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가득한 세상에서

나는 NPC(Non Player Character)인가

by 한그리 유경미

어느 날 고속도로를 들어섰을 때, 자동차들은 무채색으로 가득했다. 가장 많은 것은 흰색 차였다. 깔끔하고, 환한 느낌의 흰색은 눈에 띄었다. 검은 차도 의외로 많았다. 세련된 느낌으로 검은색의 차는 고급스러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차를 구입할 때 유채색을 잘 선택하지 않는 경향이 많다고 느꼈다. 그때, 많은 차 사이에 보이는 밝은 파랑의 SUV가 눈에 띄었다. 도로 위의 주인공 같았다.

결혼 후 처음으로 새 차를 구입하기로 했다. 중고가 아닌 새 차를 구입하는 거라 신중하게 색상을 고르는 일에 눈길을 두었다. 색상이 다양한 자동차들은 출고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검정, 흰색, 회색 중 하나를 골라야 빨리 차를 탈 수 있었다. 선택의 폭은 다양하지만, 빨리 타고 싶은 마음에 무채색 중 회색을 골랐다. 검정색은 야간에 주차하기 잘 보이지 않는다고 반대한 남편과 흰색은 청소하기도 어렵고 흰색 유지가 어렵다고 반대한 나의 의견의 타협점이었다. 다음에는 반드시 예쁜, 밝은 색깔의 차를 사리라 다짐했다.

10여 년 전 두 번째 차를 구매할 기회가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색을 입은 차로 도로를 달리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도 타고 있는 두 번째 차 역시 회색이다. 가장 무난한 색이라는 판단에서다. 중립의 느낌이 들어서인가. 결정의 보류이기 때문이었을까. 다시 회색은 내 마음을 잘 알지 못해서인지도 모른다. 선택 장애라는 말을 사용할 만큼 나는 가끔 결정을 못 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한다는 의미에서 남은 선택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나의 결정을 다시 마음속으로 접어 넣어두는 내 마음이 진정 옳은 일인가 요즘 고민을 하게 된다.

‘아침엔 우유 한 잔 점심엔 fast food’로 시작하는 넥스트의 ‘도시인’이라는 노래를 알고 있는가. 사람들 가득하지만 외로운 도시 생활을 그리는 빠른 멜로디의 노래다. 가사 중에 ‘직장인의 전쟁터 회색빛의 빌딩들, 회색빛의 하늘과 회색 얼굴의 사람들’이 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도시는 같은 분위기다. 그러나 도시를 동경해서였을까. 나에게 회색빛의 도시는 뭔가 시크하고 멋져 보였다. 먼저 나서지 않는 익명성이 보장되는 도시로 숨어들고 싶었던 건 아닌지.

나는 NPC(Non Player Character)인가, 주인공인가. 게임 세상에서 순응하며 살고 있는 NPC야말로 참된 도시인은 아니었는가. 주체적으로 나설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된다는 것은 그와 같은 사람이 아니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다. 주인공이어야만 한다.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역사는 조용히 이루어지고 있다. 알지 못하는가. 내가 없다면 내 인생의 역사는 의미가 없다.

이제는 내 선택에 나의 색깔을 입히고 싶다. 다음에 차를 구매할 기회가 된다면 이번엔 기필코 예쁜 컬러의 자동차를 반드시 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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