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여름 11

2. 붉은 여름 5

by 지승유 아빠

기지로부터 5km 지점에서 차량을 멈췄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외부활동은 승인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일행은 30일 이상 활동할 수 있는 보급품을 지니고 있었다. 여과기는 전기만 있다면 얼마든지 호흡이 가능하게 해 줄 것이었고, 물공급 장치 또한 마찬가지였다. 원래 허가받은 계획대로라면 외부 활동자는 48시간 이상 외부활동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석현 일행은 언제까지일지 알 수 없는 활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석현은 일단 외부 송신기를 끄고 차량의 설정을 수동으로 바꾸었다. 지금까지는 미리 깔려 있는 전자기 레일에 따라 차량이 반자동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지금부터 그들은 전자기 레일이 작동하지 않는 수 km를 왕복해야 했다. 거기다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지각활동에 의해 안정성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속도도 제한을 걸어야 했다. 모든 통신을 중지했기 때문에 당장 우리의 불법행위를 알아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위성사진은 몇 시간 뒤에 지구에 도착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의 위치가 발견되었을 때, 그 행동에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그들의 조난당했을 경우 구조할 사람도 역시 없었다.


차량은 원래 레일이 깔려 있는 구간을 아주 느린 속도로 지나가기 시작했다. 원래 대로라면 레일 위에 자기장을 감지해서 차량은 자동으로 이동했어야 했지만, 레일에 전기를 공급해야 하는 기지가 사라졌기 때문에 레일은 작동하지 않았다. 레일은 훌륭한 길잡이는 되어 줄 수 있지만, 안전함에 대한 확신을 줄 수는 없었다. 기지가 함몰하는 과정에서 주변 지반의 침식이 진행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고, 실제로 원인을 알 수 없는 지각변동을 이미 겪어보았다. 그랬기 때문에 차량은 아주 신중하게 전진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필요한 말 이외에 대화는 없었다. 모터는 기계음을 내며 바퀴를 움직여갔고, 건조한 대기는 이따금 차량의 창에 와서 부딪혔다. 누군가는 생존자에 대해 생각했고, 누군가는 생존하지 못한 자들을 생각했으며, 누군가는 끝없는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 지반은 약해져 있었지만, 그들은 별문제 없이 거대한 구덩이 앞에 도착했다. 이탈한 지 세 시간이 지났고, 지구로 따지면 정오쯤 되는 시간이었다.


"이 단면은 시추의 흔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깨끗합니다. 그리고 통상적인 굴착 과정에서 보이는 흔적들을 전혀 찾아볼 수 없어요."

병기는 단면을 손으로 만지며 말했다. 단면 아래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떨어져 내릴 수 있다는 공포심에 병기는 차량과 자신을 연결하고 있는 안전장비를 한 차례 당겨보았다.

"본 적이 있습니다. 이것과 유사한 흔적을. 이지스함에 창작된 레이저 무기 시현장에서 입니다. 레이저가 닿은 부분이 이렇게 깨끗하게 녹아내린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실상 그건 편견입니다."

석현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레이저는 사실 절단면에 흔적을 남깁니다. 그을린 자국이나 특정한 결 자국을 남기죠. 소재에 따라서 열에 그을린 부분이 돌출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레이저를 사용한 후에는 추가 작업을 해야 합니다. 무기의 경우에는 열이나 강도가 더 심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더 많은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이건 레이저나 열을 이용한 흔적이라기보다는 화학물질에 의한 용해작용에 더 가까울 것 같군요."

"내려가실 생각입니까?"

"네, 이대호 대위와 저는 내려갈 생각으로 왔습니다. 교수님은 밖에서 상황을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이 구덩이 안에서 활동 가능한 시간은 약 열 시간입니다. 차량에 설치된 로프는 2,000m가량이고요. 저희는 아주 천천히 내려갈 예정입니다. 만약 구덩이가 로프의 길이보다 깊다면 저희는 다시 올라올 것이고요. 무전이 중단된다 해도 저희는 몇 시간 이후에 올라올 겁니다. 만약 저희가 열 시간 이후에도 올라오지 않는다면, 교수님은 기지로 돌아가십시오."

"네 시간 후에 끌어올리겠습니다."

"저희는 죽기 위해 내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표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느 때 보다 강한 확신이 들어요. 비과학적이긴 하지만."

석현은 로프를 점검하고는 어깨에 장착된 렌턴을 켰다.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쉰 후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지구에서 보았을 때보다 그는 한층 지쳐 있었고, 한층 늙어 있었다. 노년의 얼굴이 문득 병기의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 그들의 생존을 믿으시는 겁니까?"

석현은 병기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웃었다.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고 다시 지친 표정으로 돌아갔다.

"준비되었습니다."

대호 역시 석현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 가장자리에 섰다.

"정말 깊어 보입니다. 지옥까지 뚫려 있는 게 아니라면 좋겠는데요."

대호는 병기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지구 시간으로 정오부터 내려간 그들의 신호는 몇 시간 후 사라졌다. 줄이 여전히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지만 지평선 너머에는 푸른색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줄은 더 이상 내려가지 않고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