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인 Apr 18. 2021

호국의 얼이 서린 곰티재 옛길

杏仁의 길 담화_소양 신촌에서 진안 장승리까지

 

곰티재 옛길은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를 지나 산비탈을 올라간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원신촌 마을 표지석 뒤 공중에 익산-포항 고속도로가 걸려있다.

 곰티재 옛길은 모래재 도로가 나기 전, 196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신작로 길이다. 곰티재는 만덕산(761.8m)의 형세가 곰을 닮아 곰티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진안과 전주를 잇는 최단 거리인 곰티, 한자로 표기하면 웅치(熊峙)다. 대동여지도에도 ‘웅치(熊峙)’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호남정맥의 하나다. 곰티재는 일제 때부터 목탄차가 다녔고, 전주에서 무주, 진안, 장수를 오가는 버스길이 처음 열린 고개다. 옛날 전주로 갈 때는 곰티 말고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에서 소양면 월상리로 넘어가던 조두치도 많이 이용되었다고 한다. 곰티는 벼슬아치들이 넘던 길이고, 조두치는 백성들이 다니던 길이었다던가?        

 전주에서 완주군 소양면을 거쳐 진안으로 넘어가는 길은 익산-포항 고속도로와 26번 4차선 국도(소태정 고개), 옛 국도(모래재), 곰티재 이렇게 4개다. 당당한 국도 노선이던 곰티재 길은 1973년 모래재가 뚫리면서 왕래가 없는 옛길로 남았고, 1997년 1월 전주-무주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앞두고 소태정 고개로 4차선 국도가 뚫리면서 모래재길마저 옛길이 됐다.

 그래서 전주에서 진안 넘어가는 네 개의 길 중 둘은 옛길로 남았다. 모래재길은 아스팔트 도로여서 정감 있는 드라이브 길로 애용되고, 곰티재 길은 드라이브 대신 마실길처럼 걷는 구간으로 애용된다.

 곰티재 정상(427m)은 모래재(413m)보다 약간 높지만, 모래재길과 달리 곰티재 길에는 터널이 없다. 곰티재 길로 다니던 국도는 산에 터널을 뚫지 않고 굽이굽이 산등성이를 돌아 넘는 길이었다.

 곰티재 옛길은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에서 웅치전적지까지가 신작로다. 길은 완주군 소양면 화심리에서 모래재길과 헤어지고, 곰티재를 넘어 진안군 부귀면 장승리로 내려가 모래재길과 다시 만난다.

 진안 방면 국도(전용도로)를 타고 가다 화심 순두부를 지나서 오른쪽 화심온천 앞으로 나가면 모래재길이 나오고, 여기서 조금 들어가다 오른쪽 신촌마을 방향으로 빠지면 마을을 지나는 곰티재 길로 이어진다. 숲 속으로 굽이굽이 이어지는 옛길을 걸으며 옛사람들의 흔적을 밟아 보는 길이다.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곰티재 정상에 웅치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곰티재 길에 남아 있는 웅치전적지는 웅치 대첩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25호(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산 18-1)다.

 웅치 대첩은 임진왜란사 중 손꼽히는 대격전이었다. 이 전투는 호남 방어에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으며, 일본에서도 단순히 전라도를 지킨 전투를 넘어 조선을 구한 전투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임진(壬辰)년 1592년(선조 25) 4월 부산을 침입하고, 5월에 한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전국 곳곳을 점령하고 분탕질을 자행하고 있었다. 금산에 주둔한 고바야카와 휘하의 일본군 중 일부는 용담과 진안을 거쳐 웅치를 넘어 전주에 들어가려고 했으며 일본 별 군 1,000명은 진산을 치고 이치(梨峙)에서 전주로 향했다.

 광주 목사 권율이 격문을 띄워 군사 1,500명을 모아 훈련한 다음 북상하자 조정에서 그를 전라도 절제사로 삼았다. 권율은 직접 부하를 지휘해 이치를 막고, 김제군수 정담에게 웅치(雄峙)를 막도록 했다.

