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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인 May 17. 2021

만경강 이백 리 길

杏仁의 길 담화_ 만경강, 영욕의 역사를 밟다

만경강은  만경평야를 중심으로 하는 전북 북부 평야지대의 젖줄이다. 강줄기는 완주군 동상면 사봉리 657m 고지 남서쪽 밤샘에서 발원해  완주 고산, 전주, 익산, 김제, 군산까지 81.75km를 흘러 서해에 이른다. 전주 근교 고산천, 소양천, 전주천, 삼천 등이 만경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본류인 고산천은 밤샘에서 발원해 동상, 고산, 봉동, 삼례에 이른다. 천호산에서 발원한 화평천이 경천저수지 물과 함께 고산에서 합류하고, 만덕산 북쪽에서 발원한 소양천이 봉동읍 구만리에서 합류한다. 호남정맥 슬치 부근에서 발원한 전주천은 완주군 상관면 신리와 전주시를 관통하고 모악산 원안덕에서 발원한 삼천천과 만나 추천(楸川)이 돼 삼례에 이른다. 삼례는 본류인 고산천과 추천이 만나는 합수지점이다. 물줄기는 다시 흘러 익산 춘포에서 익산천을 합치고, 그 아래 김제 백구에서 부용천(芙蓉川)을 합치며, 미륵산에서 발원한 탑천(塔川)을 군산 대야에서 합친다.     


 발원지 밤샘이 있는 밤티(栗峙)는 밤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웃밤티(上栗), 아랫밤티(下栗)라 부르기도 한다. 밤티마을이 있는 사봉리(詞峰里)는 연석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고, 연석산 뒤쪽으로 운장산이 버티고 있다. 

 만경강 발원지는 지난 2001년까지 이름 없는 골짜기였다. 전북산사랑회(회장 김정길) 회원들이 만경강 유역 산줄기와 발원지를 찾아 발품을 팔며 고생한 끝에 2001년 7월 이정표를 세우고 밤티 이름을 따 밤샘이라 명명했다.      


만경강 줄기는 우리 역사에서 해상교통의 동맥이었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만경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주줄산 이북의 여러 골짜기 물이 고산현을 지나 전주 경내에 들어와 율담(栗潭)․양전포(良田浦)․오백주(五百洲) 등의 큰 시내가 되어 농사에 이용되기 때문에 땅이 아주 기름지다. 그리고 벼․생선․생강․토란․대나무․감 등의 생산이 활발해서 천 개의 마을 만 개의 마을의 삶에 이용할 생활필수품들이 다 갖추어졌고, 서쪽의 사탄(斜灘 만경강의 옛 이름)에는 생선과 소금을 실은 배가 자주 통한다. 전주 관아가 자리 잡은 곳은 인구가 조밀하고 물자가 쌓여 있어 경성과 다름이 없으니, 하나의 큰 도회지이다.”


 백제 부흥을 꿈꾸었던 견훤은 도읍 전주에서 이 강줄기를 따라 후당·오월 등 중국과 일본으로 사신을 파견, 해양교류의 통로로 이용했다.   강 상류에서부터 하류까지 곳곳에 산성과 사찰을 비롯한 문화 역사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고산천 상류지역은 백제의 수도 부여지역으로 연결되는 고대 육상 교통로여서 수많은 백제 산성이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 있다. 완주 화산의 고성산성을 비롯해 고산읍 주변에 포진해 있는 소향리 산성, 관동리 산성, 이전리 산성, 백현리 산성, 종리 산성 등 10여 곳이 백제 시대 석축산성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일대에 자리한 사찰들도 역사적 가치가 크다. 경천 화암사는 전주에서 경상도권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운주의 대둔산 안심사는 전주에서 충청권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화암사의 극락보전은 백제 목조 건축양식의 특성을 반영한 하앙(下仰) 지붕구조를 갖고 있는 유일한 조선시대 건축물이기도 하다. 안심사 부도전에는 수호신장상으로 남아 있는 조선시대 무인 석상 4기가 조선시대 무사의 복장과 무기 갖춤새를 보여주고 있다. 고산읍에 있던 봉림사지 유물 중 5층 석탑과 보물로 지정된 용문양 석등은 일제 때 일본인 농장주가 반출해 정원을 꾸민 것이 군산 발산초등학교에 있고, 본존과 협시보살 등 불상 3구는 전북대 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봉동과 삼례는 전통적인 수자원을 이용한 농경문화가 발달한 지역이다. 제언과 보 등 수리관개 시설의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삼례는 고려시대 이래 호남 최대의 역참이던 교통의 요지로써 만경강 물길이 열려있던 일제강점기까지 내륙수로의 거점이었을 뿐 아니라 고속도로, 철도, 1번 국도가 함께 통과하고 있다. 고려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해 나주로 갈 때 거쳐갔던 역이자, 1892년 교조신원을 위한 동학교도들의 삼례 집회가 열렸던 곳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시기 삼례는 전봉준 선생의 총지휘부가 설치되어 제2차 봉기를 준비하고 10월 공주를 향해 마지막 출전을 단행하였던 중심지이기도 하다.      


