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읽기, 2016년 1월 29일] by 프로기
"토사구팽 김종인, 투사로?" by 프로기
1. 이슈 들어가기
더민주당에선 김종인 씨를 비대위원장으로 취임하고 문재인 대표가 물러났습니다. 최근 정치 상황을 전반적으로 다루고 싶었지만, 김종인이라는 인물이 무척 흥미로워서 이번에는 이 인물을 조명해보려고 합니다. 국보위 이력, 재벌 개혁 추진, 경제민주화 세 가지 꼭지로 다루고자 합니다.
2. 이슈 디테일
a. 인물 조명
김종인. 1940년 7월 11일, 서울특별시
김종인 씨는 본인이 평생에 걸쳐한 일을 다 기억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국 정치 내에서 굉장히 많은 역할을 맡았던 인물입니다. 가장 두드러지게 이야기되는 꼭지들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b. 국보위 참여하지 않았느냐
김 위원장은 서강대 교수였던 1980년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의 국보위에 참여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전두환 정권에서 두 차례(12·13대) 민정당 비례대표 의원을 지냈다. (후략)
[조선일보, 2016년 1월 18일] 여야에서 동시 공격받는 김종인 위원장.. 국보위 참여, 비리 구속 전력 논란
프로기: 김 위원장은 기자간담회에서 '국보위 참여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해서 더욱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이후에 비난이 거세졌고, 사과한다는 뜻을 곧바로 전해 논란은 우선 종식되었습니다. (국민의당 한상진 공동 창당준비위원장의 저격 발언이 같은 당 윤여준 의원도 저격해버려서 더 말할 수도 없었어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참여 경력에 대해 입장 발표를 했었는데 아직 논란이 있다.
“국보위가 성립된 과정에서 나타난 제반 사항에 대해서는 저 자신도 철저히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입장이 확고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런 일이 발생해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는데, 저도 다른 분과 마찬가지로 절대 있어선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제가 전문성 때문에 (국가보위)비대위에 참여하게 됐는데 광주의 그 당시 상황을 경험한 분은 부정적으로 생각하시니 제 경력이 광주 여러분에게 정서적인 문제를 야기한 것 같다. 왜 잘못을 고백 안 하냐 하는 거는 광주분들에게 대단히 죄송하단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대한민국이 1987년 개헌을 하고 민주주의로 탈바꿈하는 과정인데 그 정신을 받들어서 앞으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 최선을 다해서 보답하겠다.”
[경향신문, 2016년 1월 27일] 김종인 “비대위원은 정책 능력과 지역 고려” “국보위 참여 전력은 대단히 죄송”
프로기: 국보위는 한국에서 깊이 반성해야 할 아픈 역사입니다. 그런데 김 위원장이 국보위에 참여한 배경을 역사적 사실로 두고 보면,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라는 발언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국보위 참여의 배경에는 부가가치세 철폐 시도와 관련이 있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의 회고록, 경제개발의 길목에서에 따르면 당시 영수증 발행이 의무화되지 않는 상황에서 간접세가 난립하며 인정과세의 문제가 발생하였고, 70년대 중화학공업을 키우기 위한 재원 마련 차원에서 정부는 부가가치세 도입 연구를 하였는데 이 연구에 김재익 전 경제수석과 함께 국내에 몇 안 되는 재정학 전공자로서 김종인은 참여하였다. 그는 한국의 현 상황에서 부가가치세의 도입은 이르고 그보다는 사회안정화 정책이 필요하다고 보아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한다. 그러나, 1978년 부가가치세가 도입이 되고,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이 신민당에 득표율이 1.1% 뒤지는 민심 이반이 나타났다. 이후, 국보위에서 부가가치세 폐지를 위한 전문가를 구하는 과정에서 부가세 도입 반대론자였던 그를 찾았고, 그는 정권이 바뀌는 진통을 겪으며 어렵게 도입한 부가가치세 철폐가 또 다른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 여겨 이를 막기 위해 국보위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국보위의 재무분과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여 재무분과위원회 간사인 군인 출신 이춘구 씨의 반발을 무릅쓰고 전두환 국보위원장에게 직언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여기서 더 나아가 국보위 회의 중에 경제 안정화 정책을 주장하였고, 나중에 안정화 시책으로 노동법과 노사관계법, 기업 지배구조를 바꾸기 위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올렸다.
