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視線

2021년 여름호(아이와나1)

by 한그리 유경미

내 눈은 컴퓨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자료를 찾아 프린트를 해서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함이다. 이상하게도 그날은 마우스 선택이 되지 않고, 원하는 대로 자료를 찾을 수 없어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참동안 컴퓨터와 씨름하여 자료를 뽑았다. 그때 시선이 느껴졌다. 사실 아까부터 이마는 따끔따끔 했을 수 있다. 외면하면서 내 할 일을 해야만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개를 들어 이마에 눈총을 쏜 방향을 바라보았다.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맨 앞자리에 앉아 선생님인 나를 한없이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아이였다. 동그란 눈망울은 나를 향해 있고, 조몰락거리는 손에는 작은 클레이 덩어리가 뭉개지고 있었다. 며칠 째 그 모습이었다. 관심을 원하는 학생과 한 명만 바라봐줄 수 없는 선생님 사이 무언의 줄다리기는 계속되었다. 누군가의 시선을 받는다는 것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


초등학교 시절, 나는 부반장을 도맡아했다. 부반장 업무는 아침마다 우리 반 교실 칠판에 한자를 써놓기다. 한 획, 한 획, 조심스럽게 적고 뜻과 음을 달고 풀이를 쓰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이 하나를 위해 십 리 정도 되는 학굣길을 마다하지 않고 더 일찍 일어났고, 텅 빈 교실에 들어와 제 할 일을 했다. 내가 친구들에게 한 가지의 도움이라도 된다는 일이 즐거웠다. 쉬는 시간에 모르는 문제를 풀면서 해결해주는 일은 행복이었다. 쓸모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에 한 없이 기뻤다.

한 학기가 끝나갈 즈음, 롤링 페이퍼 시간이 주어졌다. 롤링 페이퍼는 1년의 느낌을 한 장의 종이에 여러 명이 돌아가며 적는 짧은 편지다. 반 친구들의 정성스러우면서도 스피디한 손놀림은 기분 좋고 즐거운 한 해였음을 말하고 있었다. 한참 만에 우리 반 친구들의 손을 거쳐 온 내 종이를 받았다. 무슨 내용이 담겨 있을까. 함께 한 친구들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신나게 적은 글들을 훑어보았다. 대부분 내년 한 해의 덕담을 담은 글이었다. 역시 멋진 한해였음을 모두 느끼고 있었구나.

집에 돌아와 우정의 종이를 다시 펼쳤다. “우리 내년에도 친하게 지내자, 오래 친구가 되면 좋겠어, 안녕? 나는 00야” 등 함께 한 추억을 이끄는 문장이 나를 현혹시켰다. ‘그래, 내가 정말 올 한해 부반장을 잘해서 이렇게 친구들이 좋아 하는구나.’ 라고 말이다. 눈으로 읽는 중 시선이 한 곳에 머물렀다. 이름을 적지 않은 누군가가 쓴 문장이었다.

‘잘난 척하는 네가 정말 싫어.’

내 행동이 거슬린다고 생각한 친구도 있었나보다. 자만심이 지나쳐 누군가를 아프게 했는가.

난 한 번도 잘난 척한 일이 없었다. 정말로. 누군가를 가르치고, 도와주는 일이 내 인생의 큰 즐거움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나를 아프게 한 그 문장이 거슬렸다. 밥을 먹으면서도, 부모님과 이야기를 하면서도, 졸업을 하면서도,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도 잊히지 않았다. 내게 문장을 적으면서도 그 아이는 얼마나 기분이 나빴을 것인가. 나의 선의가 친구에게는 시선받기를 좋아하는 잘난 척 하는 애로 비춰졌을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나는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없이 작아졌다. 한 문장을 잊고자 했지만 쉽지 않았다.

기억 속에서는 잊었지만 몸은 잊지 않았던가. 몇 해 전, 물건을 정리하다가 롤링 페이퍼 종이를 발견했다. 아, 그랬었지. 예전의 나를 회상하면 무슨 일이든 남의 시선에 갇히기 싫었다. 표적이 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중간 어디쯤의 내가 좋았다. 열심히 하더라도 눈에 띄지 않는 중간자로서의 삶에 만족했다. 내가 나서기라도 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거나 피해를 입힌다거나 하면 나로선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라 여겼다.

다른 사람을 왜 의식하며 사느냐고 말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미 내 삶 속에는 어느 순간부터 눈치가 젖어들어 있었고, 타인의 시선 속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내 판단은 주변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그 결정이 어떠한 파장이 되는지 눈치로 살펴 살아왔다. 어느 순간엔가 난‘눈에 띄지 않는 키 큰 아이’로 남아 인생을 그렇게 겪어내고 있었다.

돌고 돌아 나는 또 누군가로부터 시선을 받는다. 이번엔 따뜻한 눈짓을, 사랑 가득한 관심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그 눈은 말하고 있다. 이제는 그래도 된다고 위로의 말을 전하고 있다.


에세이포레에서 처음으로 연재를 시작했다. 8회차에 걸친 한 주제에 맞는 연작수필이다. 이때부터 수필에 대한 생각들을 조금 더 짜임새 있게 쓸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내 수필들의 주제는 '아이와 나'이다. 아이들의 모습들을 통해 나를 발견하는 수필들을 모아 연재한 글들이다. 수필을 쓰면서, 특히 연재를 하면서는 나를 돌아보는 일이 조금은 익숙해졌다.

여전히 나는 중간의 어디쯤에서 헤맨다. 열심히 노력해도 선두에 다가갈 수는 없었다. 그건 내 한계였다. 그러니 중간에서 숨어 있는 것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내 스스로 자초한 일인지도. 그래서 우리의 아이들에게 선두로 달려가라는 식의 훈계를 할 자신이 없었다. 나 자신도 나서다 자만함에 빠져 그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을지 모른다는 보이지 않는 시선을 감당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저 조용히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편이 빠를지도.

시선은 남을 의식하는 내 모습의 근원을 찾아가는 수필이었다. 시선을 좋아한다기보다 시선에서 더이상의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의 원인이랄까. 10대의 어느 날, '키가 커서 미스코리아 나가도 되겠다'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는데, 내 생각은 '이쁘지도 않은데 뭘 나가'였다. 자존감이 떨어진 그때의 나는 키만 큰 바보였다. 물론 내 외모가 특출나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 '아, 그래? 한번 나가볼까?' 정도는 답해도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이 요즘 든다. 우스갯소리로라도 넘길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그런건 못해'였다.

아무것도 못하는 나에서 무언가 할 수 있는 나로 변화하는 건 전환점이 필요하다. 내게 그 전환점은 늘품꿈터에서 일하면서였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아이들이 따뜻하게 보아주는 모습이 정말 좋다. 아이들은 사랑스럽다. 그래서 미래의 행복을 위해 아이들은 행복해야만 한다. 아이들의 예쁜 시선을 받는 내가 다시 커질 수 있는 계기로 현재의 나로 올라가고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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