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과 행복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사실 나는 누구보다도 잘 허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많이 슬프고 우울하지만 늘, 어느 시기에나, (특히 20대 이후에는) 강렬한 행복감을 자주 느꼈다. 그 행복감은 심지어 극심한 불행과 동시에, 같은 원인으로 오기도 했다.
부자인 친구들을 처음 봤을 때는 그들이 부자이기 때문에 놓치거나 배우지 못한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서 사치스럽고 소비적인 예술 경험을 할 거다, 이런 편견이었다. 하지만 부자인 친구들과 친해지고 서로 이해하게 되면서 부자들은 아주 비싼 것부터 가장 저렴한 것까지 그 가치를 알며 잘 향유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밍크코트에 동대문에서 산 벨트를 잘 매치시키곤 하는 것이었다. 그저 더 많이 알고 있고, 더 많이 경험하면서 돈도 있을 뿐이었다. 그걸 깨닫고 나는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럼 내 결핍은 의미가 없어?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부자건 가난하건 간에 한 개인이 발전시키는 삶의 양상은 그저 다양할 뿐, 비교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였다. '돈', 가난, 부모의 정서적 지지(가 없음) 등이 나에게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이 기준을 너무 크게 생각했던 거다. 누구나 오직 자신의 삶만을 살뿐이다.
마음에 욕심이 가득, 분주해서 명상도 잘 되지 않는다. 차분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애써 책을 읽었다.
존 듀이의 글 중 내 생각에 꼭 맞는 구절을 발견했다. 내가 <오늘의 기울기>에서 하고 싶었던 말, 이 제목으로 전하고 싶었던 핵심 그 자체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어떤 고정된 결과에 도달했는지 여부로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들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에 의해 판단해야 한다. 나쁜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리 선했더라도 점점 나빠지고 있는 사람이며, 좋은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리 도덕적으로 가치 없었더라도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다. 이러한 관점은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인간적이게 만든다."
John Dewey, 철학의 재구성, 이유선 옮김, 아카넷, 2010, pp.132–133.
그리고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한 말.
"모든 상품의 가치는 그것을 획득하려는 사람이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실제로 치른 그의 노동과 수고다."
상품의 가치가 '그것을 만드는 데에 든 노동과 수고'에 의해 정해지는 게 아닌 게 핵심이고, 진짜고, 슬프기도 하다. 이동진 평론가도 '돈을 쓴다는 건 정말 영혼을 건 결정"이라고 했다. 남의 돈을 번다는 건 그래서 정말 어려운 거다. 나는 어떻게 해야 돈을 벌 수 있을까? 누군가의 영혼에 어필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