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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인 Apr 19. 2021

금산사에서 수류성당 가는 길

杏仁의 길 담화_원평천 순례길

  

금산사 산문은 모악산을 닮아서 품이 넉넉하다.

 전라북도의 종교문화 자취를 따라 걷는 아름다운 순례길 중에서도, 김제의 금산사에서 수류성당을 잇는 코스는 길지 않은 구간을 걸으며 다양한 종교를 보다 더 가깝게 만나볼 수 있는 길이다. 여러 종교인들의 고난과 화합의 역사, 민족 저항의 역사가 함께 어려 있기에 그렇다.

 금산사는 후백제 멸망의 역사가 담겨있는 곳이다. 서기 599년(백제 법왕 원년)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는 금산사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했던 후백제 견훤이 아들들에 의해 유폐돼 후백제의 멸망을 지켜봐야만 했던 한이 서린 곳이다.

 금산사는 통일신라시대인 760년 진표율사가 중창하면서 거찰의 면모를 갖췄다. 이때 금산사의 중창과 미륵전의 건립은 이 지역이 미륵신앙의 중심지가 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고 한다.

 이후 고려 문종 때 혜덕왕사에 의해 86동 43개 암자의 대가람으로 중수되어 가장 큰 규모를 이뤘다. 조선시대에 와서 임진왜란 등으로 사세가 줄어 미륵전을 비롯해 40여 개의 산내 암자가 무너졌다. 고종 때에 미륵전과,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부처와 보살들을 모두 수용한 대적광전 등을 보수해서 한국불교의 특징인 통 불교적 경향을 반영하기 시작했다. 1934년에는 다시 대적광전과 금강문 등을 고쳐지었다.

 금산사 일대는 사적 제49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미륵전(국보 제62호)을 비롯해 보물급 문화재인 대장전, 석련대, 혜덕왕사진응탑비, 5층 석탑, 방등계단, 6각 다층석탑, 당간지주, 석등 등 보물 제828호) 등 대표적 문화재가 있다.

 금산사 산문 앞 다리 건너에 서면 전통찻집인 산중다원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  곳에 아름다운 순례길 7구간의 시작 팻말이 있다. 금산사 입구를 빠져나오기까지 아름드리 벚나무 가로수길이 터널처럼 펼쳐진다.      


    

금산교회 옛 건물은 남녀를 구분해서 앉도록 기역자 예배당으로 지어졌다.

 산사 입구를 빠져나와 모악산 도립공원 주차장을 지나면 마을 안에 옛날 교회당 건물을 간직하고 있는 금산교회를 만난다. 1908년에 건축된 금산교회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처음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전북지방문화재 제136호로 등록된 “ㄱ자” 예배당이 바로 그것이다. 처음에는 ‘팟정리교회’ 혹은 ‘두정리(荳亭里)교회’로 불렸고 금산교회라는 이름은 1930년대 이후에 붙여졌다.  

 금산교회 예배당은 한국식과 서양식의 건축특징이 병존해서 건축의 한국적 토착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예배당 안에는 초기부터 사용하던 풍금과 강대상, 강대 의자 등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ㄱ’자 예배당은 그 골조가 100년 동안 손상 없이 잘 보존되어 오다가, 2001년 봄에 옛 모습 그대로 대대적인 개보수 작업을 했다.

금산교회는 1905년 테이트(최의덕) 선교사가 전주에서 모악산 자락을 넘어 정읍을 다니는 동안 쉬어가던 마방(馬房)의 주인 조덕삼에게 선교를 하게 된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금광을 경영하던 집안의 아들인 김제 지주 조덕삼의 사랑채에서부터 금산교회가 시작됐고, 설립 1년 만인 1906년 유광 학교를 설립해  한글과 역사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나 일제 말 극심한 탄압으로 학교는 강제로 문을 닫았다.

 이 교회에는 반상(班常)의 벽을 뛰어넘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교회 건립의 주역인 조덕삼 장로 집에서 마부(馬夫) 노릇을 하던 머슴이 함께 교회에 다니다가 주인인 조 장로보다 먼저 교회의 장로로 뽑혔고, 나중에는 조 장로의 후원을 받아 평양신학교에서 공부를 해 이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바로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총회장을 세 번 역임한 이자익 목사다.      


동곡 약방이 있는 금평저수지 끝 동곡마을 전경

 금평저수지 삼거리를 지나 대순진리회 쪽으로 접어들면 저수지를 따라 길이 조성돼 있다. 10분 정도 걷다 보면 막다른 길 끝 동곡마을에 동곡 약방이 있다. 민족종교인 증산교의 성지다. 증산교 창시자인 증산 강일순이 1908년 동곡마을에 살던 김준상의 방 한 칸을 빌려 사람들을 치료했던 곳이다. 약방 뒤 대나무들은 증산이 심은 것이다.

 증산이 1901년 7월 도를 이룬 후 8년 동안 낡은 우주를 뜯어고치고 새 생명을 불어넣어 기틀을 새로 짜는 천지공사를 벌였다는 곳이며, 증산교의 사상과 활동이 구체적으로 발현된 곳으로 오늘날 민족종교의 원류를 찾는 많은 사람들의 참배 대상이 되고 있다. 유, 불, 선의 가르침과 음양 풍수 의술 점술에 통달했다는 증산은, 모악산 대원사에서 도통했다고 한다. 그는 하늘과 땅과 인간의 원한을 풀어주는 천지공사를 통해 앞으로는 좋은 세상이 오리라고 예언했다. 1909년에 추종자들을 모아놓고 동곡 약방에서 마지막 생을 마감했다. 증산이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증산교는 다른 민족종교들과는 달리 단일 종단을 형성하지 못하고 수십 개의 종단으로 나뉘어 있다. 그중 제일 큰 종단이 대순진리회다. 오늘날에는 증산교의 종파인 대순진리회가 동곡 약방과 인근 부지를 관리하고 있다.

