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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한겸 Jun 17. 2024

1 옛날 - 국민학교

9살이 되었는데 국 민학교에 입학하는데 고모가 나를 데리고 갔다. 아버지는 학교를 가지 말라고 했다. 여자애가 학교에 가서 어디다 쓰느냐 고모는 벌써 4학년인데 학교에 다니는데 왜 나는 학교를 가지 말아야 했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지금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날 아버지는 어디론가 출타를 하셨다. 학교는 동쪽 방향이고 아버지는 남쪽 방향으로 가셨다. 하얀 두루마기가 바람에 날리니 눈에 잘 보였다. 거리가 멀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행여나 보일까 봐 고모가 동강이 치맛자락으로 나를 감싸 안아주었다. 학교를 가려면 크고 넓은 들을 건너고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했다. 어떻게 입학식을 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들바람이 얼마나 추웠는지 학교에 가면 의지할 곳도 없었던 것 같고. 고모는 그때 4학년이었다고 기억한다. 군복색 천막 교실 안에서 있었다. 우리는 바닥이 붉은색 흙이었던 교실에 낡은 책상 걸상이 있었던가. 횟가루 종이를 책하고 같이 책보에 싸서 허리에 매고 다닌 생각이 난다.

산등성이에 횟가루 종이를 깔고 앉아 선생님이 위쪽 높은 곳에서 가르치고 우리는 고개만 들면 선생님이 잘 보였다. 일 학년 때부터도 오전 오후반이 있었을까. 비 오는 날에는 교실에서 공부를 했었을까. 겨울에는 비 오는 날에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다 물에 빠지면 언니 오빠들이 도와주기도 했고 신발에 찰흙이 붙어 발이 안 떨어지면 손을 잡아 끌어당겨주기도 했고. 한 살 더 먹은 사촌 언니하고 늘 둘이 붙어 다니는데 그 언니는 용감하고 나는 순둥이였다. 항상 나의 보호자 역할을 했다. 겨울에 특별히 양지바르고 바람 피할 곳을 찾아 같이 햇볕을 쬐면서 놀았다. 그곳을 누가 먼저 차지하고 있으면 내쫓아버리고 나를 데리고 그곳으로 들어간다. 나는 그렇게 행동하는 언니가 이해가 안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언니 편에 섰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겨울에 햇볕이 잘 드는 언덕 아래 앉아서 숙제를 해가지고 집에 오기도 했다. 풀들이 추워서 잎이 누렇게 죽어서 물기 없이 바짝 말라 있으니 푹신하고 포근하기도 하고 마른 풀냄새가 좋기도 했다. 그렇게 1학년을 마치고 선생님이 2학년이 되면 새 학교로 가라고 했다. 학교도 가까워지고 들길보다 밭길이 많고 논둑길을 조금만 지나면 학교였다. 산길도 조금 있고 여기저기 볼거리도 많아졌다. 조그마한 저수지도 있었고. 새 학교를 가니 처음 보는 집이었다. 붉은 벽돌에 유리가 많이 붙어 있고 시멘트 바닥에 홀이라고 했고 신발장에 복도는 길고 교실도 나무바닥에 새 책상 의자 칠판이 얼마나 크던지 처음 보는 세상이었다. 이제는 신발주머니도 가지고 다녀야 했다. 모든 학교생활이 다시 새로웠다. 이제는 교실 청소도 해야 했다. 샘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서 바케스에 담아 와서 교실 옆에 놓고 걸레를 빨아서 교실 복도 청소를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밀고 다니며 바닥 청소를 해야 하고 걸레를 만들어 오게도 했는데 집에서 쓸만한 걸레거리도 부족한데 학교에 가져가려면 집에서 쓰는 걸레보다는 좋은 걸로 가져가야 하는데 엄마 몰래 쓸만한 헝겊으로 만들어 가져가기도 했다. 정말이지 그 걸레 조각 아니지 몇 겹 접어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조차 없어서 가져오지 못한 친구도 있었다. 나보다 두 배는 먼 곳에서 오는 친구하고 한 반이 된 적도 있는데 그 친구는 도시락도 잘못 가져왔고 학교도 많이 멀어서 우리 집에까지 오면 벌써 배가 고파진다고 했다. 오후반이면 같이 밥을 먹고 가기도 했다. 2, 3살 많은 친구였다. 같이 밥을 먹고 싶어 서둘러 오는 것이었다. 우리 집 옆으로 길이 길게 나 있어서 그 친구는 내가 집 대문 들어가는 걸 보면서 자기는 두 배는 먼 길을 더 가야 대문을, 아니 싸리문을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 친구 집 옆에 우리 논이 있어 친구집을 보기는 했지만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학교는 아직도 완성된 상태는 아니어서 상급생들은 날마다 일을 했다. 흙을 나르고 판자를 나르고 우리도 3학년이 되니 먼 곳까지 가서 작은 판자를 한 장씩 들고 오게도 했다. 어떤 남자아이들은 그 판자를 언덕에 놓고 미끄럼을 타기도 하고 깔고 앉아 놀기도 했다. 울역(부역)을 나오게 해서 학교 일을 돕게 하는데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가 오시기도 하고 몇 번을 선생님께 야단을 들으면 집에 쪽지를 보내기도 해서 겨우 일꾼을 보내기도 했다. 아버지는 집에서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일부러 학교 울역에 나오시면 선생님들이 불편해하면서 그럭저럭 때우는 식이었다. 대충 선생님들은 안면이 있으신 편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아버지를 피해서 돌아다니기도 했다. 4, 5학년 때라고 기억한다. 구구단을 다 외우면 1반 못하면 2반으로 갈리는데 그때 친한 친구들과 갈리기도 했다. 사촌 언니하고도 그때 반이 갈려서 사촌 언니는 나 때문에 기가 죽어야 했었다. 사촌은 기가 정말 셌다.

