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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간읽기 May 25. 2016

[프로기] 혐오에 대하여 한 마디 덧붙이기

[행간읽기] 2016. 5. 25. by 프로기

"혐오에 대하여 한 마디 덧붙이기" by 프로기


1. 이슈 들어가기

프로기: 오늘은 제 생각을 위주로 정리한 글입니다. (그래서 매우 매우 부끄러울까 봐 걱정스러움...) 혐오에 대해서 너도 나도 얘기하는 시점이라, 피곤하실 수도 있지만. 살인사건이 왜 혐오로 얘기돼야 해?라고 묻는 질문에 대해서 답하고 싶었습니다.


2. 이슈 디테일

프로기: 강남역 노래방 살인 사건. 여성 혐오범죄라는 논란이 불거진 것은 가해자의 진술 때문이었습니다. "여성이 자신을 무시해서 죽였다”라는 말이 불씨를 댕겼는데요. 하지만 가해자가 조현증이라는 정신병을 앓고 있던 점이나 사회성이 부족했던 점 등을 들어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했다고 합니다. 저도 이 때문에 이 사건을 ‘여성 혐오범죄’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여성 혐오에 대해서 분노하고, 토론하고, 분석하고, 포스트잇을 붙이는 등의 행동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늘 언제나 대중은 이유 없이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아요. 때문에 섣불리 ‘여성 혐오'는 무관한 얘기라고 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ㄱ. 덜컹거리는 여성 혐오에 대한 보도

경향신문, 한겨레, 한국일보 등 언론 역시 24일 ‘여성혐오’라는 키워드를 통해 여성이 겪는 일상적 차별과 불안을 조명했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 역시 지난주까지만 해도 여성 혐오의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 추모 분위기는 자연스레 여성혐오의 현실에 대해 직시하고, 이를 개선하려는 자발적 움직임과 성찰로 발전하고 있었으나, 일간베스트 회원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현장에서 ‘맞불’을 놓으며 갈등이 벌어졌다. 문제는 몇몇 언론의 태도 역시 갈등을 부추긴 이들의 의도대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는 사안을 ‘정치적인 것’ ‘논쟁중인 것’으로 몰아가며 벌써부터 ‘피로감’을 호소했다. 동아는 기자수첩에서 “일부 누리꾼이 ‘여혐범죄’라는 주장을 제기하고 일부 극우 누리꾼이 ‘여혐론’을 반격하는 글을 올리면서 추모 분위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면서 “‘성대결’의 장으로 변해버린 추모 현장” “사건사고가 터질 때마다 온 국민이 둘로 나뉘어 상대를 비난하고 배려하지 않는 한국 사회의 축소판을 보는 것 같았다”고 밝혔다.

중앙은 "추모·반성의 자리…“김치녀” “한남충” 편가른 불청객들" 기사에서 “애초 추모를 위해 조성됐던 공간이 결국 혐오의 분출구로 변질됐다는 지적이 나온다”면서 “포스트잇으로 시작된 논쟁이 욕설과 폭력으로 변질되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중앙은 박창호 숭실대 교수를 통해 “일베, 메갈리아 등 인터넷에서 극단으로 치닫던 갈등이 오프라인으로 이동해 드러난 것”이라고 전했다.

세월호 참사 때 그랬듯 추모의 의미를 정치적인 것과 분리하려는 보도도 문제지만 사안을 ‘갈등’으로 바라보는 게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애초에 여성을 노린 범죄에 대한 추모현장에 와서 ‘남성은 잠재적 범죄자가 아니다’ ‘성대결을 하지 말자’는 식의 발언을 하는 것 자체가 도발이었다. 이슈의 본질을 흐리고 진흙탕으로 만들기 위한 ‘맞불’ 의도에 언론이 호응을 한 것과 다름없다.

언론은 대충 ‘갈등’이라고 쓰고 넘어갈 게 아니라 인과관계를 명확히 따져야 한다. 그렇다면 도발행위에 문제를 지적하는 게 적절해 보인다. 권석천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칼럼에서 “그날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나는 여성혐오를 보았다”면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불안함을 호소하는 수천·수만 개의 포스트잇에서, 하루하루 성추행과 성희롱에 노출돼 있다는 여성들의 증언에서, 굳이 그곳까지 나와 조롱을 내뱉는 남성들의 모습에서“라고 지적했다.

[미디어오늘, 5월 24일] 강남역의 갈등? 보수 언론의 프레임 전환


프로기: 제가 이렇게 긴 인용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독자분들께 꼭 전해드리고 싶었던 기사입니다. 덧으로, 미디어오늘은 국내 언론사들 중에서 유일하게 <언론을 비판하는 언론>의 지위를 가진 매체입니다. 워낙 인터넷신문이 성행해서 뭐가 좋은 매체인지 헷갈리곤 하실 텐데요. <미디어오늘>은 기사의 퀄리티와 관점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ㄴ. 여성혐오 이면에

프로기: 과거에 연쇄살인범 유영철도 부인에게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한 이후로 ‘여성혐오증’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영철 사건 당시에는 ‘연쇄살인’이 키워드였지 ‘여성혐오’가 키워드가 되지는 않았었습니다. 지금 현상의 이유가 무엇일까요.


