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 - pt.2
호텔 도착 후 체크인을 마친 시각은 오후 2시를 조금 지난 때였다. 짐을 풀어헤치고 곧장 씨애틀 도심을 종횡무진하기에 딱 좋은 시간, 하지만 한국시간으로 환산하면 오전 6시. 안 그래도 비행기에서 3시간쯤 잤나 싶은데, 이 정도면 거의 뜬눈으로 밤 지새운 것과 다름이 없지, 지금 생각해도 하품이 나올 정도로 졸리운걸. 결국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짐을 풀고 씻자마자 이불속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5월 초의 시애틀은 그다지 따뜻하지 않았기에(실제로 그날 최고 기온이 섭씨 14도에 불과했다) 이불속은 편안했고, 계획 없는 P 여행자의 특성상 이제부터 어디를 어떻게 여행할지 정보를 찾아야 하는데… 구글링을 하다가 그만 잠들어버렸다. 한두 시간만 자면 컨디션이 여행하기에 딱 좋지 않을까 싶어 청했던 낮잠, 하지만 눈 떠보니 오후 7시. 출발 전 공항에서부터 꼬인 나의 여행은 이렇게 또 꼬여가는구나, 싶은 마음으로 서둘러 짐을 챙겨 호텔을 나선다.
여행 첫날이지만, 아니지, 여행 첫날이니까? 당장 현지 맥주를 마셔야만 한다! 하지만 어디서 어떤 맥주를 마실 것인가? 사전에 씨애틀 맥주양조장 정보를 수집해 놓았는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작정 구글맵에 의존해서 검색하며 다닐 것인가? 그것도 아니었다. 다만 내게는 <미국 서부 맥주 산책>이라는 든든한 책 한 권이 함께하고 있었다. 맥덕(맥주덕후의 준말)들 사이에서는 꽤나 저명한 ‘학저비’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이현수 작가의 2018년 미국 서부 맥주여행기. 이현수 작가는 여행 당시 씨애틀에서 시작하여 포틀랜드를 거쳐, 쌘프란씨스코, 로스앤젤레스, 쌘디에고에 이르는 루트로 이동하며 미국 웨스트 코스트West Coast의 숱한 유명 브루어리를 다녔는데, 이 코스가 나의 여행 전반부 계획(계획 없다더니?)과 유사하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그의 발자취를 그대로 쫓아보기로 마음을 먹고 책을 챙겨 왔다. 그의 여행기에 따르면 씨애틀 도심에도 가볼 만한 브루어리가 여럿 있었지만, 이미 낮잠으로 저녁을 빼앗긴 현재 나에겐 숙소와 가깝고도 가장 늦게까지 영업하는 가게가 필요했기에, 곧 나의 결정은 도보로 20분 정도 떨어진 두 개의 양조장으로 축소되었다.
일단 호텔 주변을 살피며 한발 한발 여행자 모드로 걸어본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서 마주치는 퇴근하는 직장인, 강아지 산책시키는 주민을 두어 명 마주하며 평일 저녁이 그리 붐비는 동네는 아님을 직감할 수 있다. 현찰을 챙기기 위해 잠깐 은행을 들러 ATM 기기를 이용한 뒤, 곧장 브루어리를 향해 경로를 설정한다. 처음엔 워싱턴주에서 가장 많은 생산량을 자랑한다는 엘리씨안 브루잉Elysian Brewing을 목적지로 정했다가, 시계를 보고는 영업시간이 30분 더 늦게 끝나는 레드훅 브루랩Redhook Brewlab으로 변경한다. 아주 조금이라도 더 여유롭게 마시고 싶었다랄까?
저녁 무렵 5월의 씨애틀은 내게 모든 것이 낯설면서도 미국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어 걷는 내내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경사진 언덕길, 모퉁이 작은 피자집, 육교 아래 교차로 속 빽빽한 퇴근길 자동차들까지, 모든 것이 내가 타지에 와있음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걸었을까, 저녁 8시가 된 시간이지만 하늘은 여전히 파랗다. 그리고 그 하늘아래 레드훅 브루랩을 품은 파이크 모터웍스 빌딩Pike Motorworks BLDG.이 웅장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레드훅 브루랩은 1981년 설립된 씨애틀 발라드 지역의 맥주양조장 레드훅 브루어리Redhook Brewery의 실험적 성격을 띤 소규모 양조장이자 탭룸Tap Room(맥주를 케그에서 탭으로 바로 추출하는 드래프트 비어, 이른바 생맥주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씨애틀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으로써 대규모 공장이 아닌 지역 내에서 이웃처럼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게끔 도심 속에 자리한 자그마한 공간이다. 현재는 이들의 실제 공장이 워싱턴주 씨애틀이 아닌 오레건주 포틀랜드에 위치하고 있다 하니, 이제 씨애틀에서 가장 오래된 크래프트 맥주 브랜드를 즐기려면 이곳 레드훅 브루랩에 와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 브루랩도 2010년에 오픈했다 하니, 이곳만 해도 이미 14년의 역사를 가진 장소였다.
