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인 Jun 21. 2021

개암사와 우금산성

杏仁의 길 담화_내변산에 어린 역사 1

개암사(開巖寺)는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우금산성 아래 골짜기에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절 입구에 선 개암사 입석을 돌아서면 곧바로 아주 작은 표지판이 하나 서 있다는 점이다. 표지판에는 <동학 농민 혁명군 대장 우제 김기병의 묘 입구>라고 쓰여 있다. 행적비에는 부안 김 씨 김두회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탐관오리 등에 의해 민생이 도탄에 빠지자 결연히 동학군에 동조하여 일어났다고 한다. 전봉준과 함께 많은 전투에 참여했다고 하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

 개암사 일주문은 참 거대하다. 기둥을 받치고 있는 거북이 모양도 크기가 장정보다 크고, 모양도 화려하다. 기둥은 화려한 용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두 아름은 되어 보인다. 그 위에 있는 공포와 지붕은 무척이나 화려하다. 지붕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들은 특이하게도 12지신이 새겨져 있다. 기둥 두 개로 저 크고 무거운 지붕을 지고 어떤 비바람이 와도 넘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늘 신기하다. 

 일주문을 지나면 불이교(不二橋)이다. 불이(不二)란 ‘둘이 아니고 곧 하나’ 임을 뜻하는 말이다. 이 다리를 세운 사람은 무슨 뜻으로 ‘불이’라고 하였을까? 불가와 속세가 하나라는 것인가? 스님과 중생이 하나라는 것인가? 다리를 건너 속세에서 불가로 들어가는데, 다리가 이 둘을 이어 주니 하나라는 것인가?

 불이교를 지나면 차밭이 나온다. 아담한 차밭에 때마침 피어난 차꽃이 진한 향을 풍겨 준다. 

  옛날 변한의 왕궁터였다고 하는 개암사는, 서기 634년(백제 무왕) 묘련대사(妙蓮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내소사와 함께 부안의 불교를 지탱해 왔으며 민생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왔다. 

 개암사는 백제부흥운동 당시에도 부흥운동의 중심지로 큰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특히 우금산성에 있었던 백제인들에게는 남쪽 아래로 보이는 사찰이 확고한 정신적 지주가 되었을 것이다. 사찰을 바라보며 개암사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에게 매일매일 백제부흥을 기원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원효, 의상 두 고승도 개암사 뒤쪽 우금바위에 있는 우금굴에서 수도했다고 전해진다. 

고려말 조선초에 선탄선사(禪坦先師)가 사찰을 중창했고, 현종 때 부안 명기 이매창의 시문집인 �매창집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대웅보전(보물 292호)은 화려하고 다양한 용머리 장식과, 대웅보전이라는 현판 위의 도깨비 문양이 인상적인 건물이다. 

 개암사는 대형 괘불(掛佛)로도 유명하다. 홍색, 녹색, 금색이 돋보이는 강한 색채 대비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전반적으로 묘사가 세밀해 화려한 미감이 한눈에 들어온다. 괘불을 조성하기까지 공력을 기록한 화기에는 1749년 개암사 괘불 조성을 위한 시주 및 공양에 188명의 신도와 60여 명의 승려가 참여하였음을 적어 놓았다.      

 우금산성(전라북도 기념물 제20호)은 둘레 3,960m의 포곡식 석성이다. 660년(의자왕 20) 백제의 패망 직후에 백제부흥을 위해 항전했던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로서, 무왕의 조카 복신이 최후의 항전을 벌인 유서 어린 장소다. 임존성과 함께 우금산성과 백강은, 백제부흥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격전지였다. 

 이 성은 성 밖에서 공격하기에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어려운 반면 성안에서 방어하기에는 유리한 곳이다. 우금산성에는 백제부흥운동 당시 전망대 구실을 하였던 우금바위도 있다. 

 우금바위로 오르는 길은 처음에 순탄한 듯 보이지만, 곧 가파르게 이어진다.  이곳은 해발 322m의 작은 산이어서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오르는 등산객이 많다. 개암사에서 우금바위까지는 700m이고 오르는 시간은 30분 정도이니 가볍게 산행을 즐길 수 있는 산이겠다. 

 그렇지만 가파르게 이어지는 산길이 우습게 볼 일은 아니다. 등산로에는 자연이 만들어 놓은 멋진 풍경과 사람들이 길에 만들어 둔 돌탑이 작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길을 시작하는 지점에도 돌무더기로 만든 돌탑이 있고 위쪽에도 돌탑이 있다. 

우금바위에는 원효굴과 복신굴이 있다. 원효굴은 물기가 있고, 작은 바가지도 있다. 동굴 천장을 바닥 삼아 거꾸로 자라는 나무들이 어떻게 뿌리를 내린 것인지 신기하기만 하다. 우금바위에 올라서면 밑의 개암사와 함께 뒤편의 우금산성이 보인다고 했으나 멀리 우금산성은 우거진 숲으로 가로막혀 잘 보이지 않는다. 

 우금산성에서 북쪽으로 보이는 동진강은, 그 당시 치열한 격전지였던 백강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백강은 백제부흥운동의 또 다른 격전지로써 그 시기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이었던 백강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군사적인 전략지로서 요충지였기에 당나라 군사가 처음 들어올 때도 이곳 백강을 통해 들어왔으며, 백제와 왜가 나·당 연합군과 최후의 일전을 치른 곳도 백강이었다. 

 백제부흥운동 당시 복신의 구원 요청에 왜는 부여풍을 귀환시키고 군수물자도 공급해줬지만 파병은 지연됐다. 그동안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백제부흥군이 나·당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밀려 많은 성들을 상실하게 되고, 복신이 살해되는 내분이 발생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절박했던 부여풍은 다시 왜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이 상황에서 우금산성에 있던 백제인들은 북쪽 동진강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구원군을 기다렸을 것이다. 이들의 염원대로 왜의 구원군이 도착했고 부여풍은 백강 구로 직접 나가 구원군을 맞이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백제와 왜의 연합군은 나·당 연합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이 패배는, 백제부흥운동 실패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말았다.

작가의 이전글 만경강 이백 리 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