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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인 Apr 19. 2021

백제의 꿈 따라 걷는 미륵산길!

杏仁의 길 담화_미륵사지,미륵산성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彌勒寺)가 세워진 곳은 무왕과 무왕비인 선화공주가 미륵산(용화산)에 사는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도중 만난 미륵 삼존불이 출현한 자리라 한다. 무왕은 왕비의 청을 들어 지명법사의 신통력으로 연못을 메우고 미륵사를 지었다 한다.

 발굴 전에는 백제 창건 당시 세운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 1기, 석탑의 북쪽과 동북쪽 건물들의 주춧돌, 통일신라 시대에 사찰의 정면 양쪽에 세워진 당간지주 1쌍(보물 236호)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1980년에서 1995년까지 15년 동안 발굴을 통해 유물 2만여 점이 출토됐으며, 석탑은 무려 18년 동안 해체, 보수정비를 끝내고 올해 일반에 선보였다. 올해 보수를 마친 서탑(14.5m)은 미륵사지의 상징 격이지만, 남아 있던 6층 모양대로 복원한 것이어서 고풍스러움은 찾기 힘들다. 동탑(28m)은 터만 남아 있다가 지난 1990년대에 9층 탑으로 복원됐었다.


 미륵사지를 품은 채 남북으로 강을 끼고 있는 미륵산(430m)을 올려다본다. 높지는 않으나 남·서·북 세 방면에 지류가 있어 해로(海路)로부터 진입로를 이룬 교통의 중심지다. 동쪽은 소백산맥을 거쳐 신라·가야 지방을 공격 방어하는 후방 요충지이기도 했다. 미륵산은 원래 용화산인데 미륵사가 창건되면서 산 이름이 미륵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미륵산과 주변을 도는 미륵산길(18km)은 간재 선생길, 아름다운순례길, 복숭아길, 정정렬 명창길, 기준고성길, 대나무숲길로 구분한다.  

 미륵산길을 따라 차곡차곡 계단을 오르듯 가다 돌아보면 발아래 나타나는 게 미륵산성이다. 한반도를 닮은 금마저수지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미륵산성(1,823m)은 미륵산 우제봉에서 장군봉 두 봉우리에 동쪽으로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고조선의 준왕이 쌓았다고 해 ‘기준성(箕準城)’이라고도 불린다.

 산성은 성문에 옹성(甕城)을 설치하여 방어에 용이하게 했고, 성내에는 몇 개의 축대를 쌓아 계단식이다. 동쪽 계곡 수구문 근처에 정문터가, 남벽 중앙부에 남문터가 있다. 성 안에는 우물터와 여러 채의 건물터가 남아 있다. 산 중턱에는 기름 한 말을 끊일 수 있다는 구멍이 파인 큰 바위의 등잔암과 사자암, 심곡사 등이 있고, 구멍이 패어 있는 투구바위 등이 명산의 면모를 갖췄다.

미륵산 중턱의 포곡식 산성 미륵산성은 기준성이라고도 불린다.

  미륵산 서쪽에는 한강 이남에서 규모가 가장 큰  대나무 숲이 있다. 구룡마을 대숲. 면적이 무려 5만㎡다. 주요 수종은 왕대이지만, 일부 구간에 오죽 또는 분죽이라 부르는 솜대가 분포하고 있다. 이곳 대나무로 만든 죽제품은 우리나라 3대 5일장의 하나였던 강경장을 통해 충청도, 경기도까지 판매됐다. 대숲은 생필품을 만들어 썼다고 해서 생금 밭이라 불리기도 했다.

 대숲 안에는 산책로와 광장, 우물터 등이 조성돼 많은 관광객이 찾아든다. 인기 드라마 ‘추노’와 영화 ‘최종병기 활’ 등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다.

 구룡마을에는 ‘뜬바위’라는 명물이 있다. 바위에 또 하나의 커다란 바위가 얹혀 있는데 모양이 마치 탱크처럼 보인다. 미륵산에 살던 힘센 장수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근처의 바위를 발견하고는 들어다가 바위 위에 올려놓아서 생겼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윗돌 위에는 장수가 오줌을 싸서 흘렸던 골과 반짇고리, 가위를 놓았던 가위 자리 모양이 파여 있다.

 뜬바위는 윗돌과 밑돌이 떠 있다고 해서 부르는 이름인데, 위에 얹힌 바위가 베 짜는 데 쓰는 북을 닮았다고 해서 북바위라고도 하고, 커다란 바위가 또 다른 바위에 얹혀 있다고 해서 얹힌바위라고도 한다.

 평소에는 윗돌과 밑돌이 딱 닿아 있지만, 섣달 그믐날 자정이 되면 사이가 떠서 동네 사람들이 양쪽에서 명주실을 쥐고 두 바위 사이에 넣고 잡아당기면 걸리지 않고 통과된다고 한다.

 예전에 뜬 바위 주변에는 가마바위, 말바위, 황새바위, 멍석바위 등 많은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하나 채석꾼들이 허가를 얻어 바위들을 석재로 팔아치워 버렸고, ‘뜬 바위’만은 건드리면 부정을 탄다고 마을 사람들이 말려서 이제까지 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미륵산(彌勒山·430.2m)에서 3.3km 거리에는 용화산(龍華山·342m)이 있다.

 용화산 자락의 여산면 원수리 샘골 동쪽 기슭의 절벽 중간에는 30평 정도의 자연 석굴에 작은 샘이 있어 약수로 이용된다. 이 굴에서 불을 때면 반대쪽 산기슭인 상원사 마을 앞 작은 동굴로 연기가 나온다고 한다. 굴 높이는 10m쯤 되는 암벽에 있다. 이곳에 기생하는 소나무 뿌리를 이용해 굴 안으로 출입할 수 있게 만든 통로가 있다.

 용화산길(7km)은 서동공원에서 대나무 숲길까지 용화세상 여는 길, 편백나무숲 쉼터까지 소세양신도비길, 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까지 장 보러 가는 길로 나눠놓았다.

 원수리에 자리 잡은 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전라북도 기념물 제6호)는, 조선 말기 선비의 가옥구조로 안채, 사랑채, 헛간, 고방채, 정자와 연못 등이 남아 있다. 슬기를 감추고 겉으로 어리석은 체한다는 뜻을 간직한 ‘수우재(守遇齋)’라는 사랑채 이름에서 평생을 지조 있는 선비로 살아온 선생의 풍취가 느껴진다.

 국문학자이며 시조 작가인 가람선생은 1930년대부터 조선어문 연구회를 조직했고, 1930년에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위원과 ‘선어 표준어’ 사정위원으로서 활동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흥원 경찰서로 끌려가 1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 후 전북대, 서울대, 중앙대 등에서 국문학을 가르쳤다. 가람 생가에는 둘레 60cm, 높이 5m가량의 탱자나무(전라북도 기념물 제112호 )가 서 있다._ 金杏仁(김행인. 시인, 길 안내자)

구룡마을 대숲에 있는 뜬바위는 북바위라고도 하고, 얹힌바위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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