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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한겸 Jun 17. 2024

2 첫 결혼

넓은 들을 따라 마을이 군데군데 있고 저 건너에도 비슷한 동네가 듬성듬성 이어져 있었다. 그 마을들 중에 우리 동네는 큰 편이었다. 우리 집은 안채가 기와집으로 정남향을 보고 있고. 아래 사랑채 곳간채도 안채를 등지고 남쪽을 보고 있다. 봄이면 사랑 앞에 살구꽃도 피고. 감꽃이 피면 장두감꽃은 크고 떫었다. 작은 감꽃은 주워서 먹기도 하고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어 동생들한테 매어 주기도 했다.

큰딸이라고 참 일찍부터 나를 부엌일을 시켰는데 내가 곧잘 하니까 더 부려먹은 것 같다. 새벽밥을 짓는 엄마를 따라 밥솥 국솥에 불 때는 게 일이었고 차츰차츰 자라면서 밥 짓기도 일찍 배웠다. 13살쯤 오빠가 결혼을 했다. 올케 언니가 어린 내가 일하는 걸 보고 놀랬노라고 훗날 얘기를 했다. 엄마도 힘들고 마음 풀 데 없으니 내가 만만했으리라고 생각이 된다. 


그리고 엄마도 나에게 그렇게 했고. 내가 글이라도 쓰지 않았더라면 누구라도 찾아 나도 그리했을 듯하다.


큰엄마에게도 남매가 있었으니까 오빠 결혼하고 엄마는 동생들과 아버지 하고 분가를 했다. 살림할 사람이 들어왔으니 두 시어머니하고 살 필요가 없어졌다. 큰 언니는 오래전에 결혼해서 나하고 동갑내기 조카가 있다. 큰언니는 아버지 하고 비슷비슷하게 애들을 낳아서 조카들하고 내 동생들하고 나이들이 비슷하다. 엄마가 분가를 했지만 나는 큰집에 남았다. 아버지가 은근히 그렇게 압박을 했고 나도 큰엄마가 조았는지 그렇게 받아들였다. 학교에 갈 때도 꼭 돼지 밥을 주고 가는 줄만 날았다. 올케도 내가 그렇게 하기를 바랐는지 학교에서 오면 집안일하느라 공부할 시간은 조금도 없었다. 올케도 우리 집의 이런 복잡한 사정을 모르고 시집을 왔다. 그 아버지는 정을 다 알았지만 자기 집보다 부자 같아서 딸을 보냈다고 했다. 그러니 시집와서 보니 서너 살 어린 시누이가 있고 다섯여섯이나 되는 시동생들이 말똥거리며 철없이 구니 말이 막힐 수밖에. 가을걷이가 끝나면 친정에 가서 돌아오질 않았다. 정월이나 되어야 집으로 왔다. 그 겨우내 어린 내가 부엌살림을 살다시피 했다. 큰엄마는 본래 살림을 맡아서 할 사람은 못 되었다. 그래서 우리 엄마를 데려와서 살게 된 것이다. 


살림도 시키고 잠자리하고. 우리 엄마를 포함한 이모 삼촌은 부산물일 뿐이다. 


우리 집은 동네 한 중심에 있었다. 기와집이고 마을에 들어오는 큰길에서 마주 보이는 집이 우리 집이었다. 그 동네에서는 좋은 집에 속했다. 이 집을 중심으로 바로 옆에 쌍둥이 할아버지 중 첫째 할아버지 집 아래로 셋째 작은 아버지집. 우리 집 바로 아래는 쌍둥이 할아버지 중 둘째 할아버지 집. 우리 집 옆 쌍둥이 첫째 할아버지 집 위로 팔촌 당숙집 그 위에 우리 할아버지와 막내 작은 아버지가 사는 집이고 우리 집 바로 위는 일가친척이 살았다. 마을이 대부분 일가친척들이고 대여섯 집만 타성들이 살아서 타성들은 있는 둥 마는 둥 잘 드러나지를 못했다. 이 타성들이 마을에서 말썽이라도 일으키면 이 동네에서 배겨 날 수도 없는 분위기였다. 말하자면 타성과 연애 사건이라도 터지면 당연히 타성이 이 동네에서 쫓겨나야 했다. 

