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30대가 되면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우리 아버지는 6남매 중에 막내이다. 그 당시에도 그런 말이 있었을까? 무조건 사랑이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런 막내. 정확히는 모르지만, 큰아버지나 큰고모와 나이 차이가 상당히 있으신 것으로 알고 있다. 큰아버지와 큰고모의 딸들, 그러니까 나에게는 사촌 언니들이지만 사실 어찌 보면 이모뻘 즈음된다. 지금 38살인 내가 17~18살 고등학생일 때 그 언니들은 20대 중후반에서 30대 초반… 이렇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니깐.
지금이야 30대 그것도 30대 후반에 결혼하는 것이 그다지 이상하지 않게 여겨지지만, 20년 전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생각하기에 언니들은 솔직히 이상했다. 외모도 그렇고 학벌도 그렇고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언니들이었다. 오히려 지금 와서 보면 정말 실력 좋은 언니들도 있고… 그런데 다들 그 당시에 결혼이란 걸 거의 하지 않았었다(지금은 거의 다 결혼하고 아이들도 있다. 안 한 언니도 있지만).
‘다들 괜찮은데 언니들은 왜 결혼을 안 하지? 난 저러지 말아야지. 30대엔 이쁜 아기 키우면서 남편 사랑받으면서 이쁘게 살아야지!’
이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단 말인가? 20대가 되면서 연애를 시작했고, 한 사람을 만나면 비교적 오래 만나는 편이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어떻게 하다 보니 오래 만나게 되었다. 절대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군대 간 남자 친구를 기다리는 고무신 여자 친구도 되어 보고, 고시 준비하는 남자 친구 뒷바라지도 해봤다. 아마 그 당시에 우리 엄마가 당신 딸이 이랬다는 것을 아시면 뒤로 넘어가셨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리 많은 남자들을 만나 보진 못했지만, 그 과정에서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결혼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마음먹어지는 것은 결단코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 남자가 아니면 안 돼, 라는 그 마음도 시간이 흐르면 흘러간다는 것.
20살부터 시작했었던 연애는 한번 만나면 오래 만나다 보니, 결혼 전까지 사실 솔로로 지냈던 기간은 1년도 채 되지 않았던 듯싶다. 30살이 되기 전까지 딱 2명을 만났을 뿐인데… 그래서 클럽문화, 나이트 문화, 밤에 피어나는 음주가무의 문화를 몰랐다. 마치 공부만 한 범생이처럼. 무언가 아쉬웠다.
29살이 되니 주변에서 친구들이 결혼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때 뭐하러 그런 생각들을 했을까 싶다. 다들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왜 다들 가는데, 나만 이렇지? 다들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는데… 나는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뭔가 뒤처지는 느낌이었다. 공부며 가정환경이며 다 내가 훨씬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못하다고 여겼던 친구들이 그 당시 내 남자 친구보다 더 나아 보이는 배경의 남자들을 만나 결혼을 한다고 하니, 조급함보다는 스스로 한심하다 생각했었다. 아니라고 생각해 왔지만, 나는 알게 모르게 내 친구들보다 내가 잘났다고 생각해 왔던 것을 스스로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무슨 기가 막힌 뻔뻔함이었을까.
그 당시 사귀던 남자 친구와도 한때 잠깐 결혼을 생각했던, 순진했던 시간들도 있었다. 그 사람 자체만 보면 그보다 더 나에게 잘해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도 잘해 주었던 사람이었다. 아마도 나는 사랑한다고 착각을 했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 착각은 그 사람의 집안 환경을 알게 되면서 서서히 깨어지고 있었다. 아마 그의 말로만 보자면 어렸을 때는 나보다 더 잘 살았던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기를 당해 집안 사정은 폭삭 무너졌고, 지금도 그 빚으로 온 집안의 생활이 쉽지 않은 상태였다. 당연히 결혼을 한다 해도 바로 집을 구해서 따로 사는 것은 힘들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스스로 그 착각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지금도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은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훨씬 더 어렸던 그때는 설령 하늘이 두 쪽이 난다 해도 그런 상황은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냥 이 남자와는 연애만 하는 걸로 스스로 규정지어 버렸다.
더구나 콧대가 하늘 높으신 줄 모르셨던 우리 엄마가 그 남자와 사귀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남자의 경제적 상황을 알게 되었을 때는 정말 집에 들어오는 것이 지옥이었다. 마치 딱딱하게 굳은 목석처럼, 집에 들어올 때마다 현관 앞에서 한참을 서 있곤 했다. 또 그 애 만나고 왔냐는 둥 언제 헤어질 거냐는 둥… 뜨거운 습식 사우나 문을 열고 막 들어갔을 때와 같은 숨 막힘이 덮쳐 올 것을 알았기에. 사실 그래서 헤어지지도 않았는데, 헤어졌다고 거짓말까지 했었다.
