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호 겨울호
1
유난히도 따뜻한 날 너를 만났지. 소리소문없이 나에게 다가와 네 존재를 알리더구나. 그도 그럴 것이 넌 말이 없었어. 나에게만 말을 하지 않는 줄 알고 서운해할 뻔 했단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선택적 함구증이라고 다른 사람을 통해 들었어. 나에게 말이 없이 빤히 쳐다보던 게 그런 이유였구나. 아직은 너의 입김이 나에게 전달되지 않으니 알 수 없어. 봄은 왔지만 아직도 차가운 기운이 남아 가끔 서리도 하얗게 내리곤 한다. 입춘이어도 봄은 아직이라 생각이 들 때 있잖아. 겨울 찬 바람이 너를 아프게 해도 그건 아직 너와 내가 친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해.
봄아, 괜찮아. 아직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은걸.
2
첫 만남으로 모든 것을 알기는 어렵단다. 너도 날 알지 못하겠지만, 대신 조금씩 다가갈게. 봄이 왔으니 꽃이 피는 건 당연하잖니. 너는 눈짓으로 나에게 알린다는 걸 이제야 조금 깨닫고 있어. 그래서 더 크고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고 내 마음이 너에게 닿기를 바라며 웃는단다. 무표정에 말은 없지만, 조금씩 네 존재를 터득해 보려 해. 봄은 이미 여기 있는걸. 알고 있지? 봄이면 씨앗을 뿌려. 나는 너에게 새로운 작물을 보여주려고 땅에 씨앗을 심었어. 네 엄마는 이미 사랑의 씨앗을 심으셨겠지. 나는 믿음의 씨앗을 심었단다.
봄아, 나는 널 믿기로 했어.
3
어느 날 네가 내 말에 귀 기울여 들었다는 걸 알았어. 너의 표정을 보았어. 굳은 너의 눈에 작은 파도가 치는 걸 난 느꼈지. 폭풍우를 몰고 오는 파도가 아니라 봄 햇살에 잔잔히 흐르는 물결이라고 해야 할까. 그 파도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궁금해졌어. 봄바람을 실어 오는 남쪽부터였는지, 태양과 함께 나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동쪽이었는지 말야. 너의 눈 속 파도에 내 몸을 맡겨 봄이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졌어. 흙 속 지렁이에게도 알려줄 촉촉한 봄비 소식이 아닐까 하고.
봄아, 너의 반짝이는 눈이 궁금해.
4
봄꽃들과 인사하다가 너의 눈이 마주쳤어. 재잘대는 봄꽃들은 자기가 원하는 걸 바로 말해서 들어주기가 쉬웠어. 그런데 봄 너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나만 바라보는 거야. 내게 원하는 게 무언지, 원하는 게 없는지, 알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답답하단다. 너에게도 나비 한 마리가 다가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나는 너를 열심히 바라보고 있어. 푸른 잎이 돋아났는지, 너의 눈길에 봄눈은 녹았는지, 너의 터치에 시냇물은 졸졸 흐르는지 살펴본단다. 혹시나 겨울바람이 널 못 알아봐서 툭 치고 갈까 봐 조마조마해.
봄아, 내가 다가가볼게.
5
너와 내가 만난 건 운명이 아닐까. 너도 그냥 봄이 아닌 봄꽃이 되고 싶어할 것 같았어. 종일 재잘거리면서 여느 꽃처럼 봄을 느끼면서 그렇게 계절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면 좋지 않을까. 땅을 일구는 농부처럼 너를 향해 아낌없는 믿음을 보내면서도 그 사랑을 받아내며 웃어줄 너를 기다린다. 괜찮아. 너와 나의 운명의 바퀴 안에서 원하는 것들을 알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해. 주변 사람들은 몰라도 상관없어. 마음 편하게 생각해보자.
봄아, 너의 마음이 편해지길 기다려볼게.
6
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여름이 오고 있어. 꽃을 피울 때가 온 거야. 나도 이제 너를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 너의 목소리를 들려줘. 내 귀에 작게 소곤거려도 좋아. 진짜 목소리가 아니어도 괜찮아. 바람처럼 살랑대며 스쳐도 된다고. 네가 여기 있었다는 걸 주변 사람들도 알았으면 좋겠어. 겨울이 바로 여름으로 지나가지는 않으니 말이야. 너 혼자 힘들다면 말해줄래? 꽃 하나 피울 수 있는 힘을 내가 보탤게.
봄아, 너를 알려줘.
7
나에게 무언가를 알려주고 싶구나. 내가 너에게 손을 내밀었지. 그래, 말하지 않아도 된단다. 넌 내 손에 살랑이는 손가락으로 원하는 걸 적었지. 순간 꽃향기 가득한 감촉과 향을 느꼈어. 봄은 정말 강력하다고.
고마워, 봄아. 여름은 왔어.
짧은 돌봄대체 기간 동안 만났던 아이의 얼굴이 생생합니다. 동그란 얼굴에 호기심 가득한 눈이 큰 아이였죠. 선택적 함구증이라는 증상에서 알 수 있듯이 아이의 목소리는 듣지 못하고 떠나왔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낯설어서, 두번째 만났을 때는 어색해서, 세번째 만났을 때는 이해의 빈 공간이 많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만날때 즈음엔 상처를 줄까봐 말을 하지 않은 건 아닐까요. 그래도 그 아이의 웃는 모습은 보고 일정이 끝났습니다. 정말 다행이었죠.
대추나무처럼 봄이 왔는데도 싹이 소식이 없는 식물을 보면 기다리기 힘듭니다. 빨리 싹을 틔우고 성장해야 하는 시기이니까요. 하지만, 느린 녀석들이 꼭 있습니다. 모두가 제 시간에 맞게 깨어나고, 발빠르게 움직이는 건 아닙니다. 제 성격은 빠르진 않지만, 미리미리 하는 성격이라 참고 있다가 터트리는 봉오리를 보면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성토할지 모릅니다. 그때 기다려야 한다는 걸 깜빡 하고 말이죠. 나이들수록 그런 면은 조금씩 이해를 하는 방향으로 흐르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봄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스라치게 추운 겨울도, 해에 녹아버릴 지경인 여름도, 쓸쓸해지는 가을도 별로인 이유가 봄은 조금 추워도 여름이 올 수 있다는 기대감에 즐거운 마음이 자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봄은 잘 버텨낸 겨울의 결실이기도 하니까요. 다시 그 아이를 만나게 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