신자유주의라는 정글

프로기: 중년 세대만 하더라도 여자가 대학 가는 일이 드문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과방에 널브러져 있는 입사 지원서를 써서 내면 그냥 합격하곤 했다는 얘기를 하곤 하십니다. 그때는 기회는 많고, 가능성은 크고, 일할 사람은 적은 시대였습니다. 그 후, 전 세계적으로 지난 10년간 저성장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더욱이 준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한국은 성장세가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죠.


이제 기회는 적고, 가능성도 낮은데, 반대로 일할 사람은 많아졌습니다. 남자 입장에서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수적으로만 따지자면 경쟁자가 X2 된 셈입니다. 생존이 달린 문제에서 경쟁자가 늘었다면, 그것도 본판에 없던 사람이 끼어들었다면 배척하겠다는 마음이 들기 마련이겠죠. 비슷한 맥락으로 미국에선 트럼프에 열광하면서, 백인 중산층 남성들이 히스패닉계 이민자에 대한 불평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여자 입장에서는 또 다른 이유로 이 사회가 불편합니다. 김현미 연세대 교수(문화인류학)는 “2030 여성들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억압을 별로 느끼지 않고 자라났는데 정작 우리 사회에 여성혐오가 퍼져있다는 데 분노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강남역 여성살인사건’ 추모 열기의 주역들은 2030 여성들이다. 이들은 1980년대 이후 태어나 제도적 남녀평등이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다. 1~2명의 자녀만을 두는 핵가족에서 ‘너만 노력하면 남자들과 똑같이 성공할 수 있다’고 부모한테 격려받고 자란 ‘알파걸’들이 많다. 과거 ‘장남을 위해 여자 형제들이 희생’할 것을 공공연히 강요받던 4050 이상 세대와는 다른 환경에서 자란 것이다. 하지만 사회는 달랐다. 2030 여성들은 성희롱·성폭력에 일상적으로 노출됐고 취업과 승진에선 유리천장에 부딪혔다. 이들이 우리 사회의‘여혐’에 분노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은 이런 세대적 특징이 놓여있다.

회사원 전수희(가명·27)씨는 “회사에서 ‘여자들은 애 낳으면 그만둬서 안 된다’는 말을 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상사들이 많다. 조금 높은 지위 올라간 여자 직원을 배척하는 분위기도 팽배하다. 교육받을 때는 남녀가 평등한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고 배웠는데, 사회생활에서는 ‘여자다움을 유지할 것’과 ‘여자랍시고 어드벤티지를 요구하지 말 것’이라는 모순적인 기준을 여자들에게 요구한다”고 말했다. 회계사인 이수진(가명·27)씨는 “회사 남자 동기들이 ‘너는 다른 여자들이랑 달리 야근을 잘한다’는 말을 칭찬삼아 한다. 그런 식의 구도가 매우 불편하고 짜증나지만 그들은 이해를 못한다”고 말했다.

[한겨레, 5월 23일] 가부장적 억압 덜 받았던 2030여성 분노 더 큰 이유는


피로사회

지은이에게 성과사회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자기를 향한 강박적인 착취가 벌어지는 사회다. 이런 분석틀에서는 아예 시스템의 지배자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시스템에 대항할 ‘우리’가 형성되지 못하며, 따라서 저항이나 혁명도 불가능해진다. 이런 논리가 초토화시키는 것은 계급적·인종적·성별 차이(적대)를 포함한 온갖 종류의 정치다.

공교롭게도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돌베개, 2011)와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2010년 프랑스와 독일에서 각각 출판되어 그해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런데 두 책의 주장은 완전히 딴판이다. 스테판 에셀의 책은 워낙 제목이 강렬해서 ‘분노하라’는 선동만 기억되기 십상이지만, 정작 지은이가 당부하고자 했던 것은 ‘연대하라’였다. 반면 한병철은 성과사회에서는 타인과의 연대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분노조차 생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분노는 상황을 중단시킨 자리에서 현재와 미래를 전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어야만 생겨나는데, 활동 과잉과 속도에 전 현대인에게는 순간순간에 대응하는 짜증과 신경질만 는다.  

우울증, 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같은 신경증에 만연된 성과사회의 해결책은, ‘~해야 한다’라는 활동 과잉과 긍정성을 내려놓고 자신을 무장해제하는 것이다. 마치 여섯 날을 일하고 일곱째 날 일손을 내려놓은 신이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이 아니었듯, 인간 역시 무위 속에서 비로소 계산 이상의 사유 능력을 키울 수 있고 타인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결론은 지은이의 짜깁기 능력을 새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성과 주체의 내면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착취 구조를 외면하는 개개인의 무장해제는 요즘 유행하는 ‘힐링’에 그칠 공산이 크다. 무위 속에서 심신의 피로를 푼 개인 혹은 공동체는 심기일전해 자기를 착취하는 사회 속에 다시 뛰어든다.

