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포호르몬 수치가 너무 낮아요.”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요?”
“지금까지 시도해서 안 되었다면, 더 이상 자연임신을 시도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난임입니다. 바로 시험관시술 합시다.”
난임…? 내가… 난임이라고? 요즘 뉴스에서 난임부부가 많아지고 있다고 해도 내가 그 대상이 될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33살이 된 그해 10월에 결혼했고 처음부터 피임은 하지 않았다. 33살 여자와 34살 남자, 둘 다 찰 만큼 찬 나이였다. 아이가 생기면 바로 낳아야지, 하고 암묵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달, 2달… 처음에는 ‘곧 임신되겠지~! 신혼을 좀 더 즐기지 뭐~!’라고 편안하게 생각했었다. 그렇게 5달, 6달… 시간이 흐를수록 편안함은 초조함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생리 예정일보다 2~3일 정도 지나가면 ‘혹시? 이번엔?’이라는 생각에 약국으로 달려가 임신테스트기를 꼭 2개씩 사 왔다. 혹시 한 개가 고장 난 거면 안 되니까 말이다. 그러나 결과는 늘 한 줄이었다. 야속하게도 꼭 테스트해 본 다음 날 생리가 시작됐다. 눈물을 흘리는 때가 점점 잦아졌고, 그렇게 1년 이상을 보냈다.
“자기야 병원 가 보자. 그냥 확인차 가 보기라도 해 보자.”
내가 먼저 초콜릿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초콜릿은 처음부터 아이에 대한 큰 바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생기면 낳자,라고만 했으니까. 안 생기면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게 되지 않았다.
20대 후반이 되면서 슬슬 주변에서 결혼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명 중 8명은 혼수에 소중한 아기가 함께였다. 그래서 임신은 정말 쉬운 건 줄 알았다. 흔히 들어온 어른들의 말씀처럼 옷깃만 스쳐도 인연인 것이 아니라, 옷깃만 스쳐도 쉽게 되는 것이 임신이라 생각했다. 당연히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했고,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1년 12번을 임신에 실패하고 나니, 이제는 ‘무언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다지 탐탁지 않아하는 초콜릿을 데리고 난임 병원으로 갔다. 의사는 검사를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고 했다. 요즘은 원인 모를 난임도 많으니, 결과에 너무 신경 쓰지는 말라고 말이다. 솔직히, 문제가 있다고 해도 그 대상이 나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랬기에 초콜릿을 데리고 갔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란다. 나라고 한다. 검사 결과를 말해 주는 담당 의사는 내 호르몬에 문제가 있어서 그래서 난임이라고 했다. 머리가 멍했다. 평소에도 그리 엄청난 체력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 몸에 무언가 문제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정말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난임 판정을 받고 바로 시험관을 하자는 의사의 말에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과정에서 의료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들게 되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서 꼭 임신을 해야 할까? 우리한테는 그런 돈이 없는데….’
그래서 의사에게 곧 이사를 해야 해서 집을 보러 다녀야 한다는 핑계로 딱 한 번만 호르몬 약을 먹고, 주사를 맞고 하면서 자임을 시도해 보겠다고 우겼다. 의사는 그래도 되지만 기대는 하지 말라 했다. 다른 사람들은 호르몬 약을 먹으면 난포가 많게는 10개씩도 과배란이 되지만, 내 경우에는 정말 아주 잘될 경우에 3개 정도일 거라 했다. 그래도 해 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혼자서 생각했다.
‘이번에 안 되면 그냥 포기하자. 아기 없이도 우리 둘이 잘 살면 되지 뭐!’
될 대로 되라였다. 이전처럼 몸을 사리지도 않았다. 이사 갈 집도 하루에 몇 군데씩 보러 다니며 움직이는 것을 거리지도 않았다.
“축하합니다! 이건 진짜 대박이네요! 임신이에요!”
“진짜요? 정말요? 진짜 진짜 임신 맞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10개도 될 수 있는 과배란이 나는 정말 잘되야 3개라고 했던 의사 말대로 딱 3개가 되었다. 그리고 그중에 하나가 성공했다고 확인받는 순간이었다.
임신이 안 되던 그 시기에 주변 사람들이 말하던 것들 중 너무도 듣기 싫었던 말이 있었다.
“아기는 진짜 기대를 다 버려야 오는 거 같아… 너무 기대하지 말고 그냥 지내~!”
‘말이야 방귀야? 자기들은 이미 다 아기가 있으니까 저런 말을 하지. 이게 어떻게 기대가 안 되냐고!’
늘 이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진짜였다. 진짜 다 포기하고 모든 기대를 버리니 너무도 귀한 생명이 찾아와 주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어느새 난임으로 마음고생하던 시간들은 다 잊게 되었다. 너무도 편하게 TV를 보고, 먹고 싶은 거 먹고, 쉬고, 자고… 바로 여기가 파라다이스구나 싶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오늘 진통 잡히지 않으면 큰 병원 가셔야 해요. 그때는 출산해야 해요.”
“아직 27주예요. 선생님! 안 돼요! 무조건 안 돼요. 제발요….”