(요약 출처: 나무위키 김종인)
프로기: 그래서인지 전문위원으로 참여한 것에 대해서 5.18 3단체도 문제 삼지 않겠다고 공식 발표가 있었습니다. 이때 강직함을 계기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눈에 띄었다고 합니다. '국보위' 이력 뒤에 숨겨진 내용인데요.
"1980년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의 국보위에 참여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조선일보, 2016년 1월 18일] 여야에서 동시 공격받는 김종인 위원장.. 국보위 참여, 비리 구속 전력 논란
프로기: 영화 <내부자들>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틀린 말은 없지만 전후 사정을 따져보았을 때, 신군부의 비민주주의적 폭력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인물이 아니라, 경제 정책을 안정시키려는 전문가로 참여한 인물에 불과한데요. 볼드 처리한 대목처럼 요약하니 앞잡이같은 인물로 비치는 효과가 있죠.
물론 김종인의 경제 정책 성과에 대한 비판론도 있습니다. 유창선 시사평론가의 입장은 다시 조선일보로 돌아가는데요. 어쨌거나 국보위에 가담했다 vs 내용이 그렇지 않았다 로 갈리면 끝이 없을 모양입니다.
경제민주화 조항을 도입한 '저작권' 소유자로서 재벌 개혁과 사회 양극화 극복을 주장하는 선두주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군사독재 정권에 부역했을 뿐이며 경제민주화 조항 및 의료보험제도 도입 주장 역시 외적인 조건을 반영해 따져 봐야 하는데 자신의 업적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유창선 시사평론가는 자신의 칼럼에서 "군사반란을 하고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들어선 것이 신군부의 국보위"였다며 "(김 전 의원은) 부가세 폐지를 막기 위해 국보위에 참여했다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잘못한 것이 없었다는 얘기이다. 아무런 반성조차 없는 전두환 국보위원 출신 인사가 어느 날 갑자기 제1야당의 점령군이 된 듯한 이 광경이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이라고 꼬집었다.
[미디어오늘, 2016년 1월 22일] 판 흔드는 김종인, 팀 짜놓고 인선 끝냈다?
c. 재벌 개혁 추진
프로기: 조선일보가 이렇게 날을 세우는 이유는 김종인의 키워드가 '재벌 개혁'이기 때문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김 위원장은 '경제민주화'를 처음 제안한 사람으로 꼽힘니다. 김 위원장은 이후에도 전문가로서 꾸준히 재벌 개혁 방향으로 경제 정책을 제안했는데요. 이제 더민주당의 박영선 의원과 함께 재벌 개혁에 박차를 가하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위기에 빠진 더불어민주당의 구원투수로 나선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경제민주화의 상징'으로 불린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헌법 개정을 마련할 당시, 헌법 119조 2항에 경제민주화 항목을 포함시키도록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설득시켰다는 일화에서 유래한 별명이다.
노태우 정권에서 기록적인 부동산 가격 급등 사태가 빚어지자 경제 분야 전권을 약속받고 청와대에 입성해 대통령비서실에서 만든 5.8조치는 지금도 가장 강력한 재벌규제 조치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김 전 수석은 당시 부동산 급등 원인을 기업의 무분별한 투기로 지목하고 공급량 조절을 위해 재벌들의 비업무용 부동산을 강제 매각시키는 5.8조치를 통해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켰다.
성장과 개발이 키워드였던 시대에서 독특하게도 국가의 적극적인 시장개입을 통한 시장 통제 정책을 사용하면서 당시 재벌들과 큰 마찰을 빚기도 했다.
