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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인 Apr 19. 2021

무왕의 발자취 무왕길

杏仁의 길 담화_백제 문화의 흔적

 익산은 백제 무왕의 도시라고도 한다. 마룡지를 비롯해서 서동 생가터, 익산쌍릉, 미륵사지, 제석사지, 왕궁리 유적까지 백제 제30대 무왕(600~640) 서동의 생애가 서린 곳이다.

왕궁리 오층 석탑

그래서 익산 둘레길에는 찬란한 백제문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익산 둘레길 중 무왕길은, 백제를 동시대 최고 문화 왕국으로 만든 무왕의 자취를 따라서 온전히 백제 문화유산을 탐방하는 노선이다.      

 무왕 1길(26.7km)은 익산쌍릉, 익산토성, 미륵사지, 구룡마을 대나무 숲, 서동공원,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왕궁리 유적전시관을 잇고, 무왕 2길(8.3km)은 다시 왕궁리 유적전시관에서 시작해 제석사지, 서동 생가터, 익산쌍릉을 잇는다.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유적전시관 바로 옆에 왕궁리 유적지(사적 408호)가 있다. 전시관에서 불과 100여 m 거리에는 국보 제289호인 왕궁리 오층 석탑이 우뚝 솟아 있고, 왕궁 터엔 고대에 있었던 다양한 건물의 형태를 복토로 표시하고 있다.

 왕궁리 유적에서는, 왕궁 외곽 담과 왕이 정사를 돌보고 의식을 행하던 정전 등 14개의 건물지, 백제 최고의 정원 유적과 공방터, 국내 최고의 위생시설인 대형 화장실 유적 등이 발굴됐다. 고대 왕궁 중 처음으로 발견된 것들이다.

‘왕궁리 성지’라고도 부르는 이곳은, 마한·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 또는 별도설,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해지고 있다. 석탑 동쪽에서 발견된 기와가마와 주변의 성곽 유물 등으로 미뤄 적어도 세 시기(백제 후기∼통일신라 후기)를 지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왕궁리 오층 석탑은 정확한 유래가 전해지지 않는다.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탑리(塔里) 마을 밭 가운데 방치됐던 왕궁리 석탑이 1965년에 해체 수리되는 과정에서 사리병과 금제 금강경판, 금동불상 등 수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자마자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제123호)로 지정됐고, 이후 탑 주변에 대한 발굴 작업이 세밀히 이뤄졌다.

 고도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46호)은, 금마 옥룡천(玉龍川)을 사이에 두고 200m쯤 떨어져 2구의 석불이 동서로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석인상, 또는 ‘인석(人石)’이라고도 하는 이 석상은, 넘어져 방치되어 있던 것을 철종 9년(1858) 익산군수 황종석(黃鍾奭)이 다시 세우고 비문을 남겼다. 그가 이 비문에서 “이 석불을 불상과 같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불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왕궁면 왕궁리 궁평(宮坪) 마을 서편 마을 입구 쪽에는 제석사 터가 남아있다. 지금은 민가에 둘러싸여 점차 그 흔적을 잃어가고 있으나 궁평 마을은 백제 때의 내궁(內宮)터로 알려졌다. 내궁이란 내원당(內院), 내불당(內佛堂), 내사(內寺)의 성격을 띤 사원이다. 왕궁평성에 궁성을 조성한 무왕은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미륵사를 창건하고, 궁궐 근처에 제석천(帝釋天)을 주로 모시는 내불당으로서 제석사(帝釋寺)를 창건해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려 했던 것이다.

 이 일대에는 무왕의 탄생에 얽힌 장소가 널려 있다. 마룡지와 생가터, 용샘(龍井), 오금산 등이다. 용과 금, 전부 왕과 관련된 용어들이다.

 서동 생가터에 도착하면 '마룡지'라는 연못이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마룡지라고 하는데, 연못 동쪽에서 백제 시대의 기와가 다량으로 발견돼 이곳이 서동생가가 있던 곳이라 알려져 있다.

 무왕의 이름은 장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과부로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연못 속의 용과 관계해 장을 낳았다고 기록돼 있다.

 생가터를 지나 무왕이 어려서 사용하던 우물터 용샘으로 가는 길은 전형적인 시골길이다. 용샘 옆에 있는 용정마을을 지나 오금산에 닿으면, 사적 제92호인 익산토성<오금산성>이 있다. 백제 무왕이 어린 시절 마를 캐다가 금을 얻은 것으로 알려진 곳으로, 보기 드문 토성이다. 남한의 산성은 대부분 석성이지만 익산토성은 거의 원형대로 보존된 몇 안 되는 토성이다.

 오금산은 금덩이 다섯 개가 나왔다 해서 붙여진 산 지명이다. 서동이 오금산에서 큰 금덩이 다섯 덩이를 얻게 된 것은 홀어머니에게 효심이 커서 그랬다는 말도 전해온다. 서동은 왕이 된 후에도 고향인 금마에 자주 오갔으며 오금산에다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오금사를 세웠다고 한다.

 오금산성은, 흙과 돌로 지은 둘레 약 714m의 산성 안에 현재 남문터와 수구터, 건물터가 남아 있다. 보덕국의 왕 안승이 670년부터 684년까지 익산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보덕성'이라고도 한다.

 익산토성이 무왕의 주요 유적지가 된 이유는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들 때문이다. 대부분이 토기 조각, 기와 조각류였는데 백제 말기부터 고려 시대까지 당대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것들이다.

 무왕길의 출발지로 잡는 쌍릉은, 익산시 석왕동에 위치해 있다. 2기의 무덤이 남과 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북쪽에 있는 묘는 대왕 묘, 남쪽의 것을 소왕묘라고 하는데 북쪽의 묘가 남쪽의 묘보다 크기가 더 크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됐다고 한다. 쌍릉의 주인에 대해서는 마한의 무강왕과 그 왕비의 능이라고 불리는 설,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능이라는 설이 전해지지만, 오랫동안 어느 설도 확인되지 않은 채 역사 속에 물음표로 남아있다.

 무왕길은 사적지와, 국보, 보물이 숱하게 널린 백제 역사의 길이다. 무왕의 역사를 되새기고 백제의 역사를 되새겨 볼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_ 金杏仁(김행인. 시인, 길 안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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