친구를 밭고랑에 처박고 발로 밟아서 학교가 한 번 발칵 뒤집히는 일까지 생겼다. 그 친구 부모가 학교까지 쫓아와서 교장 선생님까지 알게 돼가지고 작은 아버지가 학교에 불려 가고 지금 같으면 경찰서까지 가기도 했을 텐데 나중에 친구 모임에 가서 그 친구를 만나 사촌 언니 얘기를 했는데 죽었다고 하니 그래도 슬퍼했다. 




국민학교를 2학년 때 새로 지어서 1학년 때보다 가깝고 좋아졌다. 우리 집에서 학교에 가는 거리만큼 더 가야 하는 동네에 사는 친구가 한 사람 있었다. 그 친구는 나이가 나보다 두세 살 많았던 것 같다. 그 친구는 학교가 많이 멀었다. 약 십오 리 5-6km 정도. 그 친구는 가난해서 오후반일 때 점심을 못 먹고 학교를 온다고 했다. 그 친구를 기다렸다가 같이 우리 집에서 점심을 먹고 학교로 갈 때가 많았다. 오전반이면 점심 도시락을 싸와야 하는데 때로 그것도 못 가져올 때가 있는 친구였다. 보고 싶다. 친구들과 같이 먹자고 약속을 해서 밥 못 싸 오는 친구들을 한 명씩 맡아 같이 먹으려고 하면 어떤 친구는 수월하게 응하기도 하지만 어떤 애는 절대로 싫어해서 잡으러 다니다가 화장실로 들어가 숨기도 했다. 문을 두드리며 사정해 봐도 결국 설득을 못하고 같이 못 먹을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집에 돌아올 때 산에서 풀어놓고 그 밥을 먹으면 여름에는 밥이 좀 쉰 냄새가 난다. 김치국물과 섞여서 우중충한 붉은색이 보기에도 맛없어 보였다. 둘러서서 구경하는 친구도 있고 친구는 집에 가서 애기를 봐야 하고 집안일도 도와야 한다고 늦으면 먼저 가는 친구도 있다. 엄마한테 야단맞고 욕먹고. 무지한 세상길을 건너 지금까지 살아 있다. 먹고 입고 사는 것 걱정 않는 것만도 감사해야 할 때였을까. 공부를 시켜주지 않으면 뛰쳐나갔어야지 그러지 못했던 게 바보 멍청이같이 나 자신이 원망스럽다. 내가 아들 남자로 태어났으면 처지가 분명 달라졌겠지만 우리 집안 아들들은 기본적으로 공부하기를 싫어했다. 내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마찬가지였으려나. 