아버지가 큰집으로 양자를 가서 당신 큰 어머니를 엄마로 모시고 살았다. 아버지의 아버지도 일찍 상처해 두 번째 어머니인 작은 할머니가 막내 작은 아버지 하고 살았다. 할아버지는 막내 작은 아버지 집에서 잠만 자고 식사는 우리 집에 와서 하셨다. 어렸을 때는 큰할머니 하고 우리 할아버지하고 부부인 줄 알았다. 그때 우리 동네에는 이런 집들이 몇 집이 있었다. 우리 집을 위주로 동쪽으로 두 집이 있는데 한 집은 큰엄마에게도 자식들이 많은데 작은 엄마한테도 많았다. 형편이 좋은 것도 아닌데. 그때는 왜들 그렇게 살았을까. 동쪽으로 또 한 집은 본처에서 남매 작은댁에서 아들 둘. 경찰이었다. 남자가 결혼을 안 했다고 거짓으로 처녀 결혼을 했다고 늘 싸움이 잘 벌어지는 집이어서 동네 아낙네들의 입이 심심하지 않았다. 참. 입에 담지 못할 욕들을 할 때면 어린 나는 듣기에 힘들어 자리를 피하곤 했다. 그 사정들 속에 나도 들어 있으니. 서쪽으로 한 집은 두 번째 부인이 애를 못 낳아서 없고 또 다른 집은 큰 이가 애를 못 낳아서 큰 이가 적극적으로 서둘러 작은 이를 들여 삼 남매를 낳았다. 

먹고살기가 어려울 때여서 입 하나라도 덜려고 친정 눈치 보다 못해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었다. 어쩌다 남편이 세상을 일찍 떠난 여인네들이었다. 오죽하면 먹고 살 수만 있음 팔자를 고치겠다고 하는 여인네도 있었다.


오늘 한 사람이 일하면 그 집 모든 식구는 그 집에서 두 끼를 먹고살 수 있다. 내일 아침 끓일 게 없다고 내일 품값을 오늘 받아서 바가지에 가지고 가면 퍽 서글펐다. 그렇게 한 세상을 살고 세상을 떠나고 없는 사람들이다. 애들 데리고 살 집이 없어 보다 못하면 우리 산에다 집 지어 주고 산 지키며 살게도 하고 아편을 해서 조금 남은 전답 다 없애고 딸만 일곱인 집은 대밭 지키라고 의지할 곳을 만들어주고. 아버지는 그렇게 남한테 잘하고 인심 얻고 큰아들은 신경 써서 공부를 가르치려 해도 안 했다. 소 팔아서까지 군인 안 가게 만들고. 작은 아들 공부시키겠다고 도시로 갈 때도 나를 떼어 놓을 작정으로 외갓집에 보내 놓고 떠나 버리고. 나는 한두 달이 지나서 엄마 집을 가보았지만 이삼일 지나니까 나를 어서 가라고 시골 큰엄마 집으로 쫓았다. 

아버지는 나를 큰집에 두고 당신이 큰집에 오면 편리하게 생각했다. 같은 동네 살 때도 색다른 음식을 하면 추운 날이나 더운 날이나 그 음식을 가지고 아버지 계신 내 엄마집으로 갔다. 행여 내가 앉아서 밥이라도 먹을까 봐 선 걸음에 나를 큰집으로 돌려보냈다. 엄마도 은근히 그렇게 하기를 바란 것 같았다. 자식이 많으니 하나라도 떼 놓고 싶었을까. 나도 거기에 큰 반감은 없을까. 아버지 무서워서 암묵중에 그렇게 되었는지 큰엄마가 좋아서 그랬는지 내 엄마에게는 정을 느끼지 못했다. 내 형제 부모 도시로 떠나고 나는 같은 장소에서 살던 대로 무슨 주어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겉보기에는 잘 살았다. 무작정 참고 참고 살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몇 마디 말도 않고 사는 날이 많았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을까.


아버지가 오시는 날이면 집안이 시끄러워진다. 오빠하고 아버지가 의견이 맞지 않아 분란이 일어났다. 당연히 올케는 자기 남편 편이고 마땅찮은 시아버지가 오실 때마다 큰소리가 나니 얼마나 마음이 상할까. 그때 가운데에 끼어 있던 나는. 엄마를 찾아갔어야 했는데 이제는 더욱더 아버지가 나를 큰집에 있도록 압력을 주었다. 올케는 아버지 옷은 내가 빨래하게 은근히 맡겼다. 다 참고 견디고 왜. 내가 왜 나는 그렇게 살았을까. 도시로 나간 엄마는 나를 데려갈 생각도 안 하고 뭐가 잘못된 걸까 나에게 왜 그런 걸까.

