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그림

2021년 가을호(아이와 나2)

by 한그리 유경미

“선생님이에요.”

아이는 수줍게 웃으며 나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이미 며칠 전에 그림 한 장을 받은 적 있었다. 둘 다 같은 아이가 나에게 준 그림이다. 함께 생활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지만, 나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려주고 싶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다고 말하며 그림을 받아들었다. 첫 번째 그림과 두 번째 그림의 내 표정이 사뭇 달랐다.

처음 받은 ‘선생님 얼굴’은 괴물 같았다.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첫 느낌은 그랬다. 내 눈은 작아서 동그랗지 않다. 그럼에도 그림 안의 눈은 동그랗고 위에 커다랗게 작대기 하나가 덧그려졌다. 눈썹인가 하고 이해해 보려 했으나 인상 쓰는 표정으로만 보였다. 어릴 적 그리기 놀이를 했던 해골바가지 노래가 떠올랐다. ‘아침 먹고 땡, 점심 먹고 땡, 저녁 먹고 땡, 창문을 열어보니 비가오더래. 지렁이 세 마리, 아이고 무서워 해골바가지.’ 그림그리기 어려울 때 재미로 많이 그렸다.

입에는 마스크를 했다. 그림 속 마스크는 어려운 현실 속 나의 첫 이미지였다. 코로나는 아직까지도 우리를 마주하지 못하도록 마스크로 거리를 두게 했다. 더군다나 그냥 마스크가 아니었다. 마치 미라의 붕대를 두른 것처럼, 아니 어쩌면 프랑켄슈타인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마스크의 끈 모양인 가장자리 선은 내 얼굴을 두 조각으로 나뉘어 놓았다. 게다가 마스크 겉에는 호랑이가 먹이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는 듯 날카로운 이가 줄지어 있었다. 머리 위 양쪽에는 그나마 귀여운 두 개의 뿔이 나 있었다. 너희들 눈에는 내 첫인상이 그리도 험악하고 괴팍했던 것인가.

반면 두 번째로 준 ‘선생님 얼굴’그림을 보았다. 세상 명랑하고 귀여운 얼굴이었다. 작은 눈에 속눈썹을 이어 그려주니 눈웃음을 치는 게 분명하다. 항상 웃으려 했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아이들 앞에서 화를 내지 않고, 즐거운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애쓰고 웃으려 했다. 그림 속 모습엔 춤추듯 팔을 구부리고 있었다. 내가 무언가 활동하는 모습이 좋아보였을까. 그림 속 선생님 옆으로 네 명의 아이들이 함께 서 있고, 모두 즐거워 웃고 있었다. 처음 보았던 프랑켄슈타인의 오해가 풀리는 듯 했다. 그림에 정성이 묻어나는 마음이 보였다. 좋았다.

선입견이 사라진 초상화였다. 정녕 같은 아이가 그린 그림이 맞나 싶었다. 처음 그림을 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정성 하나 없이 대충 그리고 나에게 준 첫 그림 속에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지 모른다. 아니, 나에게는 관심도 주지 않으리라 다짐이라도 하듯이 이 그림을 준 것은 아니었을까. 보란 듯이 나에게 주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난 아이의 마음을 움직였다. 적어도 변화는 만들어냈다고 안도감을 내쉬었다.

두 번째 그림은 정성이 뚝뚝 떨어졌다. 눈 하나를 그리는 데도 진한 연필심을 여러 번 색칠해서 번지지 않게 조심했다. 단발 생머리를 한 번이 아닌 여러 번에 걸쳐서 선을 그어 주었다. ‘선생님’이라는 글자 역시 이중으로 써서 더욱 정성을 쏟았음을 알 수 있었다. 꽃과 하트가 배경을 날아다니니 나의 기분도 날아다녔다. 그동안 나와 아이들의 관계가 얼마나 나아졌는가를 확인해볼 수 있는 그림일 수도 있겠다. 뿌듯했다.