 자연경관과 생태적 다양성도 훌륭하다.  완주 경천의 신흥계곡은 우리나라 고유종인 뿔나비의 대규모 서식지이자 길이 아름답고 식생 분포가 다양하다. 회포대교에서 전주천 합류지점 삼례교까지 구간은 자연 상태의 식물군락이 폭넓게 분포하고 있다. 특히 소양천과 고산천이 만나는 신천습지는, 농업용 보의 영향으로 유속이 느려지면서 호소(湖沼) 생태계의 특성을 보이는 지역이다. 오랜 세월 퇴적물이 만든 하중도((河中島)는 철새들의 낙원이며, 가시연꽃을 비롯한 다양한 식물군락이 자라고 있다.

신천습지. 가시연꽃을 비롯한 다양한 식물군락이 자라고 있다.

 겨울철에 찾아드는 철새 또한 강 유역을 풍요롭게 하는 경관이다. 옛 시절에는 봉동 마그네 다리(용진면 신기리) 부근 선창가에 저녁노을을 받으며 황포돛배의 모습을 묘사한 동포귀범(東浦歸帆)과 삼례의 비비낙안(飛飛落雁)은 전주팔경으로 꼽히던 비경이었다. 아름다운 경치를 서로 시샘하며 내려다보듯 강줄기를 따라 비비정, 백구정, 척산정, 삼기정, 세심정, 망북대, 추천대, 유수정 등 정자 8곳이 서 있다.     

 

  만경강(萬頃江)이란, 우리 근대사의 수난이 담긴 한 많은 이름이다. 당초에는 만경강이란 명칭이 없었다. 이 강을 옛 지리지에는 신창진(新昌津) 또는 사수(泗水)라 했다. 1870년대 제작된 ‘대동여지도 총도’는 이 강을 ‘사수(泗水)’라 했고 1906년 완성된 ‘증보 문헌 비고’ 여지고(輿地考)의 산천(山川) 조 총설(總說) 호남 연해 제천(湖南沿海諸川)에서도 사수강(泗水江)임을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사수강은 공자의 고향 곡부의 강 이름이자 한나라를 건국한 한고조 유방의 고향인 풍패지역의 강 이름이다. 이 강이 유교문화의 발상지이자 왕조의 발상지를 상징하는 이름인 것이다. 


 만경강이란 이름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붙였다. 일제 강점기 만경현(萬頃縣)과의 인접성을 들어 일본이 임의로 설정한 명칭이 만경강이다.  

 일제는 강 상류에 당시 동양 최대의 농업용 댐 대아댐을 만들고 직강화와 농로·수리관개 시설을 집중적으로 건설해 강줄기를 변형시켜 근대농업 시스템을 설치했으며, 농산물 대부분을 일본으로 반출해갔다. 강 유역의 토지는 대부분 일반 농민의 경작권이 소유권처럼 보장되던 왕실과 관청의 토지였으나, 일제가 총독부에 그 소유권을 넘겼고 다시 일본인 지주에게 불하하여 대규모 일본 농장이 집중 육성된 지역이기도 하다. 

 수난의 역사를 거친 이 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만경강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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