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태도 04
연봉 협상 자리에 처음 앉았을 때,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인사담당자가 "올해 처우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숫자를 내밀었다. 나는 잠깐 멈칫하다가 "네, 알겠습니다"라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후회했다. 더 말할 수 있었는데. 아니, 말했어야 했는데. 그런데 왜 못 했을까. 준비를 안 해서? 말주변이 없어서? 둘 다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숫자가 적당한 건지 내가 확신이 없었다. 내가 그만한 값어치가 되는 사람인지, 스스로도 잘 몰랐다. 그러니 입이 열릴 리가 없었다.
그 뒤로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 협상 자리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나왔다는 사람, 숫자를 받아들고 집에 와서야 화가 났다는 사람, 매년 그냥 통보받는 것 같다는 사람. 이유는 저마다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보였다.
자신이 얼마짜리인지 스스로 모른다는 것이었다.
연봉 협상을 잘 못 하는 사람들을 보면 흔히 '소극적인 성격'이나 '협상 스킬 부족'을 원인으로 꼽는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자신의 가치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확신이 없으면 숫자를 입 밖에 내는 순간 불안해진다. 혹시 너무 높게 부르는 건 아닐까, 거절당하면 어떡하지, 괜히 분위기 나빠지는 건 아닐까. 그 불안이 목소리를 낮추고, 시선을 내리깔게 만든다. 상대는 그걸 느낀다. 협상은 말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기울어져 있다.
한 선배가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협상 테이블에서 떨리는 건 당연해. 근데 나는 적어도 내가 왜 이 숫자를 요구하는지는 알고 들어가. 그게 전부야."
그 말이 오래 남은 건, 협상을 잘하는 비결이 말솜씨가 아니라는 걸 짚어줬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일을 해왔고, 무엇을 해결했고,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 그걸 스스로 정리하고 믿는 것. 그게 먼저다.
회사는 직원의 가치를 최대한 낮게 책정하려는 게 아니다. 정확히는, 스스로 값을 매기지 않는 사람에게 굳이 높은 값을 쳐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협상이란 결국 내가 제시하는 가치를 상대가 납득하는 과정이다. 내가 먼저 납득하지 못하면, 상대를 납득시킬 수 없다.
자신의 가치를 먼저 믿지 않으면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이건 협상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느냐의 문제다.
연봉 협상은 매년 돌아온다. 다음 자리에서는, 적어도 내가 왜 이 숫자를 말하는지 알고 앉아 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