 초과하는 기간 동안 여행을 한다니, 그것도 여행자 스스로 정확히 며칠인지도 모르는 여행을(실제로 이때까지 총여행일 수를 세어본 적이 없기도 했다). 나도 나지만, 그 심사관도 조금은 허술하지 않았나 싶다(혹은 너그러웠거나?). 그 덕분에 무탈히 입국 심사를 통과할 수 있었고, 나는 그에게 힘차게 ‘땡큐’를 외치며 캐리어를 끌고 입국장으로 유유히 사라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마주한 새로운 환영문구,

 “Welcome to Seattle”




 드디어 본격적인 나의 여행이 시작된다. 입국 수속을 마친 후에야 공항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씨애틀 타코마 국제공항 상공은 매우 쾌청했고, 덕분에 들이마시는 공기는 달디달았다. 예약한 숙소가 위치한 씨애틀 다운타운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공항에서 출발하는 전철 링크Link를 타야 한다. 다만 인천공항처럼 전철역까지 가는 길이 그다지 친절하진 않았다. 오르락내리락, 넓디넓은 주차장을 지나, 코너를 돌아, 걷고 또 걷다 보면 나타나는 전철역 씨택/에어포트SeaTac/Airport(여행기를 쓰는 지금에서야 그 이름의 유래를 이해한다. 씨애틀Seattle과 타코마Tacoma의 앞 세 철자를 따서 씨택이라고 줄여적은 것이다. 당시 나는 공항 근처에 씨택이라는 단체나 연구시설이 있는 줄 알았지 뭐람). 이 링크라는 전철을 타려면 일회용 회수권을 구매해도 되지만, 어차피 씨애틀 안에서 탑승하게 될 대중교통은 올카Orca(범고래의 영어 표현)라는 교통카드 한 장으로 계속해서 충전해 가며 이용할 수 있기에 이곳 공항역에서 바로 교통카드 올카를 구매하기로 결정한다. 올카의 판매가는 $3. 우리나라 교통카드 가격에 비하면 조금은 사악한 가격이긴 한데, 뭐 어쩔 수가 있나. 로마에 왔으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는 것을(하지만 이 사고방식은 여행하면 할수록 점차 비참함을 느끼게 했다). 근데 이때부터 미국 대중교통 시스템에 있어 이상한 부분을 하나씩 느끼기 시작한다. 이 전철역의 개찰구는 개방형이다. 그 어떤 바리케이드도 있지 않고, 전철 플랫폼에 다다르기 전에 복도 벽면이나 구석자리에 위치한 교통카드 리더기를 찾아가 자율적으로 태그 하는 식이다. 태그를 하는 사람이 없진 않다, 그렇다고 모두가 태그를 하진 않는다. 태그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뭘까? 몹시 의심스럽지만 누구보다도 큰 의심을 살 수 있는 동양인 여행자로서 난 위험부담을 갖지 않기로 마음먹고, 구매한 카드로 바람직하게 태그 한 뒤 전철을 기다린다.


 링크 공항역의 플랫폼은 지상에 위치해 있다. 공항건물만큼이나 꽤나 높은 곳에 설치된 플랫폼에서는 씨애틀도 아닌 타코마도 아닌 씨택이라는 작은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이미 비행기에서 느꼈던 것처럼 하늘은 푸르렀고 땅과 하늘 사이 몽실몽실한 구름들이 줄지어 있었다. 5월의 워싱턴주는 그렇게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날씨로 그날 여행자의 마음을 살랑살랑 들뜨게 했다.


 전철 링크의 내부구조는 우리나라 지하철과 유사하다. 몇 해 전 샌프란시스코를 여행할 때 탑승했던 바트BART는 열차 진행방향과 같거나 반대인 방향으로, 우리나라의 기차처럼 좌석이 이뤄져 있었는데, 이곳 링크는 한국의 지하철처럼 열차 측면에 탑승하여 측면으로 이동하는 식이라 이질감은 덜하다. 쾌청한 하늘과 초록빛 잎사귀가 돋아난 가로수를 넋 놓고 바라보며 이동하던 찰나, 열차 진행방향의 좌측으로 거대한 철골건축물이 나타났다. 티-모바일 파크T-MOBILE PARK라는 타이틀을 내비치는 그 건물, 보자마자 미식축구경기장이 아닐까 싶어 즉시 지도를 찾아본 결과, 그것은 내가 사랑해 마다 않는 야구장이 아니던가. 씨애틀의 메이저리그 야구단 씨애틀 매리너스Seattle Mariners의 홈구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와, 엄청나게 크다. 나 저기도 가볼 수 있을까?’


지난 미국여행은 한 겨울이어서 야구를 볼 기회가 없었지만, 이번은 정확히 야구를 볼 수 있는 시기의 여행이다. 씨애틀 매리너스에 대한 기대감을 품은 채 일단 이동한다.


 도심으로 들어선 전철은 어느새 깜깜한 지하에서 이동하고 있었다. 공항에서 30분 정도 이동해서 하차한 곳은 씨애틀 도심의 한 복판 심포니Symphony역. 짐이 많은 여행자로서 지하철역을 벗어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이용했는데, 현지인 아주머니 두 분과 맹인 안내견 한 마리가 나와 함께 탑승한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그 짧은 30초 내외의 시간, 분명 내 느낌에 두 분은 초면이신데 그 시간 동안 끊임없는 대화를 주고받는다. 안내견을 보고 떠오른 옛 반려견에 대한 얘기였는데, 그런 이야기로 처음 보는 이와 아무 부담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 더 나아가 엘리베이터를 내리면서 서로에게 잘 살펴가라며 인사를 나눈다는 점. 이런 부분에서 이미 난 미국인의 개방성과 유쾌함을 즐기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내게도 집에는 작은 강아지가 한 마리 있다며 그들의 대화에 끼고 싶었지만, 그땐 조금 용기가 부족했다. 흐뭇한 표정으로 두 아주머니를 보내드리며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선다. 그리고 그곳은 곧장 씨애틀 도심이다. 전철역이 위치한 언덕 중턱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씨애틀의 바다 엘리엇 베이Elliot Bay, 반대로는 올려다보이는 굽이친 씨애틀의 언덕들.

‘아니, 내가 벌써 여기에 와있다니…’

거진 9시간 만에 당도한 미국땅, 6시간을 걸려 찾았던 태국과 11시간을 걸려 찾았던 유럽을 떠올려보면, 9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도착한 미국은 너무나 우리와 가깝다고 느껴졌다. 그렇다면 어쩜 이 도시는 미국에서 가장 동양적인 도시이진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와 함께 내 무거운 짐들을 이고 지고 가파른 언덕을 올라 나의 첫 숙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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