 저수지를 따라 되돌아 나오면 증산법종교본원이 보인다. 강증산과 그의 부인의 유해가 안치된 곳이다. 증산법종교는 강증산의 딸과 사위가 창시한 증산교의 종파다. 증산교의 종파는 한때 100개가 넘을 만큼 번성했고 일제강점기 때에는 신도 수도 100만 명을 넘어 일제의 견제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도로를 따라 저수지 둑 옆으로 내려가면 김제시 금산면 소재지인 원평리가 보이는데 10분쯤 걸어가면 마을에 닿는다. 웬만한 시골 면 소재지보다 훨씬 넓게 자리 잡은 원평은 지금보다 옛날이 더 번창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만 하더라도 번화했던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로서 원평장 보러 몰려오는 장꾼이 차고 넘쳤다. 금구 대접주 김덕명의 근거지로 집강소가 설치되기도 했었다. 일제강점기 원평장터에서는 기미년 3월 20일 만세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인구 500여 명. 천주교, 기독교, 불교, 원불교가 공존하는 모습을 보면 그리 평범한 마을은 아니다. 이 마을에선 조계종의 학교법인 금산고등학교, 원불교 원평교당, 천주교 원평 성당, 원평 교회가 가까이 모여 있어서 차례로 둘러볼 수 있다.     

 원불교 원평교당은 소태산 대종사가 1925년 신설한 원불교 초기 교당이다.  70여 년의 교화 역사를 갖고 있는 원평교당은 소태산 대종사가 금산사에 행가, 신앙과 수행의 대상인 법신불일원상을 그려 보인 곳이라고 한다. 대종사는 금산사 미륵전 옆에 방 하나를 빌려서  팔산대봉도와 함께 짚신을 삼아 원평 장에 내다 팔면서 회상창립의 소중한 인연들을 기다렸다고 한다. 정산종사가 스승을 찾아 도를 구하기 위해 전라도에 와서 최초로 머물렀던 곳이라는 원평교당은, 대산 종법사의 은생지법생지로 대종경 편수 초안이 이곳에서 이뤄졌고 40여 명의 전무 출신을 배출한 터전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때는 야학을 운영해 마을 사람을 교육했고 신식 농법을 전수해 농업을 도왔다. 원평교당에는 30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순례자를 위한 숙소가 있어서 미리 연락하면 밥도 차려준다.

 원평 성당은 1938년 공소로 세워졌다가 나중에 1977년 수류 본당에서 분리되어본다으로 승격된 곳이다.  

 원평 교회는 테이트 선교사로부터 전도를 받은 정창화, 김기환 ,김영국 등이 수류면에 구봉리 교회를 설립한 것이 시초이며, 1930년 7월 원평리(현재 성계리)로 예배당을 이전하면서 원평 교회로 이름을 바꿔 오늘날에 이르렀다. 1930년 예배당을 이전하기 전 원평 교회 근처는 동학농민군 최후의 전적지(구미란)이기도 했다.     

 수류성당은 1800년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산속에 지은 성당으로 한국의 아픈 근대사와 함께 한 곳이다. 원평에서 화율리를 향해 하천 옆 제방길을 따라 5㎞를 걸어가야 한다. 직선으로 길게 뻗은 제방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작은 시골마을들이 예쁜 돌담길이며 논밭을 끼고 드문드문 이어진다.

 영화 '보리울의 여름'의 촬영지 화율초등학교를 지나면 언덕 위에 첨탑이 아담한 흰색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수류성당은 호남지역 3대 성당 중 하나라고 한다. 1800년대 초 전라도 지역은 조선 전역에서 박해받던 천주교 신도들의 피난처가 됐다. 1880년대부터 1910년까지 시기에는 교우촌이 여럿 형성되기도 했고, 박해를 피해 몸을 숨긴 이들은 산골에 성당을 만들었다. 1889년 건립된 수류성당도 그중 하나였다. 1895년 9월까지 모악산 깊은 골짜기에 있는 배재 마을에 자리 잡았다가 수류에 있는 전주 이영삼 진사의 20칸짜리 재실을 매입, 심산궁곡을 떠나 평야지대로 나왔다.

현재의 수류 성당은 1959년에 다시 지은 벽돌조 건물이다. 이전의 성당은 1906년 푸아넬(朴道行) 신부가 설계해 준공한 48칸의 목조 건물이었는데 그 모습이 익산 나바위 성당과 흡사했다고 한다. 이 목조 건물은, 1950년 9월 24일 주일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신자들이 모여 있는 성당에 인민군이 불을 질러 전소됐다.

이때 수류에 피난 와 있던 당시 전주교구장 김현배(발토로메오) 주교와 신부 8명, 수녀 14명이 체포돼 전주 교도소와 원평 교도소, 금산면 내무소로 압송되는 고초를 겪어야 했고, 50여 명의 신자가 순교했다. 수류성당은 동양권에서 가장 많은 신부를 배출한 곳이라고 하니, 천주교 사상 매우 의미 깊은 순례지이기도 하다.     

화율리 막다른 산골짜기에 자리한 수류성당. 뒷산을 따라가면 배재를 넘어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 쪽으로 <아름다운 순례길 구간>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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