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 번도 서울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도 부끄럽게도 생각해본 적은 없다. 내가 사는 곳은 서울의 외곽이었고, 어린 시절 우리 동네에는 지하철도 다니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넓어 보였던 길은 사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이었고, 원하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설명하기 힘든 미로 같은 곳을 몇 차례 지나가야만 했다.
어린 시절 서울의 하늘도 높았고, 푸르러서 특별히 기억할 수 없었는데, 늘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무너질 것 같은 담 곁으로 걸어가면 담너머로 대추나무 가지가 늘어져 있었다. 낮이면 골목골목마다 아이들이 길가로 나왔는데, 골목에서 한 참을 놀아도 아주 가끔 차가 지나갈 뿐, 그때는 차보다 사람이 훨씬 많았다. 늦은 오후가 되면 아이들은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는데, 어머니가 집에 있었던 나는 집으로 갔지만 친구들 중 몇 명은 집으로도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멀리 앉아 있었다.
밤이면 유흥가 가까운 곳에서는 취객을 흔히 볼 수 있었고, 아주 가끔은 등굣길에서 학생들에게 돈을 요구하는 사람도 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밤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오갔는데, 그들은 대부분 머물지 않았고 다시 낮이 되면 이곳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집 밖으로, 골목으로, 일터로, 학교로 다시 생활을 시작했다.
가끔은 골목에 돗자리를 펴고, 고기를 구워 먹기도 했는데 고기 굽는 소리가 골목 안에 퍼지면 여기저기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 나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우리는 또 그 집의 아이들과 어울려 놀곤 했다. 여름에는 집 가까운 하천에 가서 깨끗하지 않은 물에 발을 담그고, 가을에는 잠자리를 잡으러 폐허와 빈집과 큰 길가를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 한 번은 오래된 교회에서 잡기 놀이를 하다가 한 친구가 난간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친 적이 있다. 지나가던 사람이 아이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는데, 서울의 외곽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교과서에 나와있던 서울의 냉정함을 우리가 사는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 우리의 부모님도 친구들의 부모님도 서울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가끔 듣는, '서울 사람'이라는 호칭의 정체성을 찾기가 힘들었다. '역시 서울 사람'이나 '서울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이 가진 의미를 알 것 같으면서도 공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서울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늘 조금은 부끄러웠다.
우리 아이들에게 서울은 어떤 곳일까.
나에게 서울은 거주지였다. 집이었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향'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90년대를 기준으로 내가 살던 동네도 많이 변했다. 새 건물이 들어섰고, 지하철도 다니게 되었다. 유흥가는 사라지고, 대학가로 변하고 있었으며 아버지는 명예퇴직을 하시고 개인택시를 시작하셨다. 우리도 미로 같았던 골목을 떠나게 되었고, 이제는 더 이상 흔히 보이던 취객의 모습도, 서울 외곽의 폐허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그때 골목에서 함께 고기를 구워 먹었던 사람들도, 골목을 떠돌던 친구들도 덩달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교과서에서 이야기하는 무관심과 냉정, 그리고 개인주의를 갖춘 진정한 서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직 집 근처에 사는 반가운 얼굴들을 보면 여전히 개인주의의 현대적 도시와는 무엇인가 어긋나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 도시는.
아이들은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아마 부모님 두 분이 맞이하는 아침은 많이 더 조용하고, 차분했겠지만 두 아이들은 차분함 같은 것은 갖지 못하는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일어나자마자 달려 나갔고, 궁금한 것을 찾아갔다. 옥상에도 올라가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방에도 들어가고. 아버지가 키우는 물고기도 구경하러 달려갔다. 작년에 작은 아이가 음식을 먹던 손으로 물고기를 잡으려고 했는데, 대량의 치어가 사망하는 상태를 가져왔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온다는 소식에 덮개를 급조하셨는데, 아이들은 협동해서 덮개를 잘 제거하고 있었다. 다행히 아내의 통제로 치어 대량 학살은 막을 수 있었고, 아이들은 몹시도 물고기 먹이를 주고 싶어 했기 때문에 다소 많은 양의 먹이를 투척하는 것으로 극적으로 상황을 타개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식탁 아래로도 들어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숨기도 했고, 마침내 할아버지에게 접근해서 평소 부모들이 좀처럼 결재해주지 않는 IP-TV의 유료 콘텐츠를 결재하는 데에 성공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괜찮다'라고 웃으며 말했지만, 과연 삼일 후에도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까.
작은 아이가 낮잠을 자는 사이, 큰아이와 둘이 놀이기구를 타러 갔다. 롤러코스터도 바이킹도 척척 타는 것을 보면 큰아이가 많이 성장하기는 성장한 모양이었다. 놀이기구를 타고 아주 오랜만에 둘이 커피전문점에 갔다. 아이는 너무 신나게 놀았는지 다리가 아프다고 했다. 아이를 업고 큰길까지 걸어가는데, 큰아이를 업고 이 정도 거리를 걷는 일이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원한 음료를 주문해주고 한 잔을 혼자 오롯이 마시는 모습을 보니 동생 때문에 못하는 일이 많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땀 흘리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니 아이는 즐거운 표정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서울에는 살고 있었지만 '서울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 기억 속에 서울은 '서울 다움'을 갖추기에는 한참 모자란 곳이었고, 그랬기에 나와 내 친구들은 '서울 사람' 같은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성장했다. 사실문제는 '서울'이라는 장소는 아니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서울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사는 곳이고, 매우 높은 건물들이 많은 곳이면서 장어와 소고기를 먹는 곳이다. 그리고 꼭 서울에 가면 놀이공원에 가고 자유롭게 텔레비전을 볼 수 있는 곳일 것이다. 아이들에게 서울은 그런 곳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미 지나간 곳이다.
많은 일이 있었고, 오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서울의 건조한 공기는 계절에 관계없이 피부를 가렵게 하고, 더 이상 맑지 않은 하늘은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예전에 내가 살아가던 서울은 아직 포장되지 않은 흙바닥을 지닌 시장 골목 같은 곳이었다. 비가 오는 날은 운동화에 잔뜩 진흙을 묻혀가면서 뛰어다니던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서울 사람으로 온전히 살아가기에는 무엇인가 결핍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우리 아이들은 서울을 편견 없이 뛰어 논다. 낮잠에서 깨어난 둘째는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저녁을 먹고 마음껏 떠들고 뛰어다닌다. 창 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킬킬댄다. 아이들에게 서울도 '서울다운' 곳은 아닐 것 같다. 그래서 자랑스럽지도 부끄럽지도 않은 그냥 '서울'로 기억되는 것은 아닐까.
커다란 모기장을 방 한 가득 설치해놓고, 네 식구가 함께 누웠다. 눈을 감고 있으니, 멀리 거실에서 에어컨 소리가 들리고 큰아이의 말소리도 들린다. 저 멀리 안방에서 부모님의 코 고는 소리도 들린다.
서울의 밤도 제주도의 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