당시 전경련 회장을 지낸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사사건건 충돌한 비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매 정권, 특히 IMF 같은 경제위기 때마다 경제수장으로 물망에 오르면서도 번번이 고배를 마신 것도 재벌들의 강한 반발 때문이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문재인 대표가 김 전 수석의 영입을 소득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주장한 것도 이 같은 이력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경제정책과는 반대로 정치적 행보는 보수정당 쪽에 있을 때가 많았다.
[노컷뉴스, 2016년 1월 14일] 더민주 구원투수 김종인, 경제 민주화·재벌개혁의 상징
프로기: '재벌 개혁'을 주 무기로 삼은 김 위원장. 과거에도 그 무기가 자신에게 해를 끼치기도 했는데요. 더민주당 입당 이후, 여야 그리고 언론에서 비판하는 것이 '경제수석 시절에 안영모 동화은행장으로부터 2억 10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돼 의원직을 상실했다.'라는 내용이 그 과거입니다. 그런데 이는 정치자금이었지 개인 돈이 아니었다고 후에 밝혀집니다. (여기서 또 <내부자들>이 생각나네요. '박근혜 대통령 대선 자금 - 성완종 게이트' 사건도 생각나고요.) 그런데도 징역형을 받게 된 배경에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눈엣가시여서 처벌받았다는 카더라가 유명합니다.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은 김종인 의원(무소속)과 안영모 전 동화은행장에게 징역 6년이 각각 선고됐고 ( 중략: 00비리사건은 누가 형을 받았다 내용 이어짐) 그러나 검찰의 사정수사는 ‘표적’을 미리 정해두고 이루어져 왔다는 시비를 끊임없이 불렀다. 사정의 화살이 일부 과거 김영삼 대통령에게 적대적 태도를 취했던 인사들을 선별적으로 겨냥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특히 동화은행 비자금 수사에서 검찰은 지난해 대선에서 여권의 ‘돈줄’ 노릇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이원조 전 민자당 의원의 출국을 사실상 방조해 그 한계를 남김없이 드러냈다.
[한겨레, 1993년 12월 11일] 93사건 그 후 잇따른 검찰 사정수사 ‘성역’에 칼 ... ‘선별겨냥’ 눈총도
김환태 : 동화은행 비자금과 김영삼 대통령 간에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함승희 전의원 : 관련이 있었던 것보다 김영삼 대통령이 거악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정권비리의 핵심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는데 대상이 이원조 전 의원이었어요. 당시 이원조 의원은 노태우 정권 대선자금 조달에 이어 김영삼 정권 대선자금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소문났었기 때문에 이원조 의원을 지목한 거지요.
이원조 전 의원이 누구입니까. 금융계의 황제로 소문난 사람 아닙니까. 그렇다면 은행권과 관련이 있겠다 싶어 은행관련 정보철을 뒤적거려보니까 92년 2월 '안영모 동화은행장 연임에 말썽, 직원들시켜 시중 백화점,호텔등에서 영수증을 대량으로 모아'라는 내용이 있어 바로 이것이다 생각했습니다. 영수증을 모아 판공비를 쓴 것처럼 비자금을 조성했고 비자금을 행장연임 로비용으로 썼다는 추론이 가능했지요. 로비를 했다면 금융권 황제인 이원조의원이 관련되었을 것으로 본 것입니다.
93년 4월21일 안영모 동화은행장을 전격 소환하여 조사해보니 이원조 의원뿐만 아니고 이용만 전재무장관,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현우 전 청와대 경호실장외 차관급등 거물들 상당수가 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어요.
(중략: 당시 정치인 관계도) 특히 이원조의원을 사법처리해야 한다고 강력 건의하자 청와대 김영수 민정수석이 '선물증 후소환'논리를 내세우며 '물증이 없으면 진술만 가지고 현역의원을 조사하지 못한다'고 제동을 걸고 민주계 실세등 여기저기서 회유와 협박이 들어와요.
김환태 : 그래서 결국 이원조의원 수사를 못하고 미완의 수사로 끝난 것입니까?
