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옷만 옷장 가득

표현을 못하는 여자

by 한그리 유경미

어느 날 옷장 문을 열었다. 검은 원피스, 검은 가디건, 검은 바지, 검은 블라우스 등 검은 옷만 가득하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검은색을 좋아했던가.

나의 검은 옷의 최초는 검은 재킷이다. 검은색은 단정하다. 청바지와 티셔츠에 검은 재킷만 입어도 튀지 않고 좋았다. 자연스레 분위기를 단아하게 만들었다. 그때는 옷이 마음에 들었다. 옷이 다양하지 않아도 검은 재킷 하나면 충분했다. 무얼 입어도 재킷으로 완성되는 멋이 있었다. 단출한 재킷으로도 돈 없는 서러움 생각은 접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고민은 옷으로 연결됐다. 아이를 하나 낳을 때마다 내 배에는 나의 살도 한 아이씩 있었다. 곳곳에 숨은 살을 숨기고 싶었다. 살찐 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운동을 하는 것도 아이를 키우면서 한계가 있었다. 검은 옷은 나의 실루엣을 감추었다. 피곤한 육아에 검은 옷 사이로 나의 늘어진 자존감을 감추었다. 살을 빼지도 못하면서 감추고 싶은 그때의 나는 늘 소심했다.

행사를 갈 때, 결혼식에 갈 때도 검은색 옷을 걸쳤다. 꾸밀 줄도 모르는 나에게 검은 옷은 만능이었다. 단정하고, 깔끔하며 눈에 띌 일이 없다. 어디에서나 나를 감추는 일이 당연했다. 그림자 옷 같달까. 그림자 옷으로 입고 나서 어색하게 이야기를 해야 할 상황도 많지 않았으니, 나를 드러내지 않아도 됨이 감사했다.

나이가 들면서 장례식 갈 일이 많아졌다. 검은 옷을 자연스레 꺼냈다. 내게 산더미의 검은 옷들이 덮쳤다. 검은 산은 내 과거를 모두 하나로 모아 쌓아 뭉갰다. 갑자기 검은 옷을 입는 일이 싫어졌다. 오랜 삶을 마치고 세상을 등지는 분에 대한 예의로 입는 검은색에 나를 맞춰 입었나 보다. 우리네 세상에서 살 때만큼은 이제 검은색보다 더 밝은색을 입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의 전환이 일어났다.

정말 세상에는 다양한 색이 많다. 검은 옷만 입고 사는 내가 안타까웠다. 나는 그림자가 아님을 나부터 알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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