[시사인, 2013년 1월 12일] 장정일의 독서일기: <피로사회>를 경멸하는 이유


프로기: 책 <피로사회>에서는 개인이 알아서 개인을 채찍질한다고 비판합니다. ‘생존' 자체가 목적이 돼 버린 지금, 긍정적이고 열정적이고 자유롭게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끊임없이 부추기죠. 결국 사람들은 모두 ‘소진'되어 버립니다. 성과라는 것이 내가 만들고자 한다고 만들어지지 않거든요. 사회로부터 보상이 오는 걸 성과라고 하는데.


그러니 앞에서 남자들은 자유경쟁의 경쟁자가 늘어서 예민하고, 여성들은 자유경쟁의 장점만 들으며 자랐는데. 양쪽 다 막상 사회에 나와보니 듣던 것과 다른겁니다. 이 사회는 결국 보상은 없고, 노력만 하고, 개인에게만 집중하게 합니다. 실패한 사람은 “나는 못한 걸 너는 해냈구나.”라고 자기반성만 하게 하죠. 자기 채찍질만 하게 하고요. 이런 상황에 대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신경질적으로 변하면서 분열하기도 하는데요. 똘똘 뭉쳐서 판을 뒤엎을 생각을 할 겨를을 주지 않습니다. 저자는 피로사회에서는 연대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뻔한 얘기지만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평등권, 자유권, 선거권, 민주주의, 표현의 자유 등은 모두 숱한 저항과 혁명을 통해 얻어낸 것들입니다.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30년 전에 혁명이 없었더라면 지금과는 아주 많이 다른 모습이겠죠. (우리나라 역사 때문에 혁명이 꼭 ‘선동질'이라는 프레임을 쓰게 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성과 없는 사회를 어떻게 바꿔볼지 성별 구분 없이 힘을 모아도 모자른데. 이미 사회가 연대가 안 되도록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어려워 보입니다. 방법은 우리가 각성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SNS를 통한 민주주의는 착각

프로기: 한 때 SNS를 포함한 뉴미디어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모두 기대했습니다. 긍정적으로요. 또한 오프라인을 돕는 도구라고 여겼습니다. 생활을 편리하고 즐겁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게 이제 온라인 세상은 오프라인과 분리된 또 하나의 세상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새로운 세계가 생겨난 거죠. 지금의 온라인 세상은 무정부 상태로만 보입니다. 통제할 수 있는 법도, 규율도, 기관도 없습니다. 누구나 익명으로 참여하고 언제든지 내 언행을 지워버릴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유튜브가 테러 교육 강의 채널로 쓰이고 있습니다. 에릭 슈미트(알파벳-구글 모회사 최고경영자)는 책 <새로운 디지털 시대>에서 일찌감치 정부나 거대 권력이 SNS를 이용할 전략을 세울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이집트, 시리아에서 대중들이 SNS로 혁명을 성공시켰으니, 그걸 막을 방법을 고민하는 건 당연하다고. 대선 때 있었던 국정원 댓글 조작 사건은 에릭 슈미트가 예견한 상황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게다가 한남충, 메갈충 등의 갈등을 보면 온라인 게시판들은 건전한 토론보다는 폭주하는 언탄전(육탄전을 바꿔서!)의 판을 만들고 있습니다.


2016년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수많은 싸움을 거쳤습니다. 그러면서 법 조항들이 생겨났고, 사회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도 생겼지요. 형벌도 함께 생겼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교육을 받았고, 함께 살아가기에 적합한 인간이 되도록 <올바른 이성>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세계도 이성적인 사회가 되려면 수백 년이 걸릴 지도 모를 일입니다.


혐오 논란이 오프라인으로, 실제 폭력으로 터져 나오기 전까지 온라인은 막장 싸움을 한창 벌이고 있었습니다. 아주 조금만 어긋난 언행이 보이면 득달같이 달려가 물어뜯곤 했죠. 한국은 온라인 대화를 주로 게임에서 시작했습니다. 게임은 특수하니까 폭력적인 대화가 아무렇지 않은 상황이죠. 그걸 받아서 악성댓글이 다음 문제였습니다. 아무 말이나 해도 된다는 속성이 불필요한 비하와 근거없는 소문을 만들어내는 곳이 되버렸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에선 대화를 절제하고 정제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 발전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난 대화들을 정돈하려면 "예쁜 말만 해요." 캠페인 정도로는 택도 없다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사회만큼의 규율과 규제, 처벌, 교육이 있어야 온라인에서도 사람이 사람답게 행동할 거 같아요.


3. 필진 코멘트

프로기: 지식이 부족하고, 글재주가 모자라서 아쉽기만 합니다… 곳곳에 혐오에 대한 생산적인 글들이 많더라고요. 중요한 문제이니까 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겹다 생각하지 않고, 한 번 씩 더 읽어보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독자분들도 한 번 더 생각해보시면 어떨까요?

제 글이 부족해 '여성혐오' 개념을 보완할 기사들을 덧붙입니다.

[ㅍㅍㅅㅅ] 여성혐오 제대로 알기

[ㅍㅍㅅㅅ] 남녀갈등은 '여혐논쟁'으로 '부추겨진' 것이 아니다



by 프로기

frooooog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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