20대를 제대로 놀아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 그리고 줄줄이 연결된 소시지처럼 사방에서 들려오는 결혼 소식에 스스로 빠져드는 자괴감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은 무언가 지금까지의 일상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라틴댄스를 배워 보는 거 어때요?”
20대 중반에 너무도 저려 오는 다리 때문에 정상적으로 걷는 것조차 힘들어져 받은 검사에서는 허리디스크라고 했다. 수술은 권하지 않는다고 했다. 숨 쉬는 것 말고 운동이라고는 질색팔색 하던 나에게 운동을 하라고 했다. 더 이상의 방법은 없다면서 등 근육을 키우는 것이 최선이라고 했다. 그래서 근력 운동을 조금씩 하면서 추나를 받기 시작했다. 추나를 해 주시는 선생님께서는 라틴댄스, 그중에서도 살사댄스가 바운스도 없고 자세를 바로 하게 해서 허리디스크에 좋다면서 가볍게 해 보라고 추천을 해 주셨다.
살사라… 춤은 좋아했다. 잘 추는 것과는 별개로 그냥 음악을 틀어놓고 춤추면 쌓였던 스트레스가 날아갔다. 그래서 20대 후반, 잠시 연애를 쉬던 시절에는 회사 동료들과 홍대 클럽문화에 빠지기도 했다. 안 그래도 평범한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던 시기에 선생님의 살사댄스 추천은 나로 하여금 바로 검색을 하게 했고, 동호회 가입까지 하게 했다. 그렇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바람이라 불리는 춤바람에 빠져들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허리 통증이 완화되면서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이 살사댄스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사촌 언니들이 결혼을 안 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그 나이의 나는 결혼은커녕, 하고 있던 연애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어졌다. 어차피 그 사람과 결혼은 안 할 거였으니까. 더구나 새롭게 배운 살사댄스는 신세계였다. 연애보다 100만 배는 더 달콤했다. 정해진 신호와 룰이 있는 춤이었고 그 신호를 남녀가 주고받으며 추는 춤이었다. 그리고 그 신호는 오로지 텐션으로 알 수 있었다. 마치 서로 관심 있는 남녀가 초반에 밀당을 하듯이 말이다.
꼭 입 안에서 살살 녹아내리는 마카롱처럼 달콤했던 살사댄스의 매력에서 3년간을 허우적거리다 보니 어느새 32살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30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네 맘대로 해도 되니, 헤어지지만 말자고 이야기하는 그 당시 남자 친구의 마음을 이용하며 즐기고 싶었던 것을 마음껏 즐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못된 심보였다.
‘이제 진짜 제대로 연애해야겠다. 결혼도 해야겠다.’
32살이 끝나갈 무렵이 돼서야 이런 생각이 들었고 당시 사귀던 남자 친구와도 관계를 끝내기로 결판을 지었다. 진심으로 ‘이 이상 잘해 줄 수 있는 사람을 과연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그 사람과의 미래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렇게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살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속된 말로 정말 미친 듯이 소개팅을 해달라고 주변을 졸랐고, 열심히 했다. 하지만, 내 안에 전 남자 친구의 잔재가 남아 있어서였을까? ‘이 사람이다’ 하고 느낌이 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집에서는 동생이 만나던 남자 친구와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가기 시작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나만 뒤처진 듯한 느낌과 자괴감에 빠지는 기분이 다시 들었다. 더구나 이번엔 친동생이었다. 스스로 늘 동생보다 못한 언니라 생각했었다. 어렸을 때부터 동생이 공부도 더 잘했고 더 날씬했고 더 이뻤다. 한때는 그런 동생이 참 밉기도 했다(지금은 이보다 더 친할 수는 없는 그런 친구 같은 자매이다). 그렇게 스스로 열등감이라는 감옥에 갇혀 갔다.
소개팅만 믿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한테도 괜찮아 보이는 사람은 이미 다 누군가 임자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만남을 위한 남녀 모임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중에 눈에 띄는 모임이 있었다. 바로 ‘단체 블라인드 데이트’. 불이 다 꺼진 카페에서 게임을 하는 모임이라 한다. 순간 흥미가 생겼고 참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하… 갈까? 말까? 이상한 사람들만 있지는 않을까? 에라이… 모르겠다. 어차피 불도 다 꺼서 보이지도 않는다는데 뭐….’
모임 날, 모임 장소를 바로 앞에 두고서도 머릿속은 마치 뒤엉킨 실타래 같았다. 괜히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참가 신청한 돈이 아깝기도 했다. 용기를 내서 발걸음을 떼고 들어간 곳은 정말… 암흑이었다. 그야말로 단 한 줄기의 빛도 허락할 수 없다는 듯이 깜깜 그 자체였다. 자리로 안내해 주시는 분의 손을 잡고 가서 의자에 앉았다. 바로 지금의 신랑, 초콜릿의 옆자리에.