함승희 전의원 : 아닙니다. 물증을 물고 늘어지기에 '좋다 그러면 반드시 증거를 잡겠다'고 결심하고 단독으로 과거 데리고 있했던 수사관들을 불러 모아 수표추적에 나섰습니다. (중략:무용담)
수표추적을 하다 보니 1억 원짜리 수표가 상업은행 효자동 지접 '청송회'명의 단체 계좌로 입금이 된 거예요. 놀라운 것은 그 계좌에 500억 원의 잔금이 있었고 수시로 수십억씩 입출금이 된 게 드러난데다 계좌가 노태우 대통령이 관리하는 계좌였다는 사실이었어요.
노태우, 전두환 전직 대통령 계좌가 드러나자 난리가 났지요. 당시 수표추적을 나갔던 수사관이 사무실에 돌아오기 전이어서 나도 모른 상태였는데 벌써 상부에서 전화가 와서 왜 그 계좌를 추적했느냐고 추궁하는 거예요. 이원조 의원이 공공연하게 나를 건드리면 모든 걸 까발리겠다고 협박한 것도 김영삼 정권에게 압박이 되었지만 노태우, 전두환 비자금까지 드러나자 '어마 뜨거라'라고 정권차원에서 서둘러 덮어버리기로 작정하였는지 노골적으로 수사에 제동을 걸었어요.
김환태 : 그래서 동화은행 비자금 수사가 미완의 수사로 결론난 것이군요.
[한겨레, 2006년 9월 8일] 동화은행 수사는 거악 YS 겨냥한 검찰의 대반격 <함승희 전의원>
d. 경제민주화
2012년 박근혜 대통령과의 동행도 그로선 두 번째 실패한 ‘경제민주화 도전기’였다. 김종인은 2012년 대선 한 달 전 펴낸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에서 “경제민주화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공생하며 지속 가능할 수 있는 안전장치”라며 “대통령의 철학과 의지가 중요하다”고 썼다. 경제민주화를 재벌개혁의 범주를 넘어 양극화 해소와 노동·복지·조세 문제로 확장시키고, 전경련도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풀어낸 책이다. 새누리당에서 그의 기세에 눌려 있던 ‘친기업 성장’ 목소리가 점점 커질 때였지만, 그는 그때까지 대통령의 약속을 고집스럽게 믿고 있었다.
[경향신문, 2016년 1월 27일] 김종인의 리턴매치
프로기: 여기서부터는 이제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대선 캠프에서 '경제민주화'라는 정책 그림을 다 그렸는데, 대선 이후에 '창조경제' 캠페인에 밀려납니다. 복지라는 야권 키워드를 여권에 쥐어주고, '토사구팽' 당하게 되죠.
4년 시간이 흘러서 더불어 민주당, 제1야당의 대표가 되게 되었습니다.
3. 필진 코멘트
프로기: 그 외에도 역사가 많은데. 제가 김종인 씨라면 살면서 내가 한 일을 다 기억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평생에 걸쳐서 한 가지 얘기만 한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대단한 줏대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고집스러워서일까요. 그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그리고 박근혜 정부까지. 계속해서 경제 정책 전문가로서 제1의 인물로 언급됩니다. 하지만 또 그래서인지(=고집스러워서인지) 한 번도 실세에 오르진 못합니다. '토사구팽'의 대명사죠. 이번 총선에선 어떤 결과가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김종인 씨 이야기에서 조금 벗어나자면. 총선을 세 달 앞두고 여기저기서 영입으로 바빠 보입니다. 한 켠으론 국가대표 축구팀도 3달 전에는 팀을 다지는데 주력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한 나라의 살림을 4년간 책임질 팀을 이제야 새로 꾸리기 시작한다는 게 많이 아쉽습니다. 물론 반성과 변화는 반갑지만. 요즘 정치가 참 가볍다 생각이 들어요.
모쪼록 총선이라는 이벤트를 관심 있게 지켜보려 합니다. 분위기 반전이 있을 수 있을까요.
by 프로기
froooogy@gmail.com
행간읽기, 하나만 읽으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