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붉은 여름 6
병기는 아내를 만났던 때를 기억한다. 아내에게 처음 말을 걸었던 순간 또한 기억했다. 아내의 수줍어했던 말투와 몸짓을 기억한다. 아내와의 여행도, 아내의 임신도, 만삭의 아내도 기억했다. 하지만 그 시절 아내의 얼굴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장례식에서 쓰인 아내의 사진만 기억날 뿐이었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아내의 얼굴이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아이를 출산 한 날 아내의 웃음은 기억이 났다. 아내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힘들어서 붓고 붉어진 얼굴에서 미소가 피어났다. 하지만 그 미소의 순간에 아내의 얼굴이 또렷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병기는 자꾸 아내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내의 사진을 보아도 다시금 머릿속은 뿌옇게 흐려져 왔다. 딸의 얼굴도 그랬다. 아이의 몸짓도 안겨오는 아이의 무게감도 기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눈을 들자 푸른 화성의 노을이 펼쳐지고, 그뿐이었다. 아이의 방에 붙어 있었던, 몇 개월 동안 아이의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할 때마다 보였던 그 화성의 노을이었다. 먼지 구름 사이로 짙푸른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리고 그뿐 아이의 얼굴이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이의 목소리도, 안겨오면 손끝에 느껴지던 아이의 머릿결도 분명하게 들리고 느껴지는 데 아이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병기는 푸른 노을과 가족사진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줄을 끌어올리기로 약속한 시간은 아미 한참 지나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는 둘을 두고 기지로 돌아가서 상황을 보고해야만 했다. 하지만 병기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그는 화성에 오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지구에 돌아갈 생각이 없었고, 탐사선을 타고 기지를 나온 다음부터는 어디로도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그는 어디로도 갈 수 없었는데, 그의 아픔은 어디로도 가지 않았다. 그는 어디에도 돌아갈 곳이 없었다. 화성으로 향하는 우주선에서도 그는 여전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작은 원형 창밖으로 검은 우주 공간을 바라볼 때마다 아이의 방에서, 가족사진 앞에서 느낀 가슴의 먹먹함을 느껴야 했다. 화성에 도착한 후에도 그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깐 잠이 들었다가도 곧 깨어났다. 꿈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매번 다른 내용이었고, 매번 다시 잠들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눈을 감고 잠들지 못하는 상태로 몇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잠을 못 잔다거나 가슴이 먹먹한 것이 그를 괴롭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괴롭히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병기는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어쩔 수 있겠는가. 그의 의지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가족도, 화성도, 석현도, 그의 마음도, 잠드는 일 조차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내와 아이의 얼굴을 기억하는 일 조차도 의지대로 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그를 힘들게 했다. 반경 몇 킬로미터는 됨직한 커다란 검은 구멍은 마치 우주선에서 바라본 우주의 확장판인 것 같았다. 그가 우주선 창 밖으로 바라본 우주를 수 백배 확대해서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 화성은 우주의 일부인데 우주는 지금 병기가 바라보고 있는 구덩이의 일부인 것 같았다.
로프는 완전히 멈춰 있었다. 로프를 끌어올려보았지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로프 끝은 아주 깨끗하게 잘려 있었다. 아니 석현의 표현대로라면 용해되어 있었다. 원래부터 아무것도 매달려 있지 않은 듯. 병기는 탐사선으로 돌아가서 호흡장치를 초기화하고 모든 장치를 새로 교체했다. 로프를 작업복에 결합하고 리모컨을 점검했다. 로프가 내려가는 속도나 정도를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구덩이의 가장자리로 접근했다. 이제 곧 해가 질 것이고, 지표면의 온도는 내려갈 것이었다. 하지만 병기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구덩이 안은 태양빛이 닿지 않는 밤의 상태와 마찬가지였고, 탐사선의 무게는 모래 태풍을 견딜만했으며, 로프의 강도는 충분했다.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자신을 빼고 다른 사람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부모님도 그의 동생도 그의 곁에서 사라졌고, 아내도 아이도 같은 날 그랬다. 그는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 두렵지 않았는데, 그를 제외하고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그는 이제 두려운 것이 없었다. 혹시라도 기적이 일어나서 석현이 아내인 상아를 되찾고, 대호가 동생을 되찾게 된다면, 그것에 자신이 어떤 기여라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리고 혹시 그들이 가족을 되찾게 되더라도 그 자신은 사라지고 싶었다. 스스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라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화성에 오고 싶었다.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라지고 싶었다. 푸른 석양 사이로, 딸아이가 잠들 때마다 보던 그 사진의 배경 너머로 사라지고 싶었다. 아무것도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떤 것도 잊고 싶지 않았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리모컨을 작동했다. 로프가 서서히 하강을 하기 시작했다. 임시로 달아놓은 도르래가 조금씩 흔들리며 그를 검은 구덩이 속으로 하강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밖을 바라보았다. 푸른 석양이 조금씩 짙어지며 화성의 지표면을 삼키고 있었다. 다리부터 허리, 다시 머리를 어둠이 잠식해가고 있었다. 문득 병기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리모컨의 작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어둠이 그를 온전히 삼키고, 화성의 지표면 또한 어둠이 삼켜졌다. 거친 바람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