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인 Jul 05. 2021

십승지(十勝地) 우반동(愚磻洞)

杏仁의 길 담화_내변산에 어린 역사 2

  부안 변산(邊山)은, 정감록에서 전하는 우리나라 십승지(十勝地) 중 한 곳이지만, 정작 변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은 없다. 변산반도를 감싸고 있는 산줄기 안쪽을 내변산이라 하고, 바다 쪽을 외변산이라 할 뿐이다.


 병란과 기근을 피하기에 적합하다는 십승지의 땅 변산에서도 가장 명당이 우반동(愚磻洞)이라고 했다. 행정구역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지금은 우동마을이라 부르지만 옛 지명은 우반동이다. 우반동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였고 바디재 위에 올라서면 바다를 조망한다. 옥녀봉 아래에 자리를 잡은 우반동은 상여봉으로 연결되는데, 상여봉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남포리와 경계를 형성하며 좌청룡을 이루고, 옥녀봉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매봉을 만들어 우백호를 이룬다. 남쪽으로 천마산이 안산(案山) 역할을 한다. 천마산과 남포리 산 사이의 낮은 골짜기에서 실개천이 흘러나와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는데, 이 내를 장천(長天)이라 불렀다.  

 이렇게, 주변의 산들에 둘러싸인 분지가 풍수적으로 길지(吉地)를 이뤄 산수가 수려하고 신비와 기적이 숨겨져 있는 듯한 형세다. 

 우반동! 산과 바다와 기암절벽, 폭포, 강이 어우러진 선경(仙景) 속에 허균(許筠, 1569~1618)이 있고, 반계(磻溪) 유형원 (1622-1673)이 있었다. 17세기 중엽 조선 후기 사상의 조류를 만들어낸 심오한 철학과 사상의 현장이 우반동인 것이다. 이곳에서 허균은 그의 이념과 사상을 홍길동전(洪吉童傳)으로, 유형원은 반계수록(磻溪隨錄)으로 시대의 철학과 사상을 빚어냈다. 

 우동마을에는 400여 년이 넘은 당산나무가 있다. 마을을 지나 이정표를 따라 숲길로 들어서니 목책 길이다. 반계서당과 반계정 가는 길목에는 반계 선생과 실학을 알려주는 안내판들이 있다. 숲을 빠져나와 가파른 비탈길을 잠시 오르니 이내 반계서당이 나타난다. 머물렀던 집터와 서당은 가까이서 보면 몹시도 높아 보인다. 서당이 높아 보이는 것은, 반계 선생의 고결함 때문일까? 밖에서 볼 때는 몹시 높이 솟은 서당은, 막상 내부를 들여다보니 단정하고 소박하다. 툇마루 앞에서 내려다보니, 들판이 서쪽 바다에 잇닿아 평화롭게 펼쳐졌다.

 49세로 처형당한 허균이 가고 35년이 흐른 1653년, 유형원이 이곳 우반동을 찾아들었다. 이주한 이유는 선생의 8대 조인 유관이 조선 개국 원종공신으로 받은 토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반계라는 호도, 이 골짜기 이름 반계골에서 따 왔다고 한다. 반계 선생은 이곳에 서당을 짓고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전념하면서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저술했다. 
 서당 앞 안내판은, 선생이 32세 때 가족과 함께 이곳으로 이사해 167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다고 했다.  선생은 이곳에 묻혔지만, 묘는 나중에 선산인 경기도 용인으로 이장해 지금은 묘터만 남았다. 

반계 유형원이 말년에 머물렀다는 우반동의 반계 서당, 가까이서 보면 몹시 높아 보인다.

 반계서당을 나와 굴바위로 향한다. 마을에서 상서 바디재 길로 가다가 우동저수지를 끼고 왼쪽 길로 들어서니 절 하나가 나온다. 대불사 앞마당에서 거대한 바위를 직면한다. 굴바위다. 바위 틈에 살짝 굴이 보인다. 바위의 쪼개진 틈이 부서지면서 만들어진 풍화 동굴이다. 
대불사에서 굴바위 가는 길은 겨우 500미터 정도지만, 그래도 내변산 깊이 들어가는 등산로다. 울창한 숲길을 지나 목교를 건너 나아가는데 신우대가 무성하다. 신우대를 헤치고 걷다 보니 탁 트인 공간 앞에 굴이 나타난다.

 굴바위는 매우 커서 사람들이 100명은 들어갈 정도라고 하는데 깊이는 생각보다 얕다. 굴 천정에는 참샘이라고 하는 샘이 있었고, 은복지개(밥그릇 뚜껑)가 있었다고 한다. 복지개로 참샘 물을 떠마시면 모든 병이 낫는다고 해서 옛날에는 한센병 환자들이 많이 찾아왔었다고 한다. 안내판을 보니, 바닥의 바위에 귀를 대고 들어 보면 물 흐르는 소리, 파도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바닥에 엎드려 눈을 감고 귀를 대보았다. 기대가 부른 착각일까? 환청일까? 쏴아! 쏴아!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파도 소리 같기도 한 음향이 귓전에 울린다.


 우동저수지 건너편으로 선계폭포가 있다. 날이 맑을 때 선계폭포는 정확히 어딘지 찾기가 어렵다. 폭포는 비가 오면 분지에서 물이 쏟아져 나와 물기둥 폭포를 이룬다고 한다. 그러니 날씨가 좋은 날에는 통 폭포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곳은, 태조 이성계가 머물며 공부를 하고 무예를 익혔다고 해서 성계골이라 하는 골짜기다. 멀리서 보면 커다란 바위에 쭉 그어진 형상이 이성계가 수련하면서 낸 칼자국이라고 하고, 말발굽 자국도 있다고 했다. 

 허균이 부안의 '정사암'에 은거하면서 홍길동전을 집필했다고 하는데, 이 정사암의 위치가 바로 이곳이다. 선계폭포 위쪽에 옛날 변산 4대 사찰 중 하나인 선계사라는 절터가 있었다 하고,  세 봉우리가 감싼 절벽 위에 집터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폭포 앞 안내판은, 허균이 이곳에서 여류시인 이매창과 교유하며 우정을 나눴다고 전한다.  허균은 1601년에 부안의 명기 이매창을 만나 10년 동안 교유했고  1610년 매창이 죽자 이를 아쉬워하며 율시 두 수를 지어 남겼다. 허균의 시비가 부안읍 매창공원에 있다. 


 바로 이곳에서 허균은 홍길동전을 통해, '신분 철폐'라는 당시로서는 위험한 이상을 표출했다. 홍길동전이란, 신분 차별이 심했던 당시 사회 부조리를 비판하고 봉건적 가족 관계와 사회 제도에 대한 저항을 시도한 반사회소설이자 혁명적 소설이 아니었던가? 

 혼란했던 광해군 시절,  서얼들이 무사, 천인들과 동조해 차별에 대항하고자 했던 ‘칠서지변(七庶之變)’이 터졌다. 이때 허균은, 홍길동전을 빌미로 사건의 배후로 몰렸고 1618년 능지처참이라는 극형을 받았다. 이후 허균의 집안은 기울어 흩어졌고 1623년 인조반정 이후에도 복권되지 못했다. 

 허균이 이렇게 위험한 사상을 품어 표출해낸 곳이 변산반도였다. 시대의 이단아 허균은 이 우반동의 자연 속에서 시를 사랑하고 꿈을 읊었다. 바로 여기에서 시대를 가로지르는 사상을 품었으며 영혼의 단짝 매창과 마음을 나눴다. 

작가의 이전글 개암사와 우금산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