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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한겸 Jun 17. 2024

1 옛날 - 옛날

순결을 강요하고 일꾼하고도 말도 못하게 하면서 공부는 시켜주지도 않고. 공동 샘에서 종아리 내놓고 씻는다고 집으로 불러들여 야단치면서 왜 물은 길어오게 했는지. 

이웃집 그러니까 우리집하고 몇 집 사이인 집의 남동생이 가끔씩 누나 집에 다니러 오는데 동네 처녀들은 대부분 같이 얘기도 하고 밤이면 모여 놀기도 했다. 나는 사람 모이는 곳이 좋지는 않아서 잘 가지 않았다. 하지만 안면은 있었다. 시골 동네니 보이는 사람이 일가친척이고 아니면 우리 마을로 머슴살이온 총각 일꾼이 몇몇이 있는 정도다. 누나 집에 가끔 오는 그 총각이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친척 언니가 말하자면 소개를 해준 거다. 그 언니가 밤에도 가마니를 짜니까 몰래 놀러가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그런 말도 한 거다. 나도 처녀 때고 잘생긴 총각이 만나자고 한다는 말을 몇 번 들으니 마음이 동해서 가볼 마음이 생겼다. 아버지가 알면 큰일날 줄 알면서도. 나도 큰일나지만 우리 아버지가 아시면 그 총각은 당장에 쫓겨가서 우리 동네는 얼씬도 못할 거를 알면서도 아니 다리 몽둥이가 부러질 걸 알면서도. 마음이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얼굴이 화끈거리고 한 번 만나보고 싶은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동짓달 어느날 달이 휘영청 밝고 보리싹은 돋아나서 서리를 머리에 이고 발에 밟히면 서걱서걱 소리가 나는데 그 보리밭을 지나 정각을 돌아 더 넓은 보리밭을 지나서 약속장소인 산모퉁이에 가니 작은 소나무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너무 놀라서 소나무가 왜 흔들리나 들여다 보니 그 총각이 소나무가지를 잡고 떨고 있었다. 나는 왜 저렇게 떨고 있나 이해를 못했었다. 그저 호기심으로 나가보는 내 마음하고 달리 그 총각은 여자를 만난다는 데 정말 긴장을 했던 것 같다.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게 잠깐 있다가 돌아오는데 그 갔던 그길로 다시 돌아왔다. 상당히 추웠고 달도 밝은데 동네 사람들 눈을 피해서 그곳까지 갔다니 아버지의 불호령도 두려움도 이겨낸 그 행동은 나에게는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일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렇게 밝은 달은 보지 못했다. 허허벌판 작은 나무 한 그루 없는 파란 차가운 서리내린 보리밭.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는데 밤에는 도깨비가 나온다는 정자 뒤를 지나서 산모퉁이 그 장소까지 가다니 크게 뭐에 홀리지 않고는 못 가는 길이었다. 그 무렵 팔촌쯤 되는 언니가 이웃마을 총각하고 연애를 했다고 동네가 뒤숭숭하기도 했다. 그 동네서는 그 언니가 연애 일호였다. 얌전하고 손끝 맵고 누가 데려갈려는지 진국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는데 남자하고 눈이 맞았다고 처음에는 쉬쉬하다가 어느 날에서 이 처녀가 속치마 바람으로 아침에 돌아다니니까 미쳤나보다고 어서 결혼을 시켜 내보내야 된다고 했다. 

어디서 외지 소식 하나 들어오기 어려운 들골짜기 마을이었다. 옛날 그대로 사는 게 제일로 생각하고 거의 우리 아버지가 촌장처럼 그런 곳이었다. 저쪽 남쪽 다른 성씨들은 자기네끼리 뭉쳐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처럼 개화가 많이 되어가는 사람들이었다. 이쪽 집안 사람들은 신식 물이 든 사람들로 같은 동네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살았다. 그쪽에 친구집에 놀러 가면 앞마당이 북쪽이라서 겨울에는 뒷마당에서 놀았다. 내 친구집은 큰집이다. 기와집이고 집에 샘도 있고 동백꽃도 피었다. 빨간 동백꽃이 뚝뚝 떨어지면 꽃을 실에 꿰어 목걸이를 배꼽까지 내려오게 길게 해서 걸고 다녔다. 여름에는 수국도 탐스럽게 피는 집이었다. 배롱나무도 화려하게 분홍 꽃을 피웠다. 배롱나무는 간지럼을 탄다고 간지럼을 태우면 정말 흔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꽃나무들은 이 친구 집에만 있었다. 이 친구도 따지고 보면 위에 몇 대 할머니가 우리집에서 시집을 이 집으로 와서 생판 남은 아니라고 했다. 내 친구집을 위주로 동쪽 서쪽으로 자기네 친척들이 모여 살았다. 딸들도 학교에 보내고 형편 따라서 못 보내기도 하지만 신식 문명을 받아들인 사람들이어서 집안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친구는 중학교를 도시로 나가고 방학 때면 친구 보기가 창피해서 물 길러 가다가도 한쪽으로 숨어서 기다리다 친구가 가고 나면 나도 나가서 물을 긷고 했다서울 와서 시골 친구들 모임에 몇 번 나왔다는데 나와 엇갈려서 한 번도 보지를 못했다