설날에도 엄마한테 가질 않았다. 가까운데 계셔서 얼마 전 제삿날에는 다녀왔다. 마음이 내키질 않아서 엄마께 가지는 않았지만 불편한 생각은 마음 한구석에 모여 있다. 엄마는 엄마니까. 내 나이 사십이 넘어서야 엄마하고 가깝게 살게 되고 보니 엄마라는 말도 편하게 나오질 않았다. 내가 결혼을 할 때도 바늘 하나 준비해 주지 않은 엄마다. 한편으로는 이해를 못 할 것도 없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엄마가 노동해서 살아야 했으니 겨를이 없었겠지.


아버지라는 인간은 뭘 하고?


여름밤이면 울타리 밑에서 쭈그리고 앉아 목욕을 하고 개운한 기분으로 평상에 누워 하늘을 보면 별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은하수는 흐르고 모깃불 타는 냄새는 구수하기도 하고 한참을 누워 별구경하다 보면 온몸이 축축하게 이슬이 내려앉는다. 옆에서 잠든 동생들을 방으로 들어 옮겨 눕히고 밤은 깊어 깜깜하고 조용한데 마음은 시끄럽고 요동을 친다. 혼자 울고 다 싫고 힘들었다. 막연하고 답답하고 가을 하늘에 뭉게구름을 보면 저 구름처럼 떠다니다가 없어지고 싶고. 꿈에는 날아다니고 사진도 날아다녔다. 친구들이 한 명씩 결혼을 하기 시작했다. 스무 살도 안 되었는데 강원도로 시집을 보낸다고 했다. 그때도 강원도에서는 처녀가 적었는지 요즘 같으면 외국 처녀와 결혼하는 그런 것처럼 했던 것 같다. 그냥 가서 그곳에서 결혼식하고 살 거라고. 한 친구가 떠났다. 


그때는 강원도가 아주 먼 곳으로 생각하는 때였다. 두 친구가 가고. 스무 살이 넘으니 여럿이 결혼을 하고. 몇이 안 남았는데 2살 적은 사촌에게 중매가 들어왔는데 어떻게 할까 하고 작은아버지가 아버지께 의논을 했다고. 아버지와 큰엄마가 새벽에 얘기를 하셨다. 그때 내 마음이 뭔지 모르게 쌩하게 자존심이 좀 상했다. 아버지는 괜찮다고 했다고 했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때 날이 가물어서 한해가 들었다고 농사를 못 지었었다. 물이 없어 모를 못 심고 논에다 메밀을 심기도 했었다. 그래서 말하자면 결혼도 늦추고 있는 그런 참이었다. 아주 가난한 사람은 강원도까지도 가지만. 그렇다고 나쁜 일은 아니었다. 어중간히 이도저도 아닌 게 더 안 좋은 것이었다. 나는 결혼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는 결혼하면 아이를 꼭 낳아야 했고. 많은 일을 책임을 지고 살아야 할 것만 같아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힘들고 벅차서 못 견딜 것만 같았다.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내려다 보이고 나보다 똑똑한 사람을 만나면 내가 기죽어 살아야 할 것 같고 아예 안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누가 내게 너 이런 사람 어떠냐고 묻는 사람도 없지만 그냥 중매가 들어오면 다 싫었다. 그렇다고 연애도 할 줄 모르고 연애할 사람도 없고 동네에 타성인 한 살 위인 남자애가 있었는데 그 형이 자기 동생하고 결혼하는 게 어떻냐고 했나는 말이 들렸다. 아버지도 조금은 당황해하셨다. 그 집이 우리보다 가난했고. 그 동생은 서울에서 가끔 명절 때나 와서 어쩌다 같이 놀기도 했는데 그 형이 동생하고 결혼 얘기를 하니까. 역시 작은 부인의 딸이니까 내려보고 혼인 얘기를 꺼내는구나 했겠지. 그전에 내가 스무 살도 되기 전에도 부모끼리 중매가 들어왔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를 큰집에 두고 엄마와 살면서 내가 큰집에 있으면 큰엄마 집에 오기가 편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를 서둘러 결혼시킬 마음도 없고 나도 시집가기를 거부하고 해서 그때로는 늦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막상 결혼을 하려니 오빠는 나를 책임지고 결혼시키기를 부담스러워하고 아버지는 나를 결혼시킬 비용이 없고 갈등이 생겼다. 하지만 그래도 아무리 큰집에 맡겨 자라게 했어도 내가 큰 자식 첫 번째 결혼시키는 자식이 아니던가. 결혼을 하려니 오빠와 올케 아버지가 갈등을 했다. 내가 그 세월 다른 공장에라도 다녔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다시 내 탓이 되었다. 정말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에게 선택의 길은 없었다. 큰집에서도 더 이상 있을 수도 없고 있기도 싫었고. 그렇다고 엄마 집에서 밥만 축내고 있을 처지도 못되고 어디 가서 돈 벌 줄도 모르겠고. 어른들은 어디라도 시집을 보내려고 하고 떠밀리다시피 결혼을 했는데 알고 보니 우리 아버지가 양장점을 차려주기로 하고 나를 결혼을 시켰다는 거다. 