  김제군수 정담과 의병장 황박, 나주 판관 이복남 등이 이끄는 관군과 의병은 웅치에서 적의 2진을 맞아 험한 지형을 이용해 일단 적을 격파했지만 왜병은 전열을 가다듬어 재차 공격하여 왔다. 치열한 혈투 끝에 웅치의 수비는 중과부적으로  무너졌고, 조선군의 주장(主將)인 정담은 포위당한 백병전으로 적을 무찌르다가 순국했다.

 전투가 끝난 후 왜군은 조선군의 충성심과 용맹에 깊이 탄복해 죽은 조선병사들의 유해를 모아 무덤을 만들고 '조조선국(吊朝鮮國) 충간의담(忠肝義膽)'이라는 표목을 세워 조선의 충신과 의사의 영혼을 조상하기도 했다. 얼마나 격렬했으면 적군 병사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혼을 기렸을까?

 웅치전투의 현장은 웅치를 경계로 한 진안군과 완주군 일대에 걸쳐 있다. 현재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지역만이 전라북도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었고, 신촌리 부근 곰티재 정상에 웅치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완주군과 진안군, 전라북도가 함께 노력해서 웅치전적지를 역사적 위상에 맞도록 국가의 사적으로 지정하여 관리해야 할 일이다.     

 그렇지만 왜군 역시 많은 희생자를 내고 큰 타격을 받아 전주성을 직접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웅치를 넘은 왜군은 전주 안덕원 부근까지 침입해 들어왔으나 이미 전력이 크게 약화돼  전라감사 이광과 이정란 장군이 지키고 있는 전주부성을 공격하지 못했다. 결국 남원에서 이동해 온 동복 현감 황진이 안덕원 너머 소양평(완주군 소양면)에서 왜군을 물리쳐 전주가 지켜지고, 나아가 전라도가 위기상황에서 벗어나게 됐다.

 한편, 의병장 고경명은 호남의병을 이끌고 금산성을 공격하다가 순절해, 금산성 서쪽 와평리에 고경명의 순절터임을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웅치전투 이후 금산의 왜군은 동복 현감 황진과 광주 목사 권율이 지키고 있던 이치(梨峙)를 공격했다. 이치 전투는, 황진의 분전과 권율의 독전으로 왜군을 물리치고 호남을 지키는 또 하나의 계기를 만들었다.

 이어서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은, 칠백의사를 거느리고 승병 천여 명을 거느린 영규대사와 함께 금산성을 공격해 왜군과 결전을 벌이다가 금산 북쪽 연곤평에서 모두 순절했다. 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는 사적 제105호인 칠백의총이 자리 잡고 있다.

 호남이 금산성에 주둔한 왜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3개월을 버텨냄으로써 왜군은 병력을 점차 경상도로 철수했고 호남은 왜군의 직접적인 공격의 칼날에서 벗어나게 됐다. 수많은 전투와 수많은 인물들의 희생의 대가로 이뤄진 결과였다. 임진왜란 당시의 호남 방어는 개전 초기의 불리한 전황을 극복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이후 호남으로부터 병력과 물자가 지속적으로 보급될 수 있었다.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말씀도 여기서 나왔다고 한다.

 현재 이치 전적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돼 있고, 이치 정상인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에는 이치 전적지를 알리는 비석과 안내판, 황진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 또 이치에서 2km 거리인 충남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 산기슭에는 권율 장군의 기념비가 있어 이치 전적지를 충청남도 기념물 제154호로 지정하고 있다. 이치는, 완주와 금산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여서 전북과 충남의 도계이기도 하다.

 이치 전적지 또한 그 위상에 맞도록 국가차원의 사적화가 필요하다. 지방자치단체가 서로 협조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작가의 이전글 치유와 생명의 걸음, 모악산 안덕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