모임 프로그램대로 그 암흑 속에서 여러 가지 단체 게임을 했다. 지금은 참 단순한 나 자신을 다행이라 여기지만, 그때도 그 단순함은 여지없이 발휘되었다. 막상 게임을 시작하니, 그곳에 간 목적 따위는 암흑 속에 있는 것처럼 완전히 까맣게 잊어버렸다. 오로지 게임을 이긴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신나게 게임들을 즐긴 뒤에 암흑 속에서 보이지도 않는데 종이에 최대한의 성의를 다해서 적은 연락처를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우리는 1시간 넘게 같이 게임을 즐긴 사람들의 얼굴도 모른 채 나왔다.
“카톡” “카톡” “카톡” …
다음 날, 잠깐 동안 몰아치듯 연락이 와서 확인하니 그 암흑 속에서 연락처를 교환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단톡방을 만들었고 서로의 수다는 시작되었다. 이제는 제대로 얼굴 보고 만나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며칠 뒤 우리는 지금도 내가 너무 사랑해 마지않는 삼겹살집에서 뒤풀이 모임을 가졌다.
‘오… 슈트… 이쁘다!’
170cm. 내 키는 여자치고 결코 작은 키가 아니다. 뭐 물론 172cm인 친동생보다 작은 것은 나름 위안이 되곤 했다. 그래도 항상 남자를 볼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이 키였다. 당연히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그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미리 이야기하자면, 초콜릿은 나보다 딱 1cm 작은 169cm이다. 나랑 비등비등하다. 단지, 통상적으로 같은 키여도 남자보다 여자가 커 보이는 경향이 있어 늘 내가 더 커 보인다. 아마 평소 같았음 그냥 키에서부터 이 사람은 나에게서 아웃 오브 안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초콜릿이 그 당시에 입고 있던 슈트가 눈에 들어왔다. 단 한 번도 상하의를 그렇게 센스 있게 입은 남자들을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때부터 초콜릿에게 시선을 뺏긴 나는 ‘이 남자다’ 싶었다.
우리는 그때부터 매일같이 연락하고 급격하게 친해졌다. 단톡방이 아닌 개인 톡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우리 둘만 따로 만나 저녁도 먹곤 했다. 말 그대로 썸 타는 사이.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썸은 ‘연인’이라는 결론을 지었다. 지금까지 만났던, 매사 진지함을 버릴 수 없었던 전 남자 친구들과 달리 장난기 넘치는 그가 좋았다(자꾸만 선을 넘는 장난으로 결혼 후에는 미친 듯이 싸우기도 했지만 그때는 그게 너무 매력적이었다). 32살 여자, 33살 남자가 12월에 만나 33살 여자, 34살 남자가 되었고 결혼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었다. 서로 결혼을 염두에 두고 서로의 부모님을 뵙고, 결혼식 날을 잡고… 전쟁의 시작은 이때부터였다.
결혼식 날짜, 시간, 장소… 뭐 하나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시어머니께서는 결혼식 날짜와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셨고, 친정아버지께서는 장소 선택이 까다로우셨다. 하객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가 중요하셨다. 그 사이에서 위아래로 눌린 샌드위치처럼 나는 찌부러졌고, 지쳐 갔다. ‘그냥 다 때려치울까…?’ 하는 마음에 초콜릿과 싸우기도 엄청 싸웠다. 이렇게까지 해서 꼭 결혼을 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런 시간들을 또 겪고 싶지 않기에 결코 2번의 결혼은 없다고 생각하곤 한다. 자꾸만 생기는 트러블을 보고 주변에서도 점점 그냥 관두라고 말하기도 했다. 인연이 아닌 거라며.
그런데 참 신기하다. 무엇 하나 쉽게 되는 것이 없는 결혼 준비였는데, 이상하게도 준비가 되어 가고 있었다. 정말 많이 다퉜는데, 그때마다 초콜릿은 우리 집 앞까지 와서 몇 시간이고 나를 기다려 주었다. 미안하고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다. 정말 너무 화가 나 싸웠다가도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면 또 화가 수그러들었다. 신기하리만큼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인연은 따로 있다’라는 것이 이런 것을 의미하는 걸까? 그냥 이전과는 달리 이 사람과 함께하는 미래는 머릿속에 그려졌다. 불타오르는 그런 사랑은 결코 아니었다. 분명한 건 이 사람을 사랑해서 이 결혼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랑에 대한 기억이 살리기 힘들다는 아기를 살리고자 미쳐서 발악하던 전쟁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 부부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 준 결정적인 힘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생각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