길 건너편에서 전체적인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며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맥주가 가득한 브루어리가 눈앞에 놓여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입에 침에 고이는 일인가? 건물 앞은 벤치와 테이블로 파티오를 이루고 있고, 입구 바로 앞에는 그라피티로 무장한 대형 발효조가 맥주양조장임을 상징하고 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서는 내부 전경을 구경하느라 또 넋을 잃는다. 따스한 노오란 조명 아래 나무와 벽돌을 소재로 감각적으로 꾸며진 인테리어, 쿰척쿰척 몸을 들썩이게 하는 음악과 여러 스크린을 통해 보이는 미국의 스포츠들, 가지런히 수 놓인 생맥주 탭과 도무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맥주 메뉴 스크린까지.
마, 이게 미국 맥주양조장이다!
규모가 아주 작은 공간은 아니어서 내부 깊숙이까지 구경하고 싶었으나, 그날 저녁은 행사로 일부 공간이 대관 중인 상황이었고, 나머지 곳곳 구경을 마친 뒤 야구와 농구 중계가 바로 보이고 수많은 탭이 눈앞에 놓인 바 자리를 선택했다.
주문을 위해 탭 리스트 메뉴를 바라보니 총 17종의 맥주가 소개되어 있다. 와, 생맥주만 17종이라니, 행복한데 시간이 모자라다! 직원에게 문의하니 6종 씩 소량 시음이 가능한 테이스터 플라이트Taster Flight(한국의 샘플러 개념) 주문이 가능했고, 주문용지에 직접 수기로 작성해오라며 종이를 한 장 건네받았다. 보통 한국의 맥주집에서는 샘플러도 맥주 메뉴가 미리 정해져 있기 마련인데, 미국은 대부분 그렇지 않다. 백지를 한 장 주며 소비자가 그때그때 원하는 플라이트를 만드는 방식이라, 배스킨라빈스31처럼 고르는 재미가 있는 편이다.
책을 통해 레드훅의 대표맥주로 소개받은 롱 해머 IPALong Hammer IPA, 빅 발라드Big Ballard는 기본적으로 작성해 주고, 이들을 기본으로 조금씩 비틀어 만들었을 법한 이름들을 나머지 칸에 작성해 보았다.
1. Long Hammer
2. Big Ballard
3. Big Red Ballard
4. Tropical Big Ballard
5. Big Juicy Ballard
6. Hazy Big Ballard
발라드Ballard는 씨애틀 도심에서 북서쪽에 위치한 동네의 이름인데, 이곳은 지금 우리의 성수동이나 익선동처럼 옛것과 현대적인 것들이 어울린 힙한 동네로 여겨지고 있다. 레드훅 브루어리가 처음 양조장을 지은 동네가 바로 발라드였기에, 동네의 이름을 넣어 빅 발라드라는 간판 IPA를 만들었고, 그 뒤로 조금씩 레시피에 변화를 주어 발라드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IPA 시리즈를 만들어 온 것이다. 레드훅의 대표 IPA를 플라이트 1, 2번으로 채워 넣으니, 워낙 높은 IPA의 도수와 바디감을 고려해 뒤따르는 맥주들 역시 모두 IPA, 아니 모두 발라드가 된다. 이게 아닌데, 내 맘은 이게 아닌데… 처음엔 가벼운 맥주로 시작하고 싶은 맘이었는데…
카운터에서 종이를 돌려주며 결제를 하려는데, 직원이 대뜸 내 ID를 원한다. 우리나라 편의점 알바들처럼 얄짤없이 확인하는 절차인가 싶다가도, 이상하다. 내 앞사람은 확인 안 한 것 같은데… 가방에서 여권을 꺼내 건네주면서 슬쩍 물어본다.
“Do I look young?”
여권에서 1987년을 확인한 그녀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미안하다 하며 바로 주문을 받아준다. 나 역시 얼마만의 민증 검사인가 싶어 고마운 마음과 함께 ‘땡큐’를 외쳤다지.
곧이어 부리나케 맥주를 따른 그녀가 나에게 선사한 IPA 6종 플라이트, 반갑다! 알곤 있다만 여섯 가지 IPA가 모두 색이 다른 것이 또 색다르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이제 하나하나 맛을 보자.