2017년 8월 23일. 아마 평생 못 잊을 날짜가 아닐까 싶다. 나의 길고 긴 병원생활이 시작되던 날이었다. 2년간의 전세 계약이 끝나고 임신 27주 차쯤 이사를 해야 했다. 서울 서쪽 끝 지역에 살던 나와 초콜릿은 서울 동쪽 지역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초콜릿의 회사 사무실이 이사를 하면서 우리 집도 근처로 찾게 되었다.
사실 임신이 가장 안정기일 때였기에 이사가 주는 스트레스를 무시했던 내 잘못이었다. 막상 이삿짐을 올리려고 보니, 전 세입자의 짐이 다 빠진 그 자리는 온통 곰팡이 투성이었다. 도저히 우리 짐을 올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급히 도배할 업체를 찾고, 결국 이삿짐은 하루 보관을 했다. 당연히 이사 비용도 2배를 지불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나도 모르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듯싶다. 이전 집보다 조금 작은 평수로 이사를 오다 보니 가구를 배치하는 것부터 자꾸만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이사는 밤 9시가 다 돼서야 끝이 났다. 끝이라곤 했지만 실은 끝도 아니었다. 일단 대충 가구들을 다 올려놓기만 한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제자리를 찾지 못한 서랍장, 설치도 못한 행거….
그러나 더 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배가 아파 왔다. 그것도 정말 미치도록 말이다.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빌라 계단에 주저앉아 배를 움켜잡고 울었다. 그리고 다니던 병원 응급실로 갔다. 배에 이상한 것을 부착하고 기계에 표시되는 그래프를 관찰했다. 그래프는 정말 격정적으로 요동쳤다. 조기진통이란다. 이 조기진통을 잡지 못하면 아기를 낳아야 된다고 했다. 말 그대로 조산. 이제 고작 27주인데!
하늘이 도운 것일까? 수액의 강도를 아무리 높여도 밤새도록 잡히지 않던 조기진통은 아침이 다 되어서야 진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입원도 같이 시작됐다. 그때는 이 입원이 출산할 때까지 이어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냥 잠깐 며칠 입원하면 다시 이전과 같이 평범하게, 이사 간 집에서 임신 기간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주변에서 봐 온, 임산부들은 다 그랬으니까 말이다. 그것이 당연하다 착각했던 것이었다.
“안 되겠어요. 아기는 큰 병원으로 전원 보냅시다. 더 데리고 있다가는 큰일 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임신 27주부터 36주까지 3번의 입퇴원을 반복하면서 집에서 지낸 시간은 3주도 채 되지 않았다. 반복해서 오는 조기진통은 그 강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퇴원했다가 다시 응급실로 실려 가곤 했다. 만삭 사진을 찍으라며 걸려 오는 광고 전화가 너무 야속했다. 아니 짜증이 났다. 뭐가 이리 힘든 건가 싶었다. 그냥 내 아이 한 명, 나 닮은 아이 한 명을 세상에 남기고 싶은 것일 뿐이었는데 그 과정은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간신히 버티고 버텨서 38주 1일에 계획 제왕으로 낳은 우리 아기, 백설기가 호흡을 잘 못하고 있단다. 출산한 날, 백설기가 빈호흡이 있어 산소 치료를 하고 있다면서 보여 주지 않았다. 제왕절개 수술 통증 때문에 꼼짝도 할 수가 없는데 아기가 문제가 있다고 하니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결국 그날은 아기를 볼 수 없었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조금 안정이 된 것 같다면서 첫 모자동실을 했다. 아기는 너무 작았다. 38주에 3.59킬로그램이면 결코 작은 아기가 아니었음에도 내 눈에는 마냥 작게만 보였다.
‘진짜 낳았구나… 내가 드디어…’
뭔지 모를 감정에 자꾸만 북받쳤다. 배는 아픈데 그보다 더한 무언가가 자꾸 가슴속에서 울렁거렸다. 그런 느낌을 채 만끽하지도 못했는데 모자동실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아기를 대학병원으로 전원시켜야 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뭐야… 좀 전까지도 괜찮았잖아! 왜 보낸다는 거야!?”
의사를 만나고 온 초콜릿은 아기가 호흡하는 것을 다시 힘들어한다고 들었다고 했다. 가슴속에서 울렁이던 느낌은 다시 미쳐버릴 것 같은 불안감으로 바뀌었다. 결국, 신생아 중환자실 TO가 있었던 A 병원으로 옮겨졌다. 같이 다녀온 초콜릿이 찍어온 동영상을 보면서 정말 미친 듯이 울었다. 수도꼭지도 그런 수도꼭지가 없었다. 그 작은 몸에 링거부터 산소줄까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을 보니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기를 출산하고, 조리원에서 몸조리를 하고, 신생아실로 면회를 가고, 모자 동실하며 아기랑 친해지고…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출산 후 모습이다. 나 역시 이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자신이 낳은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아프고 항생제를 들이부을 것이라 생각할까? 아마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라 감히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낳은 우리 백설기가 그랬다. 그리고 그 당연하지 않은 것은 현실이었고 사실이었다.
그렇게 알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었던 당연하다는 개념의 것들은 어쩌면 절대 당연한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어쩌면 세상 그 어디에도 당연한 것은 없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