엄마가 마루에 앉아 남동생(셋째 동생이다) 젖을 주면서 툭툭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훔쳐 옆으로 뿌렸다. 내가 5살 때였을텐데 지금도 엄마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뒤로 동생이 몇 명이나 더 태어났지만 모두 여동생이었다. 엄마가 마루에 앉아 동생 젖 주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부뚜막이나 부엌 땔감 위에나 잘하면 마당 뒤쪽 마루에 앉아서 동생들에게 젖을 먹였다. 오직 아들이라서 마루에 앉아 젖을 먹였던 것 같다. 첫째가 나, 바로 또 딸. 다음에 아들 낳았다고 좋아했던 것 같다. 고깝게 보는 사람도 많았을 거다. 언니는 이미 결혼을 해서 나보다 몇 달 늦게 태어난 조카가 있는 복잡한 상황이 생길 일이었다. 오빠는 나보다 9살이 많다. 나의 어머니는 일찍이 과부가 되어 친정에 가 있었다. 내 아버지는 동네 건장한 청년을 시켜 나의 어머니를 보쌈을 했다고 한다. 내가 20살 정도쯤에 어디서 들은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이다. 

동생들도 많고 집안일도 많아 일찍이 철이 든 나는 작은 엄마들 당숙모들이 모이는 자리는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자라면서 더욱 더 말수가 적어져서 어떤 날은 한두마디 하고 밥먹은 외엔 입을 열 일이 없었다. 9살에 국민학교를 갔는데 그 이전부터 새벽에 일어나 밥솥에 불을 때고 여름에는 어른들이 금방 먹을 물을 길러 오게 했다. 옥동이라는 이름을 붙여 조그만 옹기동이에 손잡이 꼭지가 붙어 있는 그릇에 서너 그릇의 냉수를 길러오게 했다. 그 당시 우물을 파면 나쁜 운이 생긴다는 미신을 믿고 동네 공동 샘물을 길어다 먹었다. 나중에 커서 들은 얘기다. 애를 일을 시키겠다고 작은 동이를 주었다니.

큰엄마는 시어머니처럼 부엌일에는 건성이고 내 엄마는 늘 부엌일에 밭일에 많은 일들을 등짐처럼 매고 있었다. 막내 작은 아버지하고 사시는데 할아버지도 우리집에서 많이 계셨다. 늘 있는 건 아니지만 끼니 때가 되면 우리 집에서 밥을 잡수셨다. 친할아버지는 첫 번째 부인이 아들 4명에 딸 1명을 낳고 돌아가셨다. 지금 할머니는 재취댁이라고 했다. 지금 할머니가 딸을 당시에 41세에 첫 번의 자식을 낳게 되었다고 했다. 이 딸을 낳다가 죽는 줄 알았는데 겨우 살았다고 초산이어서 어려웠다고 했다. 막내 작은 아버지를 낳아 놓고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막내 작은 아버지를, 시동생을 내 큰엄마가 젖을 먹이기도 하고. 어른들이 밥을 깨물어서 먹여 키웠다고 했다. 그 막내 작은 아버지하고 친할아버지, 두 번째 할머니가 같이 살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큰아들인데 아버지의 큰아버지가 결혼해서 일찍 돌아가셔서 자식이 없이 큰어머니만 계시니 양자를 가셨다. 아버지의 큰 어머니는 그때 21세였다. 내 아버지가 양자를 갔으니 우리 할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큰형수의 아들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큰 형수를 잘 보필해야 한다는 책임도 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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