라구니타스의 IPA가 생각나는 맛, 쓴맛이 다소 있지만 좋은 밸런스와 음용성을 가졌다
바디감이 낮아 음용성은 좋지만 쓴맛과 향미가 강렬한 더블 IPA
색만큼이나 진한 바디와 몰티함,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향에 주력메뉴는 아닌 듯
냉철하게 맛을 평가해 보겠노라고 달려들었으나 역시나 기본기가 확실한 미국의 맥주들, 세 잔 밖에 마시지 않았지만 셋 다 이미 훌륭하구나. 그런데 빈속에 맥주만 연거푸 들이켜다 보니 슬쩍 위장이 놀랜듯하다. 역시 안주가 필요했어. 다행히 이곳 레드훅 브루랩엔 코오보KŌBO라는 일본인의 피자집(?)이 함께 자리한다. 혼자 피자 한 판을 다 먹기엔 부담스러워 적당히 샐러드Cabbage Salad를 주문했는데, 이게 웬걸? 양배추 적당히 썰어서 내어주는 샐러드일 줄 알았건만, 웬 배추 겉절이를 내오는 게 아닌가? 아, 일본인의 피자집답다. 샐러드의 외관에서 다소 놀랐다만, 입안에서는 맛있어서 또 다른 놀라움이 이어졌다. 아니, 이 마라장 같은 비주얼의 소스가 이렇게나 감칠맛이 터질 일인가? 예상외의 겉절이가 맛있어 미소를 참지 못하고 아삭아삭 우걱우걱 씹어 삼키던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자, 그럼 다음 맥주로 건너가 보자.
정말 열대과일을 넣은 거니, 용과와 패션프룻의 향이 은은하게 풍기면서 끝맛 쌉싸름한 홉의 뉘앙스가 살아있네, 가벼운 바디는 아쉽다
정말 주스라고 해도 믿을 듯, 사과주스 같은 외형에 살구 같은 핵과류 의향이 맴도는 풍미가 매력적
생각보다 헤이지하지 않은 외관에 아쉬웠지만, 입안에서는 충분히 헤이지하면서 호피한 예상외의 복병
뉴잉글랜드 IPA(이하 뉴잉)가 유행인 트렌드에 맞게끔 다양한 뉴잉을 만들고 있었지만, 전부 다 같은 결이 아니라는 점에서 조금은 깨달음을 얻었다. 더불어 조금 모자란 탄수화물을 챙겨보고자 코오보에서 테이터 탓츠Umami Tater Tots를 주문했는데, 이름에 드러난 것처럼 감칠맛이 자연스레 돌아 금세 맛있게 먹어치웠다. 일본인의 피자집, 과연 훌륭하다. 다음엔 꼭 피자를 맛보러 와야지.
어느덧 시간은 밤 10시. 생각보다 이른 마감 준비에 추가 주문은 포기하고 쇼케이스 냉장고 앞을 기웃거려 본다. 투고To go로 가져갈 만한 맥주가 있진 않은지 살펴보다, 시간이 짧아 레드훅을 완전히 느껴보지 못한 것 같은 아쉬운 마음이 들어 발라드 시리즈 두 캔을 집는다(아, 물론 취기가 확실히 덜하기도 했고…).
자리에서 짐을 챙기고 외투를 입는데, 내 뒤편 테이블에서 여자친구와 함께 있던 한 남성이 그녀가 화장실을 간 틈에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인사말과 함께 말을 걸어온다. 어디서 어쩐 일로 왔냐는 그의 질문에 여행 첫 일정인 나의 상황을 설명했더니, 갑자기 그는 그의 여행시절이 떠올랐는지 자신의 유럽여행 시절을 한참 얘기하면서 갑자기 지갑을 꺼내드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이것은 본인의 작은 호의라며 $5짜리 지폐를 한 장 나에게 주려 한다. 아니, 나 거지 아닌데..? 괜찮다며 괜찮다며 한사코 거절했지만 그 친구의 얼굴에 진심으로 받아주기를 원하는 표정이 보여 그만 그 돈을 받고 말았다(난 분명 구걸한 적 없다). 그러면서 그는 나의 여행기가 궁금할 것이라며 인스타그램 계정을 교환하고 분명 그 자리에서 서로 팔로우했었는데, 왜인지 지금은 보이지 않네? 여하간 그 유쾌한 청년은 나와 포옹까지 해가며 나의 여행을 진심으로 응원해 주는 모습을 보였다. 처음 보는 한국인에게 이렇게나 마음을 써주다니. 썩 괜찮은 여행 첫날이 아닐 수 없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그 늦은 밤에 줄 서서 사 먹는 아이스크림집 쏠트앤스트로Salt & Straw가 나를 유혹했지만, 줄을 섰다가 왠지 모르게 먹고 싶지 않아 져 그냥 나왔다. 뚱뚱이 미국인들처럼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어서였을까, 하지만 이제와 다시 찾아보니 그 가게는 아이스크림 맛집이니 부디 다른 사람들은 나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길 바란다(적어두세요, 솔트앤스트로. 진짜 맛있어 보이긴 했음).
숙소에 돌아와 씻고 잠에 들긴 했다만 시차적응이 되지 않은 탓인지 새벽 4시쯤 절로 눈이 떠진다. 아마도 한국시간으로 늦은 저녁쯤이었으려나. 도심 속 호텔은 방음도 잘 되지 않아 창밖으로 다양한 도시의 소음이 흘러들어온다. 노랗게 환한 가로등과 조금씩 파랗게 밝아지는 새벽하늘이 보이는 창밖을 바라보며, 쎌린 디온Céline Dion과 클라이브 그리핀Clive Griffin이 함께 부른 'When I Fall In Love'를 반복해 들으며, 그렇게 씨애틀의 첫 번째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