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다카히로가 눈을 떴을 때,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링링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테이블 위에는 그녀의 책만 보였다. 그는 마당을 바라보았다. 마당 앞에서 작은 탑이 있었다. 누군가를 추모하는 탑인 것 같았다. 그는 탑 앞으로 걸어갔다. 3층으로 된 탑이었다. 탑층마다 끝에는 풍경이 달려있었다. 그중에서 손잡이가 달린 풍경을 흔들었다. 소리가 은은하게 집 안에 울려 퍼졌다. 아름다웠다. 잠시 뒤, 들어올 때는 보이지 않았던 우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우물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석처럼 어떤 힘이 그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우물 안은 맑고 투명했다. 손을 뻗으면 우물 속 물이 만져질 것만 같았다. 목이 말랐다. 그는 줄이 달린 바가지를 우물 속에 던졌다. 그리고, 천천히 바가지를 끌어올렸다. 바가지에 물이 철렁이면서 위로 올라왔다.
누군가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누군가 다카히로를 밀었고 그는 균형을 잃고 우물 속에 빠졌다. 육중한 몸이 빠지자 우물속 물이 솟구쳐 올랐다. 우물 깊이 내려갔다 수면 위로 올라온 그는 온몸으로 바둥거렸다. 둥근 벽면에 두 손을 뻗어 지탱하려 했지만 잡히지 않았다. 우물 안은 생각보다 컸다. 두 사람이 함께 팔을 벌려야만 닿을 수 있는 크기였다. 침착하게 한쪽 벽면으로 헤엄쳐갔다. 다행히 함께 떨어진 바가지 줄을 찾았다. 이미 수차례 물을 먹은 뒤여서 정신이 혼미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우물 위를 쳐다보았다.
조금 전 파란 하늘이 물러나고 먹구름이 짙게 깔렸다. 바깥세상이 바뀐 것 같았다. 그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는 두려웠다.
"내가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면 물에 빠져 죽은 시체로 떠오를까?"
몸이 점점 차가워졌다. 분명 바깥은 봄 날씨였는데, 우물 안은 점점 추워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분노가 치밀었다. 누가 자신을 여기에 밀어 넣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분노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간절함으로 바뀌었다. 그는 줄을 당겨 올라갈 수 있을지 가늠해보았다. 생각보다 줄이 튼튼했다. 바가지 위로 두 발을 지탱하고 두 손으로 줄을 잡고 올라갔다. 몇 번이고 미끄러졌지만 끝까지 버텼다. 간신히 손을 뻗어 우물 턱을 잡았다.
그는 고개를 내밀어 우물 밖을 보았다. 우물에 빠지기 전에 들어왔던 바깥 풍경이 아니었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집이었다. 일본 군복을 입은 남자 세 명이 보였고, 엄마와 여자아이가 안채 방 문짝을 붙잡고 버티고 있었다. 살찐 일본군 한 명이 총개머리판을 내리치자 방문짝은 산산조각 나버렸다. 엄마는 더 이상 붙잡을 게 없었다. 아이는 엄마 옷고리를 꼭 움켜쥐었다. 엄마는 두 손을 모으고 일본군에게 간청하며 말했다.
"제발, 딸아이만은 건들지 마세요. 제발요"
하지만, 그들의 색욕은 이미 자신들을 집어삼킨 뒤였다. 족제비처럼 생긴 일본군이 총을 내려놓고 엄마의 손을 붙잡았다. 깡마른 일본군은 엄마의 목덜미를 잡고 방에서 끄집어내었다. 살쾡이가 토끼 목을 물고 이빨로 숨통을 끊어 놓듯 엄마의 목덜미를 흔들었다. 여자아이는 방 안에서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마당으로 끌려 나온 엄마는 격렬하게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온몸에 힘이 빠진 엄마의 양손을 족제비처럼 생긴 일본군과 살찐 일본군이 붙잡았다. 깡마른 일본군이 침을 흘리며 엄마에게 다가갔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 표독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엄마의 윗옷을 거칠게 벗겨냈다. 볼록한 배가 나타났다.
