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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인 Jul 06. 2021

망해사는 더 이상 바다를 보지 못한다.

杏仁의 길 담화_바다를 잃은 새만금 바람길


수몰민의 눈물 계화도

계화도 양지 포구는 그 기능을 잃은 지 오래고 배들은 개펄에 오래 묻혀 있다.

부안군 계화면! 계화면을 지금도 사람들이 계화도라 부르는 것은 원래 섬이었기 때문이다. 육지가 된 것은 1963년에 벌어진 간척사업 덕분이다. 5년에 걸쳐 계화도와 부안군 동진면을 잇는 방조제가 만들어졌고, 그 안쪽에 2천 헥타르가 넘는 농경지가 생겨났다. 

 간척사업의 첫 시도는 일본강점기였다. 일본은 1944년 이 곳에 간척사업을 시도했지만 착공만 하고 지지부진하던 방조제 공사가 중단된 채 계화도는 계속 섬으로 남아 있었다.

 20년 후에 계화도 간척사업은, 임실의 옥정 댐과 같은 시기에 맞물린다. 1961년부터 1965년 사이, 섬진강 상류에 옥정 댐이 건설되면서 산골 첩첩이 숨었던 작은 마을들이 물에 잠겼다. 수몰민 2,786세대가 생겨났으나, 산골에서만 살아온 이들은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당시 정부는 이들을 어디론가 이주시켜야 했기에, 수몰민들을 계화도 간척지로 집단 이주시켰다.  

임실 산골에서 고추농사, 버섯농사짓던 사람들은, 간척지 평야에서 농사를 지었다.  짠 바람에 얼굴을 찢겨가며 힘겹게 농사를 지어보다가 더러는 이주비를 술로 탕진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젊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포구에서 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아가 보기도 했다. 서툰 솜씨로 조기를 잡기도 했고, 갯벌에 나가 갯것을 하는 재미도 익혔다.  그러나 바다로 가는 길을 새만금 방조제가 가로막으면서, 계화도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두 번 빼앗긴 셈이 됐다. 계화 양지 포구는 그 기능을 잃은 지 오래지만 아직도 커다란 배들이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다. 


심포항의 비극

 동진강 하구를 사이에 두고 멀리 계화도를 건너다보는 김제 심포항은 더 비극적이다.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는 만경강과 동진강이 서해와 만나는 지점이어서, 심포항은 조개 집산지로 유명했었다. 이곳 사람들에게 조개잡이는 주업이었고, 이 근방 갯벌에서 잡은 조개들이 심포항에서 전국 각지로 팔려나갔다. 조개구이집도 포구 주변에 즐비했었다. 그러나 심포항은, 양지 포구가 그렇듯이 더 이상 포구가 아니다. 

진봉과 심포의 들녘 또한 오래전 매립된 간척지였다. 일제가 1924년 진봉 방조제를 건설하고 고사리 앞 만경강 하구를 매립했다. 

 이 들녘에는 '새만금 바람길'이라고 하는 길 안내가 나있다. 진봉면사무소에서 시작해 망해사와 심포항을 거쳐 거전리에 이르는 길 10㎞를 김제시가 '새만금 바람길'이라 이름 붙이고 노선 중간중간에 안내판과 목책 길을 조성해놓았다. 30년 전에는 바다가 있었고, 너른 갯벌이 있었고, 조개를 캐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휑한 새만금 간척지가 황량하게 펼쳐진 곳이다. 워낙에 걷기를 좋아하는 터라 여러 해 동안 몇 번씩이나 찾아가 보곤 했지만, 이 들녘과 바다의 추억을 기억하고 있는 나로선 영 탐탁지가 않다. 
 ‘새만금’이라는 이름은 김제 땅 만경과 금만평야에서 비롯됐다. 금만평야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보이는 너른 들녘이었다. 지금은 그 지평선마저 부안을 향해 내달리는 자동차 전용국도, 서해안고속도로에 가로막혀 보이지 않는다. 

 ‘금만’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이 바닷가에 살던 사람들은, 새만금 사업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었다. 풍요로움을 가져다준 노다지 같은 갯벌도 사라졌고, 돈을 건져내는 황금 포구라 해서 ‘돈머리’라 부르던 심포항은 생기를 잃었다. 만선의 꿈과 넉넉한 망태를 채워준 갯벌은 사라졌고, 이 갯벌에 흐르던 어민들의 농요와 부지런한 호미질도 사라졌다.   


망해사 경내에 400년 넘게 자란 팽나무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구경거리이다.

망해사는 더 이상 바다를 보지 못한다.

 오래전 진봉 들녘을 헤집고 다니던 나는, 이제 이곳에 오면 망해사에 잠시 들러 옛일을 회상하곤 한다. 오월 초면 흐드러진 벚꽃이 어찌나 많이 떨어지는지 길목마다 꽃길이다.  망해사 입구로 올라서는 길목에는 유난히 이리저리 휘고 뒤틀린 소나무들이 여럿이다. 낮은 산임에도 언덕길은 꽤나 가파르다.  

지금은 바다를 볼 수 없지만, 망해사는 오랜 세월 진봉 바닷가를 지켜 온 절이다. 백제 의자왕 2년(642)에 부설거사가 개창했고, 경덕왕 13년(754)에 당나라 중도 법사가 중창했으며, 다시 조선시대 선조 22년(1589)에 진묵대사가 낙서전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망해사 부도탑은 위엄이 느껴지기보다는 작고 앙증맞아서 친근하다. 어느 분을 모신 것인지 안내판도 없고, 몸체에 쓰인 글자도 알아보기 힘들다.  정갈하게 쌓아 올린 돌계단 끝에 선 삼성각은, 단청도 화려한 장식물도 없이 단출한 세 칸짜리 건물이다. 삼성각에서 바다 쪽으로 보이는 종각의 모습은 바다 위에 떠 있는 듯도 하고, 바다를 맞이하는 것 같이 보이기도 했었다.

  팽나무 두 그루가 낙서전(樂西殿) 전면과 요사채 앞마당에 우뚝 서 있다. 수령이 400년을 넘어 전라북도 지정 기념물이다.  팽나무 밑에 있는 안내판에는 선조 22년(1589년)에 진묵대사가 낙서전(樂西展)을 창건하고 그 기념으로 심은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이 나무를 ‘할아버지 나무’, ‘할머니 나무’라고 부른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정자나무 가운데 느티나무 다음으로 많이 심어진 것이 팽나무인데, 바닷바람에 강해 바닷가 녹지 조성용으로도 많이 심는다. 

 새만금 바람길 안내 표지판을 따라 100m쯤 가파른 오솔길을 걸어 올라가면 전망대가 서 있는데 여기에 올라서면 사방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진봉면은 대부분 평야지이고 그나마 높은 진봉산조차 해발 72m다. 산이라기보다는 언덕에 가깝다. 

 왼편에 심포항이 내려다보인다. 포구로서 활기를 잃어버린 심포항의 풍경은 적막하다 못해 스산하다. 심포항의 배는 새만금 방조제에 가로막혀 갈 곳을 잃었는데, 바람은 막힘도 없이 서해와 새만금을 가로질러 금만평야로 밀려간다. 멀리 바다 쪽으로 신시도 월영산과 대각산이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늦은 봄날 망해사는, 벚꽃이 흩뿌려져 길목마다 꽃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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