남자 쪽에서 내가 자란 곳을 가보고 싶다고 하는데 오빠 올케가 허락을 안 했다. 그게 일이 커져서 오해가 생기고 아버지와 오빠 그 남자 서로 좋지를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시작한 결혼 생활이 안정을 못 찾고. 양장점을 차려서 가져와라 하고 싸우기 시작했다. 나 또한 그 사람이 좋아서 결혼한 게 아닌데 그저 다들 떠나고 나 혼자 남으니 어쩔 수 없이 결혼이란 걸 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오해가 생기고 남자도 그걸 가지고 못되게 굴고 아버지는 약속을 못 지키고 불안하니까 못살겠으면 그만 살라고 나를 또 부추기기까지 했다. 양장점 못 해주니까 그랬나. 



그런저런 일로 말다툼이 싸움이 되고 칠 개월 사는 동안 날마다 싸우다시피 하다 싸우고 부엌에서 울고 있으면 안집에 아줌마가 달래주기도 했다. 결국 어느 날 아침밥을 차리는데 내 뺨을 때렸다. 그 길로 바로 집으로 오고 말았다. 그러잖아도 날마다 불안하게 보내고 있는데 때려. 그 길로 나와버리고 말았다. 7개월 결혼생활. 짧은 시간 동안 혼인신고까지 했는데 혼인신고하면 그냥 살 줄로 믿었다고 했다. 자기 누나 집이 목공소를 크게 했는데 남자는 거기 경리를 했었다. 돈을 가져오게 하라고 누나나 그 매형이 옆에서 자꾸 시키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저렇게 얽히고설키고 그렇다고 나도 꼭 살고 싶지도 않았고. 그래도 아버지가 몇 달 사는 동안에 애기가 없다고 약을 지어 왔었는데 그게 더 결정을 빨리 하게 했다. 만약 아이가 생겼다면 나는 어쩌지 못할 것 같아 빨리 그만 살게 되었다. 


두 번째 결혼에서는 내가 생겨서 어쩌지 못하고 계속 살게 된 거구나.



이혼을 해주지 않겠다고 해서 할 수 없이 법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의 법원에 가는 일이 있었는데 끝내는 우리 쪽에서만 나가고 끝을 맺었다. 결혼 살림이라고 몇 가지 해간 건 다 버리고 이불도 보기 싫어서 쓰레기로 버렸다. 몇 장 안 되는 사진도 다 불태워서 어릴 때 사진이 한 장도 없다. 그러고 엄마 집에 와 있으니 당장에 눈치가 보였다. 당시에 시골 큰집에는 갈 수가 없었다. 남부끄러워서. 그 동네서 여자, 딸은 내가 처음 이혼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절대로 자식 이혼은 안 시킬 어른이라고들 생각하고 흉볼 텐데. 하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우리 아버지는 큰 언니한테 이혼하려면 하라고 했었다. 나에게 엄마 같은 언니니까 아주 옛날인데도 형부가 화투를 쳐서 가정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친정에서 살리다시피 하는 형편이었다. 그 집안이 십이 남매 중에 형부만 딱 하나 그렇게 돼 먹은 거라고 했다. 타고난 팔자가 있는 건가 나 자랄 때는 칭찬만 듣고 야단 들은 기억은 없었다. 시집가서 잘 살 거라고 얌전하다고 이웃마을까지 소문났다고 해서 나도 그렇게 되는 줄 알고 살았는데 이게 뭐야 청천벽력도 유분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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