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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Sep 30. 2015

아프니까 청승이다

착취를 사서 고생으로 포장하지 마세요

아프면 환자지, 무슨 청춘이냐 _ 유병재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대책 없는 위로 아닌 위로에 맞서 유병재 작가가 던진 한 마디. ‘아프면 환자지, 무슨 청춘이냐’ 이 한 마디는 큰 반향을 일으키며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엄청난 지지를 얻었다. 현 젊은 세대가 처한 현실과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듯, (아예 모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위로랍시고 무책임하게 던진 그 말을 정당하게 비꼬는 것 같아 통쾌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은 열정페이 등 착취를 정당화하기에 좋은 수단이라는 평가까지 나오는 지금 현실에, 제대로 한 방 먹여 정신이 번쩍 들게 한 것이다. 자칫하면 끄덕일 뻔했다. 깜빡 속을 뻔했다.     


나올 줄 알았다, “우리 때는...”      


그런데 기성세대 중 일부는 ‘아프면 환자지, 무슨 청춘이냐’에 지지하는 젊은이들을 그저 ‘반항아’ 혹은 ‘땡깡쟁이’ 정도로 여기는 것 같다. 열심히 살고 있는데도 취업이 너무 힘들다는, 회사에서 정당한 대우는 해주지 않으면서 착취한다는 우리들에게 결국 그 말을 던지고 만다. “야, 네가 진짜 고생을 안 해봐서 그래. 우리 때는...”     

‘우리  때는’이라는 말처럼 절망적인 말이 없다. 차라리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이 나아 보일 정도다. 사실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지지를 얻지 못하고 비웃음까지 사게 된 것은 그 말 자체의 문제보다 ’대책‘이 없다는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하지만 청춘들이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서도록 하기 위해 이러 이러한 대안을 생각해 봤고 제시할 것이며, 같이 노력할 것이다...‘ 이런 맥락이었다면 그 책이 좀 더 공감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 때는...‘ 이 말에 대해서는 아쉬움도 없으며 개선의 여지조차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절망적이고, 심지어 분노까지 유발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나도 분명히 나이가 들 테고, 늙은 나에게 젊은 누군가가 와서 토로를 한다면, 설사 단순 토로가 아닌  '반항'을 하더라도, 욕을 할지언정 절대로 '우리  때는...'이라는 말은 하지 말아야지. 사실 두렵다. 지금 '야, 우리 때는...'이라고 말하는 그들도 아마 젊은 시절에는 자신이 그 말을 하게 될 줄 몰랐을 테니 말이다. '우리 때는'이 '밥 먹자'는 말만큼이나 당연하게 나오는 말 같아서, 나도 나이가 들면 나도 모르게 하게 될 말 같아서 두렵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고 세월이 변한다는 것을 알듯이 지난날은 지났고 현실이 달라졌다는 것을 아는 분들도 존재한다는 것이 내게는 희망이다.      


‘우리 때’는 지난 그때, 우리의 때는 지금     


시대는 변한다. 현실도, 상황도 달라졌다. 그런데 언제까지 우리 때는 이랬다는 말로 모든 착취를 정당화할 것인지? 물론 ‘그때 그 시절’이 모두가 가난하고, 배고프고, 힘든 시절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 시절을 딛고 일어나 지금 우리가 잘 살 수 있도록 노력하셨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잘 사는 나라’를 일궈냈다고 이야기하면서 젊은이들이 ‘잘 살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하다고 말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착취와 고생을 우리도 똑같이 경험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리고 묻고 싶다. 정말 지금이 ‘그저 잘 사는 나라’인지 말이다.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눈부시게 발전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국가 현실을 비관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빈부격차에 시달리고, 물가는 치솟는데 월급은 너무 안 오른다. 국가 경제 발전 속도에 비해 개개인의 주머니 사정 발전 속도는 현저하게 떨어진다. 그래도 계속 당신들의 지난 그때, ‘우리 때’를 우리의 때인 지금과 같다고 할 수 있나. 우리 때는 우리 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아직도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는 주제에 그저 반항을 하고, 무기력을 정당화하려는 것으로 보이는가? 오히려 그 반대다. 더 나아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제대로 살고 싶은 의지가 있기 때문에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에 반박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계속 아플 생각이 없기 때문에. 딛고 일어나고 싶기 때문에.     


‘착취’를 ‘사서 고생’으로 포장하지 마세요     


‘사서 고생’은 말 그대로 사서 하는 고생이다. 자발적으로 고생을 한다는 거다. 그런데 정말 화가 나는 것은 착취를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라고 교묘하게 포장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한때는 속았던 것 같다. 이제야 알겠다. 착취는 사서 고생이 아니라, 그냥 착취라는 것을 말이다. 정말 슬픈 건, 이걸 다 알면서도, 결국 ‘사서 착취’에 스스로 뛰어드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나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속이 상한다. 너무 청승을 떨었나. 정말 아프니까 청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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