아이와나2두번째그림.jpg 첫 번째 그림(왼쪽)과 두 번째 그림(오른쪽)

얼마 전, 국립현대미술관에 간 일이 있다.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라는 제목의 전시였는데, 그곳에서 시선을 끈 한 초상화가 있었다. 화가 구본웅이 소설가인 이상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었다. 구본웅은 이상과 같은 동네에서 살면서 폐결핵에 걸려 방황하던 이상을 보살피고 취직까지 시켜준 사람이란다.

1935년 작품인 ‘친구의 초상’을 유심히 살폈다. 내가 느끼던 이상과는 달랐다. 내게 이상은 편집증이 있을 것만 같고, 정신적인 문제로 머리는 헝클어진 채 부스스하고 약만 먹을 것 같은 졸린 눈꺼풀이 있을 것만 같다. 상상 속 이상은 그의 문학작품을 생각나게 한다. 하나같이 괴짜 같고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특이함이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이 그러했고, <오감도> 속 13인의 아해가 지나가는 것 자체도 일반인은 전혀 이해불가다.

작품 속의 이상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날카로운 눈매와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붉은 입술이 시선이 간다. 얼굴형 자체도 뾰족하고 말랐으며, 전반적으로 마른 체형이다. 어수룩한 수염으로 자유분방해보이면서도 진한 눈썹이 그의 자존심을 말해주는 듯하다. 구본웅은 본인의 신체적인 문제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그리 표현했을까. 키 작은 자신의 체형도 마음에 들지 않아 친구인 이상을 모던보이로 표현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구본웅의 시각에 담긴 이상은 예리하고 세련된 도시남자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구본웅 자신의 상황이 나았다면 이상을 그렇게 그릴 수 있었을까.


언제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림은 달라진다. 같은 사람이라도 마음은 늘 다르다. 두 번째 그림 속으로, 아이의 마음을 엿보러 이야기 길을 떠난다.


흔히 사람은 자신이 보는대로 믿는다고 한다. 나조차도 누군가를 처음 보았을 때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그래서 어쩔건데?'라는 표정으로 마음을 담지 않고 사람을 대할 때가 많다. 늘품 선생님을 할 때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야 하므로 기본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서 아이를 상대하려 애쓰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아이들 역시 나처럼 관심도 없는 교실을 지키는 사람쯤으로 여긴다. 그래서 서로의 이해할 수 있는 아이스브레이킹 시간이 필요하다.

내 마음을 진심으로 털어놓을 수 있는 시간을 아이가 준다면 다행이다. 바라보지도 않고, 외면해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비어 있는 시간동안 본인이 좋아하는 폰을 할 수 없게 한 후 자기는 하고 싶지도 않은 만들기나 책읽기를 시키니 나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 마음들을 알아채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나 역시 성장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지금은 아이들이 돌봄교실에서 건강하게 있다가 갈 수 있도록 대체근무를 하는 중이다. 단기 대체여서 노는 시간도 많다. 그럴 때 나는 나를 살피며, 수필을 쓰며, 마음을 정진한다.

여러 초등학교에서 대체근무를 다니면서 매번 새로운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고, 며칠 후 헤어지는 일을 반복하면서 느낀 점은 '아이들은 각자 늘 이쁘고 사랑스럽다'이다. 표현을 잘 하지 못하는 아이도 눈마주치고 웃으며 인사하면 함께 인사해준다. 표현을 잘 하는 아이들은 처음 본 나에게 이쁘다고 칭찬을 해준다. 그럼, 반갑게 고맙다고 인사한다. 이름 하나하나 기억하는데 3일은 걸리는 사이에 나는 아이들과 이별을 준비한다. 며칠 전에는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같은 교실에서 아이들을 만나기도 했다. 운이 좋았고, 그 아이들과의 일상을 잊지 못할 정도로 행복했다.

아이들은 모두 이쁘다. 마음을 나에게 언제 드러내는가는 나의 노력여하에 따른다. 웃으며 다가가면 침 뱉는 아이들은 없다.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아이들 몇 명만 있다. 그런 아이들을 위해, 어린이는 모두 행복해야 한다는 믿음을 이어가려 나도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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