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

by 지승유 아빠

통증[명사] 아픈 증세.

나는 아픈 것을 잘 모른다.


사실 나는 아픈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디가 크게 부러지거나 사고를 크게 당한 것은 아니지만 통증에 대해서는 나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나는 동네에서 아토피로 소문난 아이였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요즘처럼 아토피 환자가 많지 않았고, 나는 상당히 심한 편이었기 때문에 동네에서도 학교에서도 나를 보면서 병의 원인이나 과정을 물어보는 사람이 흔했다. 심지어는 담임선생님들도 그랬다. 가장 심했을 때는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쯤이었다. 그해 봄쯤 집에 상수도가 터졌다. 막 새로 지어진 집 반지하였는데,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물침대에서 자고 있는 것처럼 방안이 온통 흔들리고 있었다. 수도가 터지고 물이 쏟아나와서 집 바닥에 물이 고여있었다. 장판을 들춰보니 온통 물바다. 그날부터 우리는 학교에 다녀오면 장판 한 편을 열고 물을 퍼담았다. 대야로 하나 담아서 버리고 나면 비로소 할 일을 했다. 그리고 여름 내내 틈이 날 때마다 보일러를 틀었다. 반지하라서 여름에는 나름 시원했는데, 조금 덜 더운 날마다 바닥을 말린다고 어머니가 보일러를 트니, 집안은 온통 콘크리트 냄새에 습도가 가득했다. 그래서 그 사우나 같은 공기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골목 어귀에 돗자리를 펴놓고 고기도 구워 먹고, 때로는 잠을 자기도 했다. 그때는 차가 많이 지나지 않은 때였고, 우리 집은 워낙 골목이어서 돗자리 위에 누워, 어머니의 부채 바람을 맞으며 잠드는 것이 부끄럽지도 이상하지도 않게 느껴졌다. 저편 골목에도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 골목 바닥에 누워있었고, 다들 지나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는 모두 옥탑이거나 반지하에 살았고, 옥탑이거나 반지하 거나 형편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므로.


그런데 그 해 여름부터 나는 몹시 긁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해에도 안 긁은 것은 아니었지만 상태가 점점 심해왔다. 목이며 팔이며 다리며 시커멓게 변색되기 시작했고, 땀이 흐르면 전신이 따갑고 간지럽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이 피투성이었는데, 자는 동안에는 손이 피부의 사정을 봐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손톱 사이에 피가 묻어 있는 경우도 많았고, 어머니는 나를 수시로 씻게 하고 스테로이드제를 발라주셨지만 약을 발라야 하는 범위는 너무 넓었고, 통증도 너무 넓게 퍼져 있었다.

성인이 되고 아토피가 잠잠해지자 나를 공격한 것은 '건선'이었다. 지금 우리 아이들도 이따금 물어보는 건선은 의사들의 말에 의하며 '절대 완치되지 않는 병'이었고, 군 시절과 몇 년 전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시절에 내 몸의 거의 절반을 덮고 있었다. 피부가 갈라지고 딱딱해지면서 껍질이 벗겨지는데, 그 자체로 간지럽거나 아프지는 않지만 이따금 딱딱해진 피부가 갈라지면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 특히 손가락이. 지금도 내 손은 몇 군데가 갈라져 피가 흐르고 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긴 했지만 이따금 몸을 급히 움직이면 피부가 갈라지면서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나를 찾아오기도 한다. 이런 통증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기 때문에 물건을 들고 있거나 중요한 일을 하는 도중 통증이 오더라도 들고 있는 물건을 놓치지 않거나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통증은 무시하는 일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가끔은 피가 흐를 정도로 상처 입어도 모르고 다닐 때도 있고, 조금 멍이 들거나 작게 난 상처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분명 나는 다른 사람보다 육체적 통증에 대한 저항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아내의 몸에서 9주 된 아기가 빠져나갔다.

아기를 가졌다는 아내의 말에 몹시 부담을 느꼈는데 비로소 부담을 털고 기대와 책임감을 안아 들게 된 시점이었다. 9주 차 아내가 병원에 다녀오면, 아기의 심장소리가 웅장하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모두에게 공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기는 아내의 몸을 허망하게 빠져나갔다.

아내는 위와 아래의 복통을 호소하고, 몸에 기운이 없으며 때때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아내의 육체적 통증만이라도 가져올 수는 없을까. 생각해본다.

내 마음의 상처는 아내에게 못 미칠 것이며, 나는 통증에 대한 저항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아내의 육체적 통증이라도 가져오고 싶었다. 병원에 다녀와서 자리에 누운 아내를 보며 생각했다.

작은 아이는 연신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고 큰아이는 무슨 생각인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토요일 아침 아침을 먹이고 아내를 두고는 집을 나서려고 했는데, 아내는 우리를 따라나섰다. 차에 창문을 조금 열고 바람을 맞으며, 바다로 가서 아이들을 물에 던져놓았다. 아내가 앉을자리에 돗자리를 펴고, 파라솔을 설치해준 다음 등을 기댈 수 있는 의자를 놓아주었다. 멀리서 바라보니 아내는 담요를 덮고 자리에 앉아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모래를 던지고 모래를 파고, 물이 들어갔다가 해조류를 집어던지고 논다. 그 해수욕장에 있는 아이들 중 가장 난리를 치고 법석을 떨며 놀더니 문득 작은 아이가 동생이 하늘나라에 있는지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해주니 아이는 다시 누나를 따라 물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음이 무척 아팠다.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통증이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올라왔다.

아이들은 마냥 행복하게 놀고 있었다. 마음의 통증이 아직 아이들에게까지 가서 닿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내의 통증을 다시 생각했다. 세상에서 아픈 것을 가장 싫어하는 아내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아내의 통증을 조금이라도 가져오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래도 아내보다 통증에 익숙하므로.


아내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들도, 내 가족 누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