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똥

by 서한겸

*이 글은 약간 수정되어 <행복이 가득한 집> 2019년 6월호에 실렸다.



초원에 가보고 싶었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풀밭, 싱그러운 공기,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드넓은 고요... 그런 것을 오랫동안 꿈꿨다. 하지만 드디어 사방이 소실점까지 보이는 몽골의 대초원에 가 보니 상쾌한 풀냄새는 느낄 수 없었다. 게다가 시끄러웠다. 풀밭에는 풀 다음으로 말똥이, 그리고 날벌레가 많았다. 벌레 소리에 귀가 따갑고 말똥에 둘러싸였다는 생각에 거의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래 몽골에 말이 많은 건 알고 있었지. 말들이 화장실을 사용할 리는 없잖아. 풀밭에 뒹굴며 이슬에 몸을 적시려던 환상을 단념하는 데 한 10분 정도 걸렸다. 종아리를 스치는 벌레들을 친근히 여기려 애쓰며 말똥을 살펴봤다. 생각 외로 냄새는 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똥은 똥이었다. 말똥과 벌레소리에 자주 놀라며 초원에서의 여행을 마쳤다.

초원은 넓었고 풀도 많았고 바람도 불었다. 고요하고 공기도 싱그러웠다. 벌레 소리와 말똥 냄새가 섞여 있었을 뿐. 초원에서 돌아온 후 한참이 지나서야 내 상상 속의 초원이 뭔가 약을 뿌린, 좀 이상한 곳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풀밭에 오직 풀과 이슬만 있을 리는 없다. 말과 벌레들이 그곳에 있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글을 쓰고 싶다고 꿈꾸던 때 내 상상 속의 글쓰기는, 종이 몇 장을 구겨 던진 후 머리를 붙잡고 괴로워하다가 드디어 어떤 영감을 받아서 막 써 내려가기 시작하면(!) 명작이 탄생하는 그런 거였던 것 같다. 하지만 종이를 아무리 구겨도 글이 저절로 써지지는 않았다. 허겁지겁 초콜릿을 챙겨 먹고 어떻게 어떻게 글을 써 내도 또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야 한다. 게다가 던져둔 종이 뭉치도 다시 주워 분리수거함에 넣어야 한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꿈이 2차원의 깔끔한 스케치라면 그것이 가까스로 실현됐을 때의 모습은 아마 조금 덜 반짝이는 건 아닐까 하는.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의 우여곡절들이 해맑던 눈빛과 안색을 약간 지쳐 보이게 하고 스케치는 닳고 때가 타고 수정되고. 많은 경우 이렇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부수적인 사건들이 마침내 맞이한 행복한 순간의 기억을 더 구체적으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3차원을 넘어 촉감과 소리와 냄새와 맛, 놀람과 실망과 모든 감정 속에서 행복의 느낌을 여러 방향으로 연결한다.

어떤 것들은 조금 당혹스러울지 몰라도, 그래도 이 의외의 감각들은 더 다양할수록 좋다. 이 중 어느 하나만 건드려져도 행복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말 모양 캐릭터를 볼 때, 벌레가 갑자기 튀어 오를 때, 길에서 개똥을 만날 때 내가 초원을 떠올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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