3학년 때 며칠을 학교에 못 간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학교를 못 가게 해서 견디다 못해 학교 그만둘 생각을 했었다. 우리 아버지는 왜 나에게 그렇게 독했을까. 나보다 다섯 살 많은 고모도 학교 다니는데 고모는 자기가 다니기 싫어 그만두었다고 했다. 며칠을 집에서 일만 하고 있다 보니 이거는 아니었다. 나는 내가 볼 수 있는 제일 높은 세상이 선생님이었던 거였다. 그래서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아침이면 몰래 책보를 대문 앞에 미리 갖다 놓고. 아버지 눈을 피해서 학교에 가기 시작했다. 월사금을 안 주고 학용품도 안 사주고. 형편이 꼭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한테 말도 잘 못하고 동생을 시켜 돈을 타기도 했다. 엄마는 아무 권리도 없고 엄마 역시 자식들에게 크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국 민학교를 겨우 졸업을 했다. 졸업비를 못 내서 졸업장을 못 타고 그만두는 친구들도 있긴 했다. 아예 학교 문도 못 들어가 본 친구들도 있었고 중간에 그만둔 친구들도 있었으니 무지한 세상이었다. 중학교를 가야 하는데 집에서 다닐 수 있는 곳은 없었고 외지로 나가야만 하는데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 동네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는지조차 몰랐었던 것 같다. 이제는 집에서 일만 하고 살아야 했다. 한문책도 사서 보고 강의록도 사서 보기도 했지만 혼자서는 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사랑에서는 서당을 앉히고 한문공부를 가르치고 있었지만 나는 거기에 낄 생각조차 못했다. 내가 너무 눈치만 살피고 하고 싶다고 말 한마디 못해봤다. 왜 그래야만 했는지 분위기에 눌려 늘 눈치를 살피며 살았다. 아버지는 내가 큰딸이니 모든 걸 잘해야 동생들의 본보기가 된다면서 핑계도 좋게 꼼짝 못 하게 눈치를 주었다. 그렇게 살았던 내가 한심하고 등신 같은 생각을 하면 억울하고 한스럽다. 바보다 바보였다. 조카들도 돌보고 집안일도 해야 하고 항상 부지런히 움직이느라 바쁘게 시간을 보내고 올케 언니는 들일도 나가면 밥하고 빨래하는 일이 차차 나에게로 책임이 지워졌다. 바느질은 올케언니가 했지만 빨래라는 게 상상을 초월한다. 주로 흰옷을 입을 때라서 7폭 치마를 빨려면 얼마나 크던지 손으로 빨기에는 힘들었다. 일꾼의 옷도 흰옷이었다. 비누질을 고루 칠해서 빨아도 그때를 다 지울 수 없어 밥 해 먹는 큰 솥에다 양잿물을 넣고 비누칠한 빨래를 삶으면 그때서야 흰 빨래에 묻은 때가 빠져나간다. 초벌을 잘못하면 삶고 난 다음에도 짙은 때는 남아있기도 한다. 그럴 때면 빨래가 잘못되었다고 야단을 맞기도 한다. 어린 나를 아주 성인처럼 생각하고 일을 시켰다. 들일이 바쁠 때는 밭에 나가 일도 해야 하고 집에 오면 집안일도 해야 하는데 들일 하다 집안일하는 게 힘든 일이었다. 올케 언니도 그렇게 하는 일이 힘드니까 둘이서 서로 눈치를 살피지만 주로 내가 져서 집으로 들어가 밥을 짓고 반찬을 하는데 바쁘고 힘들었다. 봄이면 보리밭에 풀을 매고 꽁꽁 언 흙 속에서 독새기 풀을 매면 흙이 덩어리로 떨어져서 보리싹까지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맨손은 얼마나 시리고 손등은 갈라지고 손끝도 갈라져서 피가 나면 헝겊을 찢어서 밥풀로 짙게 발라서 요즘 반창고처럼 붙이기도 했다. 그래봐야 하룻밤 지나면 맨손으로 물을 묻혀야 하니까 아침이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밥을 할 때면 참, 맨손으로 솔나무가지를 꺾어서 손으로 하기 힘들면 발로 밟고 꺾어서 아궁이에 넣기도 한다. 이렇게 밥을 지어 상을 세 개를 차리는데 한 상에 보통 다섯 가지 반찬 이상을 차리면 접시가 몇 개며 밥그릇 국그릇이 몇 개인가. 하루에 세끼를 차리고 중간중간에 술상이 나가도 집안일하기에도 벅찼다. 여름이면 모시를 삼아서 모시옷도 해 입어야 하고 가을이면 목화를 따다 무명베도 짜서 옷을 해 입어야 했다. 여자들이 해야 할 일이 태산같이 쌓여 있었다. 누에를 키워 명주베도 짜서 다듬이질을 해서 옷을 해 입고 빨래가 어디 요즘 같은가. 옷 한 벌이면 겉과 속 두 벌. 바지가 두 벌 저고리 두 벌. 풀해서 다시 꿰매야 옷이 된다. 밤이면 엄마들은 버선 볼을 대서 꿰매야 하니 희미한 호롱불에 졸리다 앞머리카락을 태워 가며 바느질을 해야 했다. 이 많은 일을 엄마들이 다 해냈다. 사람이 닥치면 죽지 못하면 살 수가 있나 보다. 지금 생각하니 무시무시하다. 


실을 뜯어서 풀어서 빨고 다시 꿰맨다고. 실은 많이 있었나? 매일 빠는 건 아니겠지. 지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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