엄마가 아이를 가진 사실을 발견한 깡마른 일본군은 한치의 자비도 없었다. 거친 숨소리와 악취가 진동하는 얼굴을 다시 들이밀었다. 엄마는 순간 몸을 일으켜 깡마른 일본군의 귀를 힘껏 깨물었다. 깡마른 일본군은 피 터진 귀를 붙잡고 괴성을 질렀다. 엄마를 붙잡고 있던 두 일본군도 놀라서 주춤하자, 엄마는 그 틈에 일어났다. 그리고, 방 안에서 달려 나온 딸아이 손을 붙잡고 우물가로 달려갔다.
귀를 붙잡고 신음하던 일본군은 총을 들고 엄마를 조준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울리고, 총알이 엄마의 어깨를 관통했다. 엄마는 휘청거렸고 우물 앞에 쓰러졌다. 엄마는 우물 턱을 붙잡고 필시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엄마는 다카히로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손을 뻗어 다카히로의 손을 붙잡았다. 다카히로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엄마와 함께 다시 우물 안으로 떨어졌다.
맑고 투명했던 우물 안은 그녀 몸에서 흘러나온 피로 붉게 물들었다. 다카히로는 놓쳤던 그녀 손을 다시 잡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는 어떤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한 손에는 밧줄을 잡고 한 손으로 죽어가는 그녀를 붙잡았다. 그는 그다음 상황을 떠올리기 싫었다.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시간은 1937년 12월 13일, 중국 난징 교외에 위치한 집이었다. 일본이 중국 난징을 함락한 날이었다. 일본군의 끔찍한 살육과 욕정과 발광이 난무하던 시기였다. 엄마와 어린 딸이 있는 집에 일본군이 들이닥친 것이다.
"바보 같은 놈, 제대로 잡고 있어야지"
깡마른 일본군이 동료에게 말했다. 세 명의 일본군은 딸아이에게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저씨는 너를 해치지 않아. 맛있는 찐빵 줄게"
딸아이는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머릿속이 새하애진 채로 엄마가 떨어진 우물 속을 쳐다보았다. 일본군이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딸아이는 한 걸음씩 우물로 향했다. 순간 일본군이 달려오자 딸아이는 우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죽어가는 여자 위로 또 하나의 생명이 떨어졌다. 그는 엄마와 줄을 모두 놓쳐 버렸다. 죽어가던 여자는 방금 떨어진 생명이 자신의 딸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분명히 어떠한 힘도 남아 있지 않았던 여자였지만 엄마는 딸아이를 끌어안았다.
또다시 총성이 들렸다. 이번 총성은 우물 안에 울려 퍼지면서 마치 대포소리 같았다. 총알이 물속을 뚫고 들어왔다. 다카히로는 살기 위해 물속으로 몸을 숨겼고, 엄마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아이를 안고 물속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엄마는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아이를 살리기 위해 몸부림쳤다. 총알이 물속을 뚫고 엄마의 몸을 뚫었지만 아이의 몸은 피해 갔다. 우물 속에는 붉은 액체가 멈추지 않고 쏟아졌다. 엄마는 다카히로에게 아이를 부탁하는 눈빛을 보내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물 위로 떠올랐다. 일본군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시체 위로 몇 발의 총알을 더 쏘았다.
"그만해, 다른 집에 가면 더 예쁜 여자들이 있을 거야"
일본군은 총을 거두고 집 밖으로 나갔다. 다카히로는 아이와 줄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아이는 다행히 정신을 잃지 않았다. 다카히로는 아이에게 자신의 목을 잡으라고 손짓하고 줄을 다시 당겼다. 정신을 잃고 떨어질 뻔했지만 그는 끝까지 놓치지 않았다. 우물 밖으로 목을 내민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카히로가 우물에 빠지기 전에 들어왔던 바깥 풍경은 분명 아니었다. 그는 지금 이 곳이 언제이고 어디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숨을 곳을 찾아야 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식량을 보관하던 지하 곳간을 찾았다. 그곳에 들어가 마대자루를 깔고 아이를 눕혔다. 아이의 얼굴에서 자신의 딸아이 '이예스'의 얼굴이 보였다. 깜짝 놀라 다카히로는 뒤로 물러섰다. 아이는 아